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81
제81화
3부 접수번호 라종 9669030
대한민국 의료보험법
제 2조 (용어의 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의 각 호와 같다. (일부개정 20XX 10. 1)
2. 공무원이라 함은 공무원 연금법 제 2조의 4호, 5호에 규정한 공무원을 말하고, 군인이라 함은 군인 연금법 2조에 규정한 병장 이상의 군인을 말한다.
1. 근로자 또는 임금이라 함은 근로기준법 15조와 19조에 규정한 근로자 또는 임금을 말한다.
6. 자영업자라 함은 근로자, 공무원에 해당하지 않는 자로서 기본소득 외에 일정한 소득을 가지는 모든 국민을 말한다. 단 단기임시직의 경우는 기본소득자로 본다.
3. 기본소득자라 함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기본소득법 23조의 기본소득을 받는데 결격사유가 없는 자를 말한다. (개정 20XX 10. 1)
의료보험법 시행령 15조-(보험의 등급과 보장범위) 국민 의료 보험의 등급은 의료보험법 2조와 18조와 영리병원 보장법 4조에 따라 가, 나, 다, 라종으로 나눠지며 각각의 보장범위는 다음의 각호와 같다.
x1 가, 나, 다, 라.
“부러진 앞니도 앞니지만, 다른 것도 많이 썩었네요. 진작 오시지 그랬어요? 보험 등급도 좋으면서,”
“하하,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치과 치료가 더 겁나서요. 제아무리 역전의 용사라도 치과 앞에서는 세 살 먹은 어린애로 돌아간다니까요.”
노인 치과의사는 ‘이건 뭔 농담이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환자의 말을 무시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세요.”
“벌써부터 아픈데 어쩌죠?”
“어차피 아파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긴 합니다만.”
의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로봇을 바라봤다. 치과에는 의료 전임 인공지능이 배치되어 있었고 치과 로봇의 모습은 여러 개의 발이 달린 문어와 비슷했다.
의사가 처방전과 시술 정보를 확인하고 엔터키를 누르자마자 문어발 같은 로봇 모듈이 서서히 남자의 머리 위로 내려온다.
이제부터 의사가 할 일은 그저 로봇이 알고리즘과 의료법에 따라 정확한 처치를 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인공지능은 여러 개의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동시에 빠르고 정확하게 의사가 진단한 작업을 실행했다. 말썽쟁이 형사의 입을 사정없이 벌리고 신경치료를 하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세라믹 앞니와 어금니 크라운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다.
남자가 앉아있는 진료 의자는 얼핏 보면 치과가 아니라 사람의 입에 필요한 부품을 꽂아 넣는 작은 공장처럼 보였다.
마취와 동시에 썩은 부분이 고주파 커터에 갈려 나가고 석션과 세척이 동시에 진행된다.
매니퓰레이터 암에는 작은 게의 집게발처럼 작은 기계 팔들이 달려 있었다.
두어 개의 기계 팔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남자의 이에서 나오는 이빨 파편들을 잡아 세심하게 분리했다. 또 다른 기계 팔은 입에 고여 있는 물을 세심하게 흡입하여 환자가 중간중간 일어나서 굳이 입을 헹굴 필요도 없었다.
3D프린터로 앞니 임플란트 기초작업이 진행되고 곧이어 썩은 부분을 갈아내고 크라운을 씌우기 위해 매니퓰레이터 암이 레이저 계측기로 구강구조를 스캔한다.
그러는 동안 한쪽에서는 남자의 앞니에 임시로 씌울 브릿지 틀이 만들어지고 식빵 위에 잼 스프레드를 바르듯 접착제를 죽 얹어놓는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이빨은 남자의 입속으로 들어가 정밀기계를 조립하듯 칙칙하는 소리와 함께 고정되었다.
각종 신경치료를 완료하거나 앞니 기초 임플란트를 박아 임시브릿지를 만들고, 어금니의 신경치료부터 이빨을 씌우는 과정까지는 불과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마 의료로봇이 도입되기 전이라면 신경치료만으로도 아마 며칠을 치과 오라 가라 했을 것이다.
이윽고 남자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매니퓰레이터 암이 기이잉하고 일제히 뒤로 물러나고 의자 역시 자동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입을 마저 헹구시고 어금니에 이물감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아, 예.”
남자는 입을 헹구고 시험 삼아 새로 박은 이를 악물어봤다.
“나쁘지 않은데요?”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고 키보드를 치다가 문득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3층 건물에서 뛰어내렸거든요. 그러다 파이프에 부딪혀서 앞니가 깨졌어요.”
의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찰이라고 그랬죠? 어디 서에서 근무하시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인천 중부서에요. 강력전담부.”
“아아.”
어지간히 붙임성이 없는 늙은 의사였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서랍에서 잭 다니엘 위스키병을 꺼냈다.
“한잔하고 가쇼. 오늘 내내 욱신거릴 텐데 그 동네 가려면 진통제 처방보다는 이게 낫겠군.”
“이야, 위스키를 주는 치과가 있다면 어릴 때부터 치과에 착실히 다녔을 텐데 말이죠.”
의사는 쓴웃음을 짓고 자신도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남자는 의사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키고 치과 문을 나섰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
“그래야죠.”
“아, 그리고 앞니는 그냥 브릿지니까 몇 번 더 오셔야 합니다.”
“그 진통제만 따박따박 주신다면요.”
인천 중부서 경위 이진영은 씩 웃으며 진료실을 나섰다.
치과는 인천 시청 뒤쪽 골목의 구시가지 상가에 있었고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치과 치료를 기다리기 위해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환자들은 얼핏 봐도 30명은 넘었다.
“이빨 아파 뒈지겠는데 뭐 이리 오래 걸려! 저 남자는 뭔데 먼저 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뚱뚱한 아줌마 하나가 번호표와 의료보험카드를 들고 쾅쾅 치과의 카운터를 두들겼다.
카운터를 지키는 건 오픈프레임 로봇이었고 로봇은 카메라 헤드를 갸웃거릴 뿐 그 어떤 감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환자분, 저 환자분은 가종보험 환자분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나종보험이라고! 남편이 아선 인더스트리 영업부장이야! 이 봐봐!”
아줌마는 오래된 보험증서를 로봇 앞에 흔들었다.
– 죄송합니다. 환자분의 기업보험은 퇴직사유로 만료되었고, 국민건강보험은 현재 라종 보통보험으로 전환되셨습니다. 저희 병원과 제휴된 오클랜드 인슈얼런스나 다른 민영보험이 없으시다면…….
“무슨 소리야 이 깡통 녀석! 우리 남편이 누군지 알아! 너 같은 깡통 새끼는 곧바로 정비소에 처넣어줄 테다!”
– 서류 조회는 확실합니다. 더 소란을 피우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아줌마는 씩씩대면서 로봇을 바라보다가 이젠 통사정을 했다.
“아니, 진짜 아파 죽겠다니까? 어차피 금방이잖아? 의사랑 간호사가 달려들어서 갈고 쑤시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로봇이 다 하는 건데 10분도 안 걸리겠다.”
– 죄송합니다. 저희 병원은 원내 접수규칙에 따라 접수번호가 부여되며 진료 시간과 순서는 따로 예약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었다면 더 강하게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로봇에게 결국 아줌마도 백기를 들었다. 자리로 터덜터덜 돌아온 아줌마는 괜히 먼저 진료를 받은 이진영을 쏘아봤다.
이진영도 괜히 라이터를 찰칵거리며 소동을 지켜보다가 괜히 멋쩍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이 치과병원은 기본소득 수급자에게 기본으로 주어지는 라종보험까지 받아주는 몇 안 되는 병원이었다.
라종보험을 안 받아주는 다른 치과에 가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지도 모르는지라 결국 라종보험 소지자들은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진영은 벤치에 줄줄이 앉아있는 환자를 보며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경찰이라 국가지정보험인 가종보험 가입자였고, 경찰공제회에서 따로 민영보험까지 들어서 어떤 병원에 가건 무사통과였다.
– 접수번호 0083 환자분 들어가세요.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한 사람이 ‘예에쓰’를 외치다가 부은 볼을 감싸 쥐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진영은 담배를 입에 물고 상가건물을 빠져나왔다.
“진통제는 마음에 들었는데 다음에는 그냥 경찰병원 가는 게 낫겠군.”
몇몇 경찰들은 가종보험증을 들고 마치 암행어사가 마패를 들이미는 것처럼 일반병원에서 접수번호를 무시하고 진료받는 걸 즐겼다. 경찰이라는 직업이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였다.
가종보험은 마패 취급을 받을 만했다.
병원 측에서도 입금이 빠르고 보장범위도 국가에서 전액을 보증하는 가종보험을 민영보험보다 우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공무원도 다 가종보험에 해당하지는 않았고 가종보험의 혜택을 받는 직종은 드물었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가종보험에 해당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 그거 안 물어봤네. 담배 피워도 되나?”
이진영은 담뱃불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만뒀다. 딱히 이빨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담배를 입에 문 걸 보고 시청 휴머노이드 로봇이 냉큼 달려와 경고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 이곳은 금연구역입니다. 흡연은 건강에 해로운…….
이진영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시늉을 하면서 담배를 담뱃갑에 되돌렸다.
“담배 하나 맘대로 못 피우다니. 이래서 월미도가 더 살기 좋다니까?”
경고를 한 로봇은 쓰레기를 주우며 화단에 꽃을 심는다. 예전 같으면 노인들에게 공공근로를 줬어야 할 일자리도 이제는 다 로봇이 관리한다.
아스팔트 보수, 화단관리, 표지판 세척 등등.
곳곳에 각양각색의 로봇이 투입되어 기묘하리만치 깨끗하게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눈 역시 로봇들이 벌써 다 치워 놓았다. 지금도 시청의 제설 전임 로봇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강풍기와 페이로더 모듈로 눈을 옆으로 밀어붙였다.
사람들은 겨우 이 하나 치료받으려고 한겨울에 상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로봇들은 마치 자신들의 세상처럼 거리를 활보한다.
이진영은 로봇들을 보며 괜히 입맛을 다시다가 시 외곽 노선이 다니는 광역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의사한테는 별말 안 했지만 아무래도 새 이가 들어왔으니 이물감이 느껴지긴 했다. 기초 임플란트를 박고 덧씌우기만 한 앞니도 여간 낯선 게 아니었다.
“차라리 턱이나 이빨도 사이보그로 만들면 좋으련만.”
로봇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절단당한 팔다리 정도는 얼마든지 로봇 팔다리로 교체 가능했다. 간위예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들은 국가의 도움으로 의체 시술을 받았다.
어차피 로봇은 지금도 길거리에 썩어날 만큼 많이 생산되었고 그깟 팔다리쯤 교체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보험의 보장범위가 문제였다.
로봇 기술이 발달하며 재래식 의족이나 의수 따윈 사라지고 첨단 의수로 전부 대체되리라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국가보험과 영리보험의 보장범위에 따라 의수를 다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수술비가 청구될 수 있었다.
전쟁 전후로 각종 부상자가 늘자 의료보험이 붕괴 직전이었고 국회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영리보험법을 날치기로 입법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