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82
제82화
한때는 테크노 진보 계열에서 사이보그가 인류의 미래라며 멀쩡한 팔다리를 잘라내고 기계 팔다리를 붙이는 미친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수술을 받으려면 집 몇 채를 팔아도 부족하다.
또한 기계 몸이라고 말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로봇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신경이 괴사하거나 환지통 때문에 정신증을 유발하는 듯 부작용이 아직도 상당했다.
처음부터 OS에 인공지능을 올릴 걸 상정한 로봇과 인간의 뇌와 신경을 연결하는 의체 기술은 그 방향성이 달랐다.
기계 턱을 붙인다고 해도 말랑말랑한 두부를 씹는 감각을 뇌에 전달할 수는 없다. 그저 뭔가 부드러운 것이 으스러지는 느낌이 남아 있는 신경조직으로 전달될 뿐이다.
이진영은 오른손에 이식된 로봇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곧 설날이고 오늘도 해가 떴지만 날씨가 여간 추운 게 아니다. 이진영은 여전히 스카잔 잠바에 목도리만 둘렀을 뿐 사시사철 그 차림 그대로라 더더욱 추위를 탔다.
그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매대 앞에 멈춰 섰다.
“에이 뭐야. 사람인 줄 알았더니 로봇이잖아.”
우동 매대에서는 세븐일레븐 조끼를 입은 로봇이 우동을 털어서 그릇에 담아주고 있었다. 마침 점심때였고 날씨도 추웠던 터라 그는 우동 한 그릇을 시키고 가판대에서 신문을 잡았다.
– 츠키미 우동 한 그릇과 신문 한 부 총 4천 5백 원입니다.
이진영은 여전히 손가락 의수가 낯설게 느껴졌다. 신문을 잡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는 감촉이 마치 장난감 집게 팔로 종이를 잡았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가끔 악몽 같은 걸 꾸면 침대나 의자의 나무 프레임에 손가락 자국이 길게 남기도 했다.
그가 손바닥 위의 지폐와 동전을 보고 있노라니 로봇이 우동 면의 물기를 털어내며 다시 채근했다.
–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결제는 크레딧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 원화로 할게.”
그는 만 원짜리 한 장과 이순신과 학이 새겨진 동전 몇 개로 잔돈을 맞춰 계산하고 우동이 나오기 전까지 신문을 훑었다.
신문에는 연일 여당인 민족민생당과 제1야당인 안보문명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싸움박질한다는 기사들이었다.
그는 신문을 보면서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 양당의 싸움은 이진영과 무관하지 않았다.
여당과 야당은 작년 여름에 있었던 ‘정상수 스캔들’혹은 법원 인공지능 스캔들로 아직까지도 치고받고 있었다.
여당인 민족민생당은 스캔들에 자기 당의 3선 의원 정상수가 얽혔는데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로봇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갔다. 민민당은 로봇과 로봇 경제를 믿을 수 없다며 시민권자의 일자리 확대를 슬로건으로 걸었고 총선 판도가 흔들렸다.
반면 야당인 안보문명당은 여당의원 ‘정상수’가 연루된 스캔들을 사과하라며 아직까지도 국회 장외투쟁을 벌였지만 프레임을 선점한 여당에게 밀리는 모양새였다.
로봇이 오류를 일으켰다.
이 사실은 로봇 업계와 인공지능 제조업체는 물론 정치판까지 뒤흔들었다.
일단 로봇에 관한 여론부터가 굉장히 안 좋아졌다.
한때 로봇 우호론자가 로봇폐기론을 말했고, 극단주의적 로봇 반대론자들인 인간중심당으로 대거 입당하여 세를 불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진영이 연관된 사건번호 0371 스캔들은 양당의 충돌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의 변수로 다가왔다.
정상수는 민민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 장동천 전 의원의 후견인 격인 존재였다. 그가 실각하면서 거의 결정되었던 민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지뢰밭이 되었다.
안심할 수 없는 건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제1야당인 테크노 진보계열의 안보문명당도 로봇의 오류가 대대적으로 까발려지면서 된서리를 맞아 대통령 후보 경선이 뒤엎어졌다.
야당 통합후보로 다 결정되었다 싶었던 서가영도 3퍼센트 오차범위 안에서 같은 당 의원에게 추격을 당했고, 여당이건 야당이건 혼돈 속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진영은 대선이 어쨌다 국회가 어쨌다 하는 기사를 건성건성 읽다가 스포츠면으로 지면을 휙휙 넘겨 어제 야구 경기 결과를 훑었다.
“망할. 이 팀은 세상이 멸망해도 안 될 거야. 아니 장타를 날리는 애를 뽑아야지? 뭔 선발투수를 데려와? 투수는 많잖아?”
옆에서 우동을 먹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고 그 사람도 대충 어떤 팀을 응원하는지 알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진영은 남자와 눈인사를 하면서 그의 행색을 슬쩍 훑었다.
딱 봐도 공무원이나 사무직은 아니다.
점프슈트에 공사장 안전모가 마치 수통에 하이바를 거는 것처럼 허리에 걸려 있고 목에 건 수건에도 검은 기름때가 묻어있다. 행색을 보면 아마도 링로드 공사관계자거나 신간척지에서 일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이진영이 눈인사를 한 게 말을 걸어도 되는 허락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동을 후룩거리며 말을 걸었다.
“트윈스 FA 이상하게 한 모양이네요?”
“예 뭐. 이 자식들은 타선이 약한데도 뭔 투수왕국을 만들려는 건지. 나 참.”
“하하, 그래도 트윈스는 마무리 투수가 리그 최강이잖아요? 제가 응원하는 팀하고 정 반대죠. 그래서 꾸역꾸역 플레이오프까진 올라가잖아요?”
“예에. 뭐. 그렇죠.”
이진영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건성건성 받아넘겼다. 더 받아주다간 소중한 간식시간을 생판 모르는 남과 이야기를 하며 보내야 할 판이었다.
대화를 이어가기 어중간하다 싶을 때 주문한 우동 한 그릇이 매대 위에 올려졌다. 그는 괜히 바쁘다는 듯 반찬 그릇에서 단무지와 김치를 덜고, 고춧가루를 우동에 뿌렸다.
뜨끈한 국물이 넘어가자 독한 추위가 잠시 누그러드는 것 같다. 이진영의 뒤로 다시 눈이 하늘하늘 내리며 우동의 김이 안개처럼 확 피어올랐다. 이진영은 우동을 정말 맛나게 먹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만 방금 치료한 어금니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우동을 거의 씹지도 않고 넘기고 김치와 단무지를 씹었다.
“저 혹시……. 가종 의료보험 가입자신가요?”
남자는 또다시 이진영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이진영의 항공잠바 주머니에 대충 끼워진 처방전을 가리켰다. 가종 의료보험은 처방전이나 의료영수증 색깔이 다를 때가 많았고 방금 전 치과도 그런 모양이었다.
“아……. 뭐. 예.”
이진영은 변명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국물을 들이키며 얼버무렸다. 남자는 그런 이진영을 보고 뭔가를 결심했는지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초면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종보험 가입자시면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
이진영은 후우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 그냥 국물을 들이켰다.
“제 딸이 의족 신경 괴사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제 의료보험이 라종이라……. 아, 물론 치료비는 제가 낼 겁니다. 저는 우주유영 자격증도 있는 유인 로봇 조종사라 벌이는 쏠쏠합니다.”
남자는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도, 돈은 있어요. 하지만 보험 때문에 받아주는 병원도 별로 없고 그…… 대기시간이 길어서 아마 라종 순번까지 기다리다가는 애가…….”
남자는 생판 초면인 이진영을 붙잡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본 것마냥 더듬더듬 신세 한탄을 했다.
“그, 그냥 수술 순번만 앞 순위로 당겨주셨으면 합니다. 서류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명의만 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남자는 일단 운을 띄우자마자 속사포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진영은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동 그릇을 싱크대 반납기 위에 탕하고 올려놓았다.
“전 못 들은 걸로 하죠.”
“예? 아, 아. 물론 그냥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도 양심이 있죠. 명의 빌려주는 대신 제가 응당 보상을 해드려야지요. 많이는 드리지 못하겠지만…….”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남자는 이진영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얼굴에 흉터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남자의 팔목에 있는 군부대 문신과 ‘엑소슈트’ 부대 조종사들이 흔히 다치는 이마나 팔 따위의 상처를 알아본 이진영은 이 사람 역시 간위예 전쟁의 참전용사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인천시청 근처에서 정장 안 입었는데 가종보험 있는 사람은 뻔하죠.”
“예?”
이진영은 담배를 물면서 길 건너편에 있는 육군 무장 경계병을 턱으로 가리키며 스카잔 항공잠바 안쪽을 슬쩍 보여줬다.
“군바리거나. 짭새거나.”
남자는 이진영의 경찰 뱃지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하필 하고많은 사람들 중 재수 없게 경찰인 이진영에게 보험 명의대여 운운했으니.
이진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급하면 그럴 수 있죠. 가족이 아프다는데.”
이진영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또 이내 시청 청소 로봇이 다가오면서 금연구역이라고 한소리를 했다.
“제기랄 이 근처에서는 담배 한 대 못 피운다니까? 그보다 그쪽은 어디 있었죠? 엑소슈트 부대니 기병여단? 그럼 북경?”
“아? 아. 예. 산동 선착부대요.”
“산동 선착부대? 그럼 육군 제 1기병(騎兵) 소속이었겠네요. 말대가리 부대.”
“예, 뭐. 말대가리…….”
“그럼 뺑이 좀 치셨겄네. 북경 관광하셨겠네요? 여권 없이요.”
이진영은 예전 이세화에게 들은 농담을 말했다.
선착부대는 간위예 전쟁의 발단이 된 광동분쟁 초기 평화유지를 위해 UN에서 파견된 엘리트 부대였고 간위예 전쟁의 시작과 끝, 영광과 굴욕을 다 맛본 부대였다.
“그럼 이건 깐웨 전쟁 전우끼리 상조금이라 칩시다. 보험 관련은 못 도와주지만.”
이진영은 지갑에서 달러와 원화가 섞인 지폐를 꺼내고 명함 두 장을 올려놨다.
“이건 전우회 사무실 명함이고요. 전우회 쪽도 상이군경 때문에 빠듯하긴 합니다만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건 내 명함.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십쇼.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요.”
남자는 얼마간의 돈과 명함을 보고 미안함과 감동이 섞인 표정으로 이진영을 바라봤다.
간위예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끼리는 마치 가족과 같은 유대감이 있었고, 이진영도 이 기병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러나 보험 명의를 함부로 대여했다간 공무원에서 짤릴 수도 있다.
이진영은 괜히 미안했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아마 다 잘 될 겁니다. 시발, 그 지옥에서도 살아서 돌아왔는데.”
“하하…….”
남자는 두 손으로 명함과 지폐를 들고 크읍 하고 눈물을 참았다. 이진영은 남자에게 목례를 하고는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입맛이 쓰네.”
남자는 아마도 링로드 공사 현장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엑소슈트 부대 제대자들은 중장비 유인 로봇 조종으로 위험한 공사 현장에 불려가기도 했다.
게다가 저 남자는 우주유영 자격증까지 있다면 꽤 고급 인력인데도 임시직이고 보험 등급에 허덕인다는 게 블랙 유머였다.
위험한 곳에 인간이 들어간다?
아마 오픈프레임 로봇이 보급되던 시기에는 상상도 못 한 장면일 것이다. 일체 위험수당이 없는 비정규직 로봇 조종사들은 정비가 필요한 로봇보다 때론 비용이 싸게 먹혔다.
이진영은 버스 정거장 계단에서 이름 모를 엑소슈트 조종사를 바라봤지만 남자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졌다. 잘 될 거라고 말했지만 보험 등급이 낮아서 남자가 딸을 제때 수술시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