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73
제73화
사람들은 소방호스에 매달려 이세화가 있는 곳으로 무사히 대피했고 로봇 역시 소방호스를 타고 돌아오려던 때였다.
계속 질질 끌려오던 꼬리 칸이 하필 로봇이 이쪽으로 거의 다 넘어왔을 때 떨어져 나갔다. 열차가 다시 한번 뒤틀리며 결합구가 박살 났고 오픈프레임 로봇은 박살 난 열차 잔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이세화도 류모성도 이름 모를 로봇이 열차와 함께 박살 나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이 탄 열차 칸도 지붕과 옆면이 뜯겨 나갔고 싸늘한 가을비가 후두둑 그들의 몸을 후려쳤다.
“아줌마. 저 로봇…….”
“그래…….”
“로비도 그랬어요. 언제든 주인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이세화는 류모성을 콱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단발머리를 잡고 벽으로 콱하고 그녀의 얼굴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이, 내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이 중사…….”
이세화는 코피를 흘리면서 뒤를 노려봤다.
근육질 여군 이 중사가 이세화의 옆구리 뒤를 무릎으로 찍었다. 그녀는 다리와 왼팔에 총을 맞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약……. 네놈들. 아직도…….”
특수전지원단 놈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이기기 위해 마약을 투여한 놈들이 많았다.
전쟁 때 상부에서는 놈들이 약쟁이가 다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전투력 운운하면서 이들의 범죄를 눈감아줬다.
어쩌면 정 대령과 특수전지원단이 국내에서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특혜 때문이다.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다는 걸 체험하고 점점 간댕이가 부어갔다.
어쩌면 초법적인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육군 공안부과 그들의 실행부대인 특수전지원단이 맛이 가는 건 전쟁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세화는 파편에 찍힌 옆구리를 얻어맞고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녀의 옆구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세화의 옆에는 아직 그녀가 지켜야 할 아이가 남아있었다.
류모성은 또 겁도 없이 이 중사에게 달려들었다.
“흥, 이 원숭이 같은 난민 애새끼가!”
이 중사는 원숭이처럼 잽싼 류모성의 뒷덜미를 잡았고 마침 깨진 유리창에 바로 집어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류모성은 언제 챙겼는지 이민호가 준 스프레이건을 이 중사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이 중사는 류모성을 놓치고 눈을 감싸며 허우적거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아아아!”
류모성이 달려드는 바람에 이세화는 이 중사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그녀의 눈앞에 로비의 팔이 떨어져 있다.
아까 팔라딘은 코스모스 꽃잎 잡아 뜯듯 로비의 사지를 찢어버렸고 그 중 ‘도어노커’가 달린 팔이 그녀의 눈앞에 떨어져 있었다.
로비가 장비한 도어노커는 엑소슈트 탑재용이었지만 이세화는 그걸 수동으로 쏘는 법을 전쟁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Get off of my cloud!(내 구름 위에서 꺼져).”
이세화는 로비의 오른팔을 이 중사의 옆구리에 대고는 바로 사출 버튼을 눌렀다.
콰앙!
로비의 도어노커는 중형 엑소슈트의 장갑도 우그러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 중사는 뒤늦게 이세화에게 유압 피스트를 휘둘렀지만 이미 늦었다. 이 중사의 왼쪽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나며 그녀의 육중한 몸이 옆으로 붕 뜨더니 창문을 뚫고 열차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이 새…….”
이 중사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은 조치원역 간판에 부딪혀 두 동강이 났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피를 뿌리며 간이역 편의점 매대와 우동집에 처박혔다.
우동을 준비하던 로봇과 역내의 청소 로봇이 갑자기 반으로 갈라져 날아온 시체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류모성, 괜찮아?”
“아줌마! 괜찮아요?”
이세화는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누르면서 류모성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피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앞에서 아직도 들리는 총성에 눈을 찌푸렸다.
“너,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마.”
“흥, 영웅은 여자를 지켜야 하는 법.”
“지랄한다.”
이세화는 욕을 하면서도 씩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열차는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군산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군산항에는 정 대령이 미리 수배해 놓은 잠수함이 기다리고 있었고 레버리지를 확보하면 잠수함은 그들을 태우고 귀신도 모르게 한국을 빠져나갈 것이다.
정 대령은 열차가 난장판이 되건 말건 접의자에 앉아 부하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대령님! 알아냈습니다! 아이가 있는 곳은 방벽의 대마초 가게 근처 요우티아오 집 2층!”
“오케이! 애들 보내!”
“이미 지시했습니다!”
부하는 만신창이가 된 로비를 버려두고 열차 밑으로 내려왔다. 육공 요원은 전차 주포나 기관총에 맞아 죽은 시체들을 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와우 많이 죽었네요?”
“그만큼 우리 몫이 는 거지.”
“하긴 그쵸. 특전단 놈들 지들이 잘났다고 뻐기더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올리브색 우비를 입은 육공 요원은 권총을 꺼냈다.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며 부상을 치료하던 특수전지원단 놈들이 기겁했다.
“무, 무슨 짓을…… 하는…….”
“무슨 짓이긴. 개인적인 감정은……. 아 있다. 내 핫도그 니가 처먹었지?”
탕탕탕탕!
정 대령의 직속 부하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특전단의 부상자들을 권총으로 처리했다. 이들에게 육군 특수전지원단 놈들은 그저 쓰고 버리는 버림패에 지나지 않았다.
육공 요원들은 부상자들을 전부 처리한 후 시체들을 창가로 밀어버렸다. EV-1과 처절하게 싸웠던 것이 무색하게 그들의 시체는 비 내리는 논바닥에 철푸덕 떨어진다.
“대령님, 그쪽 인원들이 레버리지를 확보하면 아이는 어떻게 할지 명령을 요청했습니다.”
정 대령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뭘 그런 걸 물어. 죽여야지. 애가 우리 얼굴을 봤고 꼬리를 밟히면 끝이야.”
“그럼 천수관음은 어떻게 하죠?”
“데려가야지. 놈은 특별하니까.”
정 대령은 검지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고 다른 육공 요원들도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령은 낙하산을 등에 짊어지고 폐쇄형 헬멧을 쓰면서 말했다.
“그래, 그 아이는 특별하지.”
EV-1과 팔라딘은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천수관음과 팔라딘은 전혀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이진영은 팔라딘이 열차 뒤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었고, 팔라딘은 EV-1과 이진영과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근접전을 펼쳤다.
팔라딘의 전자식 파일벙커가 아슬아슬하게 EV-1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고 EV-1도 마찬가지로 파일벙커로 팔라딘의 다리를 찍으려고 했다.
두 다 전차포와 기관포 탄을 모두 소비한 상태였고, 서로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건 파일벙커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흡사 팔라딘과 EV-1의 대결은 로마시대 검투사의 처절한 격투를 보는 것 같다.
– 꽤나 재미있군! 이진영이라고 했나! 내가 너의 파일을 조금 들여다봤지! 넌 광저우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온 놈이더군!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카앙!
파일벙커와 파일벙커가 부딪치며 하얀 불꽃이 튀겼다.
– 넌 왜 경찰을 하고 있지! 넌 차라리 육군에 남았다면 좋은 대우를 받았을 텐데! 로봇 부대에서 성과도 좋았고!
이진영은 그 말에 썩은 표정이 되었다.
“내 전쟁은 끝났어! 그때 그 해변에서!”
– 아니!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모습만 다를 뿐 영원히! 영원히! 계속될 거다! 넌 그 지옥에서 헤어나올 수 없고!
팔라딘과 EV-1의 몸체가 서로 부딪쳤다. 두 기체는 칼을 맞댄 기사들처럼 서로를 열차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젠 힘 대 힘의 대결이었다.
둘의 대치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달걀과도 같은 전면장갑이 열리고 천수관음이 오브레즈 피스톨을 들고나왔다.
“두 번은 안 당해.”
이진영은 어느새 EV-1의 위로 올라와서 P226 권총을 쏴버렸다.
퍽퍽퍽퍽.
그는 탄창이 다 비워질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고 천수관음은 하얀 그의 갑옷 위에 축 늘어졌다. 붉은 피와 투명한 갈색의 엑소슈트 파일럿 슈트의 유동액이 주르륵 하얀 방염타일 위로 흘러내린다.
– 경위님 위험했습니다.
EV-1은 열차 양옆에 숨겨져 있던 천수관음의 이동포대를 가리켰다. 놈의 팔이라고 할 수 있는 이동포대는 폐차장에서 전부 박살 난 게 아니었다.
놈은 일부러 해치를 열고 나와서 이진영을 자극한 후 포대를 이용해 죽이려고 했다.
주인을 잃은 이동포대가 떨어져 나가고 팔라딘 엑소슈트 역시 덜컹하더니 흔들리는 열차 위에서 떨어진다.
열차 옆으로 굴러떨어진 놈의 시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진영은 한숨을 쉬었다.
“가자 이브이, 아직 정 대령이 남았어.”
EV-1은 열차 위에서 롤러대시를 가동해서 단숨에 열차 맨 앞으로 달려왔다.
“하하하! 이진영! 즐거웠다! 아디오스!”
그러나 이미 정 대령은 벌써 천도영의 위치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폐쇄형 헬멧을 쓴 정 대령은 자체 없이 가슴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놈의 등 뒤에서 낙하산이 펼쳐지면서 정 대령과 부하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해군 전투기들이 놈들이 속속 낙하산을 펼치는 걸 보고 급히 저공으로 내려왔지만 정 대령은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쏘는 시늉을 했다.
“우린 바보가 아니야.”
해군기들은 뜻밖에도 육군의 방공부대가 쏘아 올리는 미사일을 레이더로 발견하고 일제히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정 대령은 육군 공안부였고 방공부대 하나쯤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다.
“헬기를 저공으로 접근시켜!”
이 역시 견제 수단이 있었다. 놈들은 단거리 SAM(지대공 미사일)을 내려오지 못하게 견제했다. 애꿎은 해군 헬기가 미사일을 피하다가 전신주와 충돌하며 오렌지색 불꽃이 치솟아 올랐고 그사이 놈들은 낙하산을 펼쳤다.
열차가 달리는 속도는 군용 낙하산을 펴기에 충분한 속도였고, 낙하산은 바람을 받아 단숨에 저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이진영은 글라스 모듈로 놈들을 조준하려다가 열차가 덜컹거리면서 조준이 흔들렸다.
“이브이 뭐야!”
– 열차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하기 위해 속력을 한계까지 높였습니다.
“해킹은? 방법이 없을까?”
– 시간이 부족합니다.
“무슨 시간?”
– 열차신호기가 파손되면서 정규 다이어그램의 선로를 이탈하였고…….
“쉽게 말해!”
– 2분 뒤면 상행선 열차와 충돌합니다.
이진영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상행선 열차를 볼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 이 열차는 시속 3백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고 이대로 충돌하면 저쪽이고 이쪽이고 끝장이었다.
“경위님, 열차가 충돌한다고요?”
이세화가 점퍼로 옆구리를 누른 채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는 류모성과 승객 다섯 명이 이진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다. 이진영의 머리가 하얘질 때였다.
x8 달리는 열차 위에 중립은 없다.
– 경위님, 저는 그때 그렇게 답했지요?
“뭐?”
– 가능한 모든 사람을 살리겠다고.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EV-1은 등 뒤의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이진영을 억지로 열차에 내려놓고 창문을 통해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이브이! 무슨 짓이냐!”
– 저의 프레임이라면 가능합니다.
로봇은 질퍽한 땅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롤러대시와 애프터버너를 가동했다. 로봇의 등 뒤에 숨겨진 제트엔진이 불을 뿜으면서 로봇은 단숨에 폭주열차의 맨 앞에 다다랐다.
이진영은 로봇의 모습을 보고 뒤늦게 몇 달 전 EV-1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깡통, 그 이야기 알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가 달려오는 기찻길에 서 있는 남자. 너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기차선로 양쪽에 작업원이 흩어져 있어.’
– 저는 차단기를 한 명이 있는 곳으로 돌리겠습니다.
– 그리고 전 열차를 막아설 겁니다. 가시거리에 있다면 제 스펙으로 한 명 정도는 구출 가능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를 제 다리를 희생해서라도 멈출 수도 있고 사람이 타지 않은 화물열차라면 강제 탈선도 고려하겠습니다.
‘야 그건 반칙이잖아.’
– 반칙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 능력이 닿는 한 인간 모두를 살릴 방법을 끝까지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