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77
제77화
이진영은 잽싸게 이민호를 부축했지만, 그는 처음 맞아보는 총탄 쇼크로 기절해버렸다.
이진영이 준 총에는 총알이 한 발도 들어가 있지 않았고 이진영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쓰러진 이민호를 바라봤다.
“시발, 총 그냥 버리시라니까.”
이진영은 운동화 끈을 풀어 이민호의 팔 위쪽을 꽉 묶고는 이를 갈았다.
어둠 속에서 광학 위장을 하고 있던 정 대령의 부하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놈들은 헬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헬기 조종사 쪽으로 다가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육공 요원들은 이진영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
이진영은 한숨을 내쉬며 놈들이 하라는 대로 양손을 목덜미에 올리고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정 대령이 이죽거리며 나타났다.
“박 팀장, 늦었잖아?”
“저 꼰대 새끼가 헬기에 탄다고 하지 뭐야. 어쩔 수 없었어.”
박승대는 쓰러진 이민호를 턱으로 가리키고는 정 대령에게 담배를 한 개비 받았다.
이진영이 있는 곳에서 이민호는 군산항의 조명에 역광으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고 푸른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그의 머리 위로 피어올랐다.
“왜, 이진영? 이 상황은 설마 상상하지 못했나? 흐흐흐, 다 잡아 놓은 고기를 여기서 놓치게 될 줄이야? 아쉽게 되었군.”
박승대는 허리를 살짝 수그려 이진영과 눈을 마주쳤다. 이진영은 손을 뒤로 깍지낀 상태로 박승대를 노려봤다.
“억울허냐? 미안하게 됐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아이고야아아. 까음빡 속았지 뭐야아?”
박승대는 이진영의 비아냥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너. 알고 있었던 거냐?”
“대충은. 솔직히 이상하잖아? 경찰이 육공 앞잡이 노릇을 하며 진주군처럼 중부서에 들어올 때부터 이상했지.”
“…….”
“당신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하아, 정확히는 언제부터냐?”
“요상하게 인질범들의 반응이 빠르다 싶었지. 그리고 아무리 육공이 대단하다 한들 전화추적을 농락하며 마음껏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까? 당신들은 류모성을 오인 납치하는 바람에 공개수사로 로비를 압박하고 지역서의 정보를 활용할라고 들이닥친 거 아니야?”
공안 3사가 동시에 중부서에 들이닥치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런 스무스한 업무연계는 경찰 공안통의 협력이 없으면 어림없는 일이지. 그래 본청 공안 내부의 첩자가 없이는. 그래서 난 스파이가 이민호 부장인 줄 알았어.”
“호오, 겁도 없이 헬기를 같이 타고 온 건 이 부장이 스파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나?”
역광이라 박승대의 표정이 보이진 않는다.
“난 이민호 부장이 스파이로 잠복해 너구리굴 회의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천수관음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하잖아? 신출귀몰한 납치범들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활극을 펼치다니 말이야? 이민호 부장 말고 공안 1부 요원 전부 다 육공과 한패였다니. 시팔 누가 알았겠어?”
정 대령과 박승대는 킬킬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고 이진영도 킬킬거리면서 따라 웃었다.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어떤 방식으로 외부 실행팀과 연락했고 자기들끼리도 그 방식을 써서 소통했다.
신희정은 이민호가 가담자인지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이진영에게 고역을 맡겼다.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신나는 해답 풀이는 이쯤하고. 이제 어떡할 거지? 애는 우리의 용감한 최상훈 경사님이 구출했고, 레버리지도 지금쯤은 잘쌩긴 요원님이 확보했을 테고.”
“알면서 따라온 거냐?”
“물론. 행선지는 군산항이라는 걸 알았지만 정확히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르니까.”
놈들의 행선지가 군산항 어디라는 건 로비가 알아냈고, 이진영은 헬기 안에서 이민호와 박승대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승대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이진영은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본 것이다.
“내가 만약 여기로 오지 않았다면?”
“뭐, 정 대령은 놓치겠지만 당신은 정보국에게 잡혀갔겠지.”
“어떻게?”
“중국요리 그릇.”
박승대와 정 대령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릇 회수하는 로봇과 배달 로봇은 노마크니까. 그걸로 천수관음 등 아이를 실제로 납치한 실행조와 연락한 거지? 대놓고 연락하면 경찰본청이나 육본에 걸릴 테고. 이건 청와대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사안이니까. 증거, 기록 등은 정보국에 들어가 있겠지. 이미 그때부터 넌 끝났어.”
이진영과 신희정은 너구리굴 회의가 끝나고 중국집 요리 그릇에 대해 이야기했고 거기서 정 대령과 경찰 공안부의 꼬리를 잡았다.
이진영이 이세화에게 준 오더 66이라는 것은 영화 스타워즈 프리퀄에서 나오는 명령이었다. 황제가 오더 66을 지시하고 나서 제다이들은 그때까지 믿고 있던 클론 병사들에게 ‘등 뒤에서’ 배신을 당했다.
이진영은 요리 그릇의 메모리를 발견하고 이세화에게 이민호를 비롯한 본청 공안과 정 대령 따위를 믿지 말라고 말한 것이었다.
또한 신희정이 제때 순항미사일을 보내 줄 수 있었던 것도 요리 그릇에 숨겨져 있던 메모리 덕분이었다. 신희정은 그들이 어떤 방식을 쓸지 미리 알고 있었고 육군과는 앙숙인 해군의 도움을 받았다.
박승대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하는 투로 이진영을 노려보다가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경찰을 쐈으니 처맞아도 후회는 없겠지?”
이진영은 이세화에게 받은 38구경을 점퍼 목 뒤에 숨기고 있었고 바로 박승대와 정 대령을 쏴버렸다.
박승대는 어버버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정 대령은 다리에 총을 맞고 앞으로 털푸덕 쓰러지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 새끼 죽여어어어!”
그러나 주변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정 대령은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저격조! 이, 이 새끼가 나, 나를 죽이려 한다고!”
이진영은 태연하게 일어서서 리볼버의 실린더를 열고 탄피를 밑으로 쏟았다. 탄피가 땅바닥에 닿으며 탱그랑 하고 맑은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리볼버를 재장전하고 손바닥을 귀에 가져다 대며 이죽거렸다.
“이봐요. 지금 이 근처는 항모 충무공 이순신이 장악하고 있어요오. 항모에는 어떤 팀이 있다?”
“씰!”
해군 최강의 특수부대 씰.
공안인 정 대령은 바로 정답을 알아냈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뒷배도 없이 헬기를 탔을 것 같아?”
이진영은 바닥을 기고 있는 두 명을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이미 군산항에는 이진영의 첩보를 받고 정보국과 씰팀이 잠복하고 있었고 정 대령이 나타나자 조용히 정 대령의 부하들을 제압했다.
만약 정 대령이 육군 특수전지원단 놈들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아마 여기에서도 거나하게 총격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해군 씰팀은 작살총이나 비소음병기로 공안 요원들을 제압했다. 정 대령이 타고 갈 미군 잠수함은 애저녁에 이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군산항에서 떠났다.
씰과 정보국 요원들이 20여 명 남은 육공 요원들과 경찰 공안 1부의 반란자들을 포박해 줄줄이 항구에 무릎 꿇게 했다. 중부서에서 마치 임금님 행차라도 한 것마냥 들이닥칠 때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타타타타!
바다에 수많은 물결을 만들면서 틸트로터 한 대가 군산항 부두에 착륙했다.
수직이착륙기 옆면에는 금성전자(金星電子)라 쓰여 있었고 후방 램프에서 신희정이 푸른 넥타이와 양복 자락을 휘날리며 멋지게 내렸다.
“그냥 영화 배우 하라니까! 나 참.”
“아니! 영화 배우는 그쪽이 하셔야지! 열차 사고의 현장에서 살아남질 않나! 전쟁 후 최대의 공안 비리 사건을 적발하지 않나!”
“어차피 공은 잘쌩긴 요원님이 다 가져갈 거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야! 나만 박박 기고 요원님은 기병대처럼 믓지게 등장하시고!”
“아 꼬우시면 승진하시등가!”
두 사람은 틸트로터 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마음껏 악담을 퍼부었다. 신희정은 타박은 하면서도 이진영의 입에 담배를 물려줬다.
“이민호 부장은 괜찮은 거예요?”
“팔을 맞긴 했는데 괜찮아요! 제기랄! 저 양반도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니까?”
이진영은 구급 로봇에게 처치를 받는 이민호를 짠한 눈으로 바라봤다.
제일 먼저 이민호 부장이 들것에 실려 틸트로터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로 박승대를 비롯한 범인들이 줄줄이 틸트로터로 실려 갔다.
정 대령은 끌려가면서도 뱀 같은 얼굴에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니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냐! 어! 난 빽이 많아! 곧 풀려나올 거다! 난 상층부의 구리구리한 일들을 처리하던 사람이다! 너희들은 후회하게 될 거다! 전쟁 때 벡스 가스 유출 사건 알아? 혹은 육군 장성들이 사관학교 여생도들을 강간한 스캔들은 어때? 아니면 ‘병과번호’에 관한 건? 그래! 그걸 말하면 육군은 큰일 날걸?”
신희정은 그 대목에서 정 대령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다른 범인들은 수직이착륙기에 태우고 정 대령만은 램프 아래에 남게 했다.
신희정은 부하들에게 뭐라뭐라 말하고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틸트로터를 출발시켰다.
틸트로터가 하늘로 솟아오르자 정 대령은 이진영을 바라보며 거의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아아! 내가 육공에 몸담은 지가 얼만데! 내가 정보국에 아는 사람이 많다 이거야. 이진여어엉! 아쉽게 되었군 하하하하하하! 이게 육공이라고! 이게 육공이야아아!”
정 대령은 신희정더러 어서 수갑을 풀라는 듯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신희정은 틸트로터가 하늘 높이 솟아 오를 때까지 그냥 담배만 피우며 정 대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해지고 씰팀도 그렇다고 정보국 요원도 모두 없다.
저 멀리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 소리, 그리고 컨테이너 크레인이 움직이는 기잉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이명 소리가 들릴 듯한 고요함에 정 대령도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비로소 눈치챘다.
“뭐, 뭐지?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신희정은 담배를 툭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밟았다.
“그게 문제야.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당신이 여전히 살아있는 걸, 당신이 말한 사람들이 좋아할까?”
정 대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튼, 이걸 어쩌나? 이진영 경위니임, 정 대령은 검거과정에서 실종되어버렸네요?”
“아이고오, 그렇네요. 보고서를 쓸 때 팀장님한테 갈굼 좀 받겠네에.”
“이세화 팀장님이요?”
“아뇨, 23팀장님이요. 아, 맞다. 그거 들었어요. 이세화 팀장님 꼬시려고 했다면서요?”
“아, 거참 쓸데없는 건 또 어디서 들었대요?”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저도 정보원이라는 게 있거든요.”
정 대령을 앞에 두고 신희정과 이진영은 이세화 이야기를 하며 시시덕거렸다. 남자들은 둘만 모여도 으레 여자 이야기를 꺼내게 마련이었다.
“뭐, 뭐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서, 설마 재판도 없이 여, 여기서 처형하려고?”
정 대령도 전쟁 때 재판 없이 수많은 장병들을 즉결처분한 주제에 재판을 받을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희정도 이진영도 딱히 정 대령을 쏠 마음은 없었고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다다다다!
군산항 저쪽에서 싸구려 엔진을 단 어선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쪽을 바라봤다. 정 대령도 어선 소리를 듣고 그쪽을 돌아봤다.
“뭐, 뭐야. 뭐, 뭘 하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