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78
제78화
정 대령이 겁을 잔뜩 먹고 벌벌 떠는 사이 어선에서는 누군가가 광동어를 주고받으며 내렸다.
“係佢哦?”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 뭐야! 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이놈들은 뭐고!”
“約束係約束. 약속은 약속. 난 아직 굴다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순직하고 싶지는 않거든. 어이, 웡꺼에게 안부도 전해줘. 나중에 술 한잔하잔다고!”
어부들은 이진영을 힐끔 바라보며 중지를 올렸다.
“워, 웡꺼! 워, 웡꺼에게 나, 나를 보낸다고! 네, 네놈들 버, 범죄자와 거래를 한 거냐!”
정 대령은 극도로 공포감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어부들은 정 대령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어선에 던져 넣었다.
어선은 다시 통통통통 지금은 불법이 된 엔진소리를 내뿜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저 배에 탄 정 대령도 이진영도 저 배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경위님, 도시 전설이 생기겠군요.”
“정 대령으로 보이는 사람이 능지처참을 당했다더라. 뭐, 그런 식으로요?”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하며 부둣가에서 등을 돌렸다.
“잘쌩긴 요원님, 이제 어떻게 돌아가죠? 헬기도 다 보냈으니.”
“아 그놈의 잘쌩긴 소리는 집어치우세요.”
“좋아하믄서. 암튼 이 근처에서 한잔하고 갈까요? 군산에 제가 잘 아는 슈퍼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 술맛이 기가 막혀요. 허름한 비닐 포장만 봐도 술이 땡기죠.”
“아? 또 비장의 술집? 거 좋죠. 내일은 저도 오프니 한 번 제대로 마셔 봅시다.”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기어나올지도 몰라요.”
“허이구. 맨날 그 소리래?”
두 사람은 씁쓸한 표정으로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비가 축축하게 내린 군산항을 빠져나왔다.
x9 집으로. 그리고 안녕.
이세화는 류모성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류모성은 아줌마 손을 잡고 가는 게 부끄러웠는지 계속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세화는 놓아주지 않았다.
“팀장님, 응급처치는 했지만 바로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시끄러, 대현아.”
김대현 형사가 불안한 듯 이세화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그것도 거절했다.
인천 중부서 아동범죄전담팀은 류모성과 함께 굴다리로 들어왔다.
이제 날이 밝고 있었고 비가 내린 난민지구 곳곳은 물웅덩이가 패여서 신발에 진흙이 마구 튀었다. 류모성은 옆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세화는 운동화가 젖거나 말거나 똑바로 앞으로 걸었다.
저 멀리 란 아주머니의 포장마차가 보였다. 방수포를 잘못 쳤는지 포장마차 지붕에 물이 고여서 란 아주머니는 막대기로 지붕을 들어 올려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첨벙, 물이 쏟아져 내리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물방울 너머로 류모성이 달려와 엄마에게 안겼다.
란 아주머니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아이를 콱 끌어안았다.
아이가 납치된 지 딱 24시간.
이세화는 아이를 엄마에게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환하게 웃는 류모성을 보며 이세화는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뭔가가 스스르 뽑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란 아주머니는 뒤늦게 아이를 데려온 이세화와 형사들에게 달려가서 한 명 한 명 손을 잡으며 떠제(多謝,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이세화는 란 아주머니랑 악수하면서도 주변에서 뛰노는 난민 아이들을 바라봤다.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인데도 난민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돌아온 건 류모성뿐이다. 대한민국 경찰은 아직도 난민 실종에 수사는커녕 접수조차 받지 않는다.
만약 이진영이 신고번호 2731-4S50-8T46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류모성도 천도영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세화는 힘차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자 대현아.”
“예? 누님? 아니 팀장님 어디로요?”
이세화는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 * *
두 명의 아이는 각각 자신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언론을 달궜던 천도영 납치사건은 뜻밖에도 공안 부서의 일탈과 난민 지구 개발을 둘러싼 최악의 스캔들로 번졌다.
임유진의 레버리지, 즉 난민지구 개발계획은 그녀의 뜻대로 공개되었다.
페어차일드가 계획한 난민지구 개발은 난민들의 완전 퇴거를 전재로하고 있었다. 그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230만 명 난민 전원이 보트피플이 되어 한국을 떠났어야 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정말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페어차일드를 응원했고, 난민 인권단체들은 일제히 페어차일드에 대해 비난 성명을 냈다.
어찌 되었든 개발은 난항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롱꺼 패거리들이라는 불완전 요소가 페어차일드의 주주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결국 페어차일드의 신인천개발공사 인수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개발계획도 당분간은 수그러들었다. 인천과 대한민국의 골칫거리인 난민지구 월미도 신간척지는 여전히 왕성하게 영업 중이었다.
이 최악의 납치사건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면 바로 방벽 근무자였던 최상훈 경사였다.
최상훈은 천도영 어린이를 무사히 구출한 일로 국민적인 스타가 되었다. 임유진에게 천도영을 데려다주는 사진도 찍고, 경찰청장 표창을 받으며 2계급 특진도 했다.
경찰은 본청 공안 부장인 이민호를 제외한 공안 1부 전체가 이 일에 개입했다는 걸 묻기 위해 최상훈의 미담을 대대적으로 뿌렸다.
어릴 때부터 힘들게 자랐지만 올곧은 사람이었다는 둥.
경찰 직무평가에서도 만점을 받았다는 둥.
비록 한직으로 물러났지만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둥.
최상훈의 사진은 신문과 방송에 도배가 되었고 방송에서 섭외가 미친 듯이 들어와 전광판에도 그의 얼굴이 매일 걸려 있다시피 했다.
“하이고오. 우리 형님 출세하셨네.”
이진영은 종이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인쇄된 최상훈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진은 최상훈이 병원에서 천도영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는 장면이었다.
겨우 산탄총 두 자루로 육공 요원들을 잡았으니 최상훈도 공이 영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진짜 중요한 일을 처리한 이진영은 이번에도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정 대령의 실종도 그렇고 이진영이 계속해서 경찰 고위 관료를 잡아내는 바람에 상층부에서는 이진영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진영 본인은 팀장도 달지 못한 만년 경위인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종이신문을 접어서 옆 의자에 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진영이 있는 곳은 역 대합실처럼 의자가 굉장히 많이 놓여있었고 로봇들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갔다. 사람들은 번호표의 숫자가 안내될 때마다 로봇과 함께 일어서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로봇을 등록하는 산업자원부의 인공지능 담당부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프레임으로 갈아탄 EV-1이 등록을 마치고 이진영에게 걸어왔다.
“여, EV-1, 새로운 몸은 어때?”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선과 마이크로 웍스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든 EV-1의 프레임은 여전히 검은색에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막 등록했는지라 무장은 전부 해제되었지만, 항공기용 무장 파일런이나 중화기를 거치할 수 있는 프레임도 보인다.
로봇 와이프를 등록하러 온 사람은 EV-1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 EV-1은 야릇한 조형의 로봇 와이프 모델과 똑같은 휴머노이드-인형기였지만 둘을 비교해보면 같은 로봇 같지 않았다.
하나는 인간의 피부가 덧씌워지고 정교하게 조형이 되어 있어서 진짜 인간 여성 같았다. 하지만 EV-1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중장비나 탱크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이건 어디 로봇이죠? 얼마에 파는 겁니까?”
이진영은 로봇 덕후의 호기심에 그냥 쓴웃음만 지었다.
EV-1은 도입 당시부터 그 어떤 기관이나 개인도 소유할 수 없었다. 프레임은 아선 인더스트리에 수주를 주고 전체적인 로봇은 경찰에 임대하는 형식이었고, 어디까지나 EV-1의 진짜 주인은 인공지능 개발사인 마이크로웍스였다.
“경찰 로봇입니다. 안 팔아요.”
“앗, 아……. 아? 아!”
로봇 덕후는 EV-1을 알아봤다.
호남선 열차 충돌사고에서 몸을 던져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로봇.
EV-1은 최상훈 경사만큼이나 경찰의 미담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EV-1이 거기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어쩌다가 충돌사고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해낸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진영은 로봇 덕후를 무시하고 새로운 프레임의 EV-1과 함께 로봇 등록부서를 빠져나왔다.
그는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 한 대를 물고 휘적휘적 어디론가로 향했다.
– 경위님, 어디로 가십니까?
“장례식.”
– 장례식이요?
“아니 사형집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진영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로봇 등록부 뒤쪽 건물로 향했다.
로봇 등록부는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모던했지만 그 건물 뒤에는 마치 치부를 감추기라도 하듯 마치 녹이 슨 철강공장 같은 시설이 있다. 근처로 다가가면 마치 쎄잉꺼의 ‘폐차장’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유동액 액체와 금속의 비릿한 냄새. EV-1은 후각분석센서만 있을 뿐 냄새를 맡을 수 없는데도 이 철강공장 같은 곳 앞에서 멈춰 섰다. 이진영은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돼.”
– 아뇨, 따라가겠습니다.
이진영이 다시 휘적휘적 철강공장 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 역시 키오스크 인터페이스를 제외하면 허름한 공장 같았다. 안쪽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사람이 힐끔 EV-1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폐차하시게요? 아직 새것 같은데?”
이진영은 뒤에 버티고 선 EV-1을 힐끔 쳐다봤다.
“아뇨, 참관하러 왔습니다. 수고하세요.”
이진영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로봇 폐기부’직원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쓸모없어진 로봇을 폐기하는 곳이었다. 로봇을 등록하는 곳이 모던하고 뭔가 미래적인 느낌이라면 이곳은 그냥 폐차장 그 자체였다. 고장 난 로봇들이 줄줄이 서서 양자두뇌의 제거와 프레임의 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지어 선 로봇들을 보면 소 도축장을 보는 느낌이다. 로봇들은 공포를 느낄 리 없었고 조용히 인간의 명령대로 폐기를 기다렸다.
먼저 프로그램을 소멸하고 양자두뇌를 제거하고 그다음은 프레임에서 쓸만한 부품을 떼어낸 후 중고상이나 개인에게 판다.
로봇 폐기장은 도마다 하나씩 있었고 녹슬고 지저분한 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곳도 민간업자가 운영하는 곳이다.
이진영은 로봇이 최종적으로 폐기되고 같은 로봇에 의해 분해되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 누굴 기다리시는 겁니까?
“아니, 그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이진영은 알 듯 모를듯한 말을 남기고 12번 폐기 섹터로 향했다.
지나가는 동안 보이는 로봇 폐기의 절차도 모습도, 그리고 감정도 섹터마다 다 달랐다.
어떤 섹터에서는 기업에서 퇴출 처리한 로봇들이 기계적으로 서서 폐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어떤 섹터에서는 마치 반려동물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처럼 ‘장례식’이 벌어진다.
“맥스! 넌 좋은 로봇이었어!”
– 주인님, 저도 주인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
“맥스으으!”
중년 남자와 가족들이 고물 가정부 로봇 주변에서 눈물을 흘렸다.
로봇은 더 이상 메모리 등 부품이 최신 부품과 호환이 되지 않았고 40여 년 긴 세월을 마치고 폐기되었다.
가족들은 맥스의 메모리가 분해되고 오픈프레임인 맥스의 양자동공에서 푸른빛이 사라지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