Numbers RAW novel - Chapter 69
제69화
오송에서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작 몇 분 시간을 아끼자고 비싼 한일라인을 타는 미친놈은 없기 때문이다.
23대응팀을 비롯한 모든 경찰과 군 요원들은 오송에서 타는 사람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공지능의 분석에 따르면 범인들이 열차에 탄다면 범인들이 탈 확률이 가장 높은 역이 바로 오송역이었다.
이미 이곳도 육군 공안부 놈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몇몇 승객들은 얼굴이나 배를 감싸 쥐고 눈치를 보면서 열차에 올랐다. 인공지능이 거의 모든 승객이 승차한 걸 확인하고 안내 방송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이세화가 들고 있던 핸드폰이 마침내 울렸다. 꼬리칸에 탄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고 이세화를 쳐다봤다. 위장? 아마 범인이 이 꼴을 지켜본다면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여보세요?”
– 내려.
“뭐요?”
– 당장 내려. 열차에서. 돈과 함께.
이세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옆에 있는 육공 요원 이 중사도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이 중사는 이세화가 돌발행동을 했지만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당신 뭐 하는 거냐고!”
그녀의 앞을 막아선 건 또 다른 육공 요원이었다. 놈이 이어셋에 대고 뭐라뭐라 말하는 사이 이세화는 그를 밀치고 열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육공 요원은 반사적으로 이세화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가 열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이거 놔! 위험하다고!”
EV-1이 이세화를 도왔다. 로봇은 육공 요원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뒷덜미를 잡아 뒤로 밀쳐버렸다.
이세화를 막아섰던 육공 요원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열차 화장실 문에 처박혀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이세화는 곧바로 객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제치며 간신히 열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민호도 간신히 EV-1과 함께 밖으로 나오면서 애꿎은 관광객 몇 명이 바닥에 철푸덕 널브러졌다.
“이세화! 어디 가는 거야!”
이세화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11시 19분 열차. 타라.
“아이는! 아이는 무사한 거지!”
– 타.
이세화에게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11시 19분 호남선 완행열차에 올랐다.
– 손님, 표를 보여주십시오.
“경찰이다! 지금 중대 수사 중이야!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
그의 앞을 막아섰던 로봇은 경찰 통신망과 연결되었고 바로 앞을 비켜줬다.
이세화가 호남선 열차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한일 평화의 철도 열차가 출발했다. 이민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열차를 멈출 것을 지시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국제선 열차를 지연시켰다간 정말로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
점점 앞으로 전진하는 열차 안에는 23 대응팀과 육공, 경찰본청 공안과 요원들이 미친 듯이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다.
“이브이!”
EV-1은 이미 정비용 통로로 빠져나왔고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하는 호남선 완행열차를 따라잡았다. 그 뒤로 열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우루루 달리며 완행열차에 오르려고 했다.
경찰관이 역무원 로봇을 붙잡고 열차를 멈추라고 고함을 질렀다.
“멈추라고! 멈춰 세우라고! 교통부에 얘기했어!”
열차 인공지능은 굉장히 고지식했고 정당하지 않은 명령권자의 명령을 당연히 거부했다.
경찰은 호남선 완행열차를 끝내 멈출 수는 없었다.
“비 내리는 호남서어언. 남행 열차에에…….”
마침 비도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속도 모르는 누군가가 남행열차 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차의 기관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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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 하는 짓이지?”
– 뭐 하는 짓이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이세화는 머리에 떨어진 빗물을 털며 전화기에 대고 욕을 내뱉었다.
“지랄하지 말고. 애는 어딨어.”
– 걱정마. 열차에 타고 있긴 하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이세화는 완행열차의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객차는 총 6량이었다. 마지막 량에 올라탄 그녀는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노려봤다.
국내선 완행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뻔했다. 경조사 때문에 친척을 보러 가거나 괴짜 여행객 정도? 국내라면 차라리 비행기나 좀 더 빠른 교통수단이 많아서 굳이 이런 완행열차를 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승객들이 가뭄에 콩 나듯 앉아서 졸고 있었다. 밤 11시가 지난 시간이라 관광객들도 슬슬 피곤해서 잠을 청할 때였다.
이세화는 전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봤지만, 이 칸에는 딱히 수상한 사람들은 없었다.
“이브이, 맡겼던 거 돌려줄래?”
EV-1은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말없이 권총을 그녀의 손에 돌려줬다.
– 똑똑하고 유능한 로봇이지 안 그래? 그 로봇을 무장 해제시키느라 이런 쑈를 벌인 거지 뭐.
“뭐?”
이세화는 무장해제가 된 EV-1을 바라봤다.
로봇은 파일벙커조차 없었고 전의 엑소슈트 팔라딘이 덮친다면 속수무책이었다.
– 무대 위에서 쓸데없는 사람들을 퇴장시키고 당사자만 부르기 위한 극적인 장치랄까? 아, 내가 한때는 극작가가 꿈이었거든. 이런 드라마틱한 연출에 대해서는 한가락 한단 말씀이야.
이세화는 다음 칸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이 칸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은.
오픈프레임 로봇 하나가 사과 선물세트를 들고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로봇은 권총을 겨누는 이세화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사과 선물세트를 틀어쥐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 돈. 아주 많은 돈.
“2억 달러?”
– 아니, 왜 이래. 이쯤 되면 다 알 텐데? 당신도 페어차일드가 신인천개발공사를 먹으려 했던 건 알잖아? 이세화 경감 당신하고 이진영 경위 꽤나 유능하더군. 일을 제대로 세팅하기도 전에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이세화는 조금의 움직임만 있어도 그쪽으로 총을 겨눴고 EV-1도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초합금 진압봉을 겨눴다.
– 하하하하, 그깟 무장 가지고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신사답게 이야기나 하자고. 1번 칸에서 기다리지.
이세화는 전화기를 점퍼 주머니에 넣고 리볼버를 확인했다.
여섯 발.
지금 전화 통화한 사람이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다면 리볼버 한 정으로 상대하는 건 어림없었다.
“이브이, 지원은?”
– 경찰과 육군의 헬기가 따라붙고 있긴 하지만 이 열차 전체에 통신 재밍이 걸렸습니다.
“지원은 없다는 거지?”
–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열차는?”
– 열차를 점거한 놈들이 열차의 전임 인공지능을 해킹했습니다. 제 접속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철도청의 전임 인공지능은 해킹하기 굉장히 까다로웠다. 범인들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찰칵하고 리볼버의 실린더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브이, 한 번 같이 죽어보자. 악으로 깡으로!”
이세화는 해병대의 구호를 외치고 차례로 객차의 문을 열고 첫 번째 객차까지 향했다.
그리고 두 번째 객차를 지났을 때 조용히 누군가가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EV-1은 뒤따라오는 존재를 눈치챘지만, 이세화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세화는 마지막 객차 문을 열기 전에 주저했다.
과연 이 열차 문을 열면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손이 덜덜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딸이 죽은 후 늘 딸의 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질범에게 잔인하게 죽어서 시체로 돌아온 딸.
그녀가 본청의 정보경찰이라는 자리를 때려치우고 중부서의 아동팀으로 오게 된 것도 딸의 환영 때문이다. 딸의 환영이 계속 그녀에게 ‘엄마 살려줘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객차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더 이상 무력하게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이를 엄마의 품에 돌려보내는 것만이 그녀의 위안이었고 유일한 삶의 이유였다.
“가자, 이세화.”
그녀는 마침내 마지막 객차의 문을 열었다.
텅 비어있던 지금까지의 객차와는 달리 60개에 달하는 좌석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들은 이세화가 들어오는 걸 보고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을 내뱉었다.
“어이구 예쁜이 경찰 이제야 오시네에?”
“대장, 저년 일 끝나면 내가 데려가도 돼요? 안 그래도 아랫도리가 벌써부터 후끈하다니까? 예쁜이 상냥하게 잘해줄게.”
상스러운 농담을 하는 놈들.
그들은 바로 틸트로터에서 이세화와 함께 탔던 바로 그놈들, 특수전지원단 놈들이었다.
이세화는 리볼버를 객차 맨 앞 접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에게 겨누었다.
맨 앞에는 군용 재머 장비 등 통신 장비가 가득 쌓여있었고 그 앞에는 또 낯익은 얼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 대령. 역시 너였군.”
“하하하하. 맞아.”
정 대령은 무전기를 잡고 자신이 이세화, 이진영과 통화한 범인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 감이 예리할 줄 알았는데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이세화 경감. 영 실망인데?
공안 3사의 추적 장비를 농락할 정도의 정보전 능력.
희망빌라를 폭파시킬 수 있는 실행력과 폭약 조달 능력.
의문의 엑소슈트 파일럿 천수관음은 육공과 협력하는 특수전지원단 출신.
그리고 쪽지에 쓰여 있던 오더 66.
이세화가 널려있던 증거들을 하나로 꿰어맞추자 머리가 띵 했다.
“왜지?”
정 대령은 부하에게 무전기를 휙하고 던지고 접의자에서 일어섰다.
“같은 말 자꾸 반복하게 할 거야? 돈이라니까? 부수적으로는 뭐 국가안보가 걸려 있는 문제기도 하고.”
이세화는 뱀 같은 정 대령의 낯짝을 쏘아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돈을 가져왔으니 애부터 돌려줘.”
정 대령이 연극배우처럼 두 팔을 벌리자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애? 우리 정의의 경관께서는 뭔가를 존나게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거래 상대는 이세화 경감 당신이 아니야?”
“뭐라고?”
“우리가 바라는 놈이 올 때까지 애는 못 돌려줘. 아아? 그래! 마침 배우가 납셨구만.”
이세화는 흠칫 놀라 뒤를 바라봤다.
낯익은 얼굴이다.
뒤에는 아까 검색대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잘생긴 중년 외모의 로봇이 서 있었다.
이세화는 로봇을 보고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 약속대로 내가 왔다. 경관님에게 애를 넘겨.
정 대령은 뱀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정말로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만 같았다.
“로비, 로비이이!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이게 얼마 만이지? 광저우에서 불타는 바다 위에서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나? 아 아니구나? 아무튼 이렇게 프레임이 바뀌니 몰라보겠다 야.”
로비.
이세화는 다시 뒤를 돌아보며 로봇이 왜 낯이 익은지 깨달았다.
천도영의 보육 로봇.
로비.
아이와 함께 납치되거나 엑소슈트에게 박살 났다고 생각한 그 로비가 이 호남선 완행열차에 타고 있었다.
다만 이세화는 이미 사건의 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뭐야 이세화. 안 놀라는 거냐?”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들이 실수했다는 거.”
정 대령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손사래를 쳤고 이세화가 판결을 선고하듯 말했다.
“너희들은 안개 때문에 아이를 잘못 납치했지. 천도영이 아니라 류모성을. 그래서 아이의 얼굴조차 못 보여준 거야. 그래 협상단계에서 왜 아이 얼굴을 안 보여주는지 이상하다 싶긴 했어.”
정 대령은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래 맞아. 우리의 로비가 우리 천수관음에게 회심의 뻔치를 먹이면서 일이 꼬였단 말이야? 하필 엑소슈트의 센서를 때렸을 줄이야. 노리고 때린 건가?”
정 대령은 로비 쪽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지만 로비는 깊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