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83
제83화
전쟁 후에도 여전히 국가보훈처로 남은 보훈처는 퇴역병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의족, 의수 정비비용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아직까지 참전자들이 국회나 용산에서 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들이 혁혁한 위세를 떨치는 때는 다름 아닌 잘못 지급된 연금이나 보상금을 소송을 통해 받아낼 때였다.
“데려갈 때는 국가의 아들. 다치고 나서는 누구세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진영도 경찰에 특채되지 않았다면 오른손 손가락 의수를 좋은 걸로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려고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 야 이진영이. 시청에 도난 로봇장부 조사하러 보냈더니 아주 하루를 땡칠 셈이냐?
“아 지금 밥 먹고 돌아가고 있슴다.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요? 팀장님은 꼭 밥 먹을 때 전화하드라.”
– 새끼…… 말이나 못하면? 안 그래도 감사 떠서 체크 빡세니까 통신기 제대로 켜놓고. 내사과에서 연락 갈지도 몰라!
“걔네 또 온 거예요? 나아 참. 아니 서부서 애들이 세관 관련해서 껀수가 더 많을 텐데 우리만 턴답니까?”
– 몰라서 묻냐아? 니가 친 사고가 한두 개야? 본청 정보과장이랑 공안부장이 차례로 날아갔는데.
“아니 빈자리 많이 생겼으니 본청 아재들은 날 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뜩이나 인사적체라고 만날 난리드만.”
– 야 정보과장이랑 공안부장 줄 잡고 있던 놈들이 너를 좋게 보겠냐고?
“아니 햇님달님 호랭이도 아니고 썩은 동아줄을 잡은 것까지 내 탓이랍니까?
– 아무튼 너랑 이브이, 걔 찍어내려고 아주 혈안이야. 아무튼 빨리 들어와서 각 잡고 대기타.
“뭔 군대 이등병도 그렇게는 안 하겄네.”
– 시끄러!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씩 미소를 지었다.
팀장이 굳이 보낼 필요 없는 시청 종이 문서복사 업무에 그를 보낸 것도 감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내사과에서 난리를 친 모양이었다.
“이브이 녀석 내사팀 아저씨들한테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는데.”
그는 고지식한 자신의 파트너 로봇을 떠올리며 말했다.
EV-1은 여전히 중부서에 배치되어 있었고 신간척지를 불태우고 열차를 멈춰 세운 난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사건에서 혁혁한 활약을 했다.
무장강도의 RPG-7 로켓을 정면으로 잡아내면서 강도를 포획하거나 때론 예리한 관찰력으로 이진영이 보지 못하는 살인사건의 허점을 짚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EV-1은 워낙 고지식한 녀석에다 바른말을 일삼는 놈이라 경찰 감찰반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 왜 이런 고성능 기체가 육군이 아닌 경찰에 파견된 건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많았다.
이진영 역시 짬짬이 EV-1의 배치과정을 조사해봤지만, 경찰이건 로봇 제조사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무튼 중부서로서는 EV-1의 활약 덕분에 여러 가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고 EV-1은 중부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구성원이 되었다.
이진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저 멀리서 인천시 캐릭터가 박힌 더블데커 2층 버스가 다가왔다. 전기로 움직이는 버스는 전임 인공지능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버스 정류장에 정지시켰다.
이진영은 버스비를 현금으로 치르고 버스 위에 올랐다.
– 아녕하세요우~ 조오은 점심입니다?
이진영은 예전에는 운전석이 있었던 자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운전석 자리에는 형광색 장난감 핸들을 들고 물범 캐릭터 복장을 한 휴머노이드 로봇 하나가 모자를 벗으며 승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운전 로봇? 대한민국에 운전 로봇이 있을 리 없다.
모든 공공버스와 기차는 전임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게 법이었고, 운전 전임 인공지능은 손발이 달린 범용 휴머노이드와 달리 운선석이 필요 없었다. 덕분에 지하철이고 버스고 열차건 운전대가 달린 운전석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진영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자 로봇은 다시 한번 활기차게 인사했다.
-좋은 점심입니다. 맛있는 점심 하셨나요?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로봇 뒤에 있는 행사 안내 포스터를 바라봤다. 이 로봇은 인천시 관광진흥용 마스코트였고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기 위해 배치되었다.
“시부럴, 올려달라는 특근비는 안 올려주더니.”
이진영은 동전으로 요금을 치르고 오른쪽 뒷바퀴 위 좌석에 앉았다. 심드렁한 이진영과 달리 관광객이나 일반승객들은 활기찬 로봇을 반겼다.
로봇은 간단한 마술을 하거나 기념품을 나눠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진영 뒤에 탄 10살 정도의 꼬마는 풍선으로 즉석에서 만든 풍선 인형을 받고 좋아했다. 버스 안에는 관광객도 더러 있었고 그들은 익살맞게 로봇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로봇의 익살 덕분에 버스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지만, 창밖의 풍경은 시 외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살풍경하게 변해갔다.
버스는 잘 정리된 인천시가지를 가로질러 점점 높다란 분리장벽 쪽으로 다가갔다. 버스의 전임 인공지능은 위험구역으로 간다는 알람을 울리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사진 찍으라는 신호로 여겼는지 사진을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월미도 신간척지는 리우데자네이루, 로스앤젤레스와 함께 새로 생성된 세계 3대 슬럼 중 하나였고 독특한 풍경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도 많았다.
관광객들에게 월미도는 중국 광동(廣東)과 강서(江西) 그리고 대한민국의 문화가 섞인 기묘한 별천지였다.
중국어 간판과 푸른 방수포가 씌워진 노점 거리.
자극적인 맛이 가득한 이국적인 음식.
부채나 인형 따위의 수상쩍은 기념품들.
사설도박장이나 윤락업소 등 일탈을 즐길 수 있는 위험하지만 짜릿한 곳들까지.
이윽고 분리장벽 검문소에서 버스가 잠시 멈춰 섰다가 버스 안에 폭탄이 없나 광역스캔을 받고 다시 출발했다.
벽 너머의 세계는 잘 정돈된 시가지와는 달랐다.
광동어로 롱횅쌍나(龍香桑拿)라고 써진 사우나 간판이 이층버스 위를 스치고 지나가고 그다음에는 아주 오래된 할매 순대국밥 간판이 버스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관광객들은 롱꺼 내부 전쟁 때 총을 맞은 KFC 커넬 샌더스 인형을 찍거나 저 멀리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난민들을 찍었다.
난민들은 차찬텡이라 불리는 홍콩식 식당에서 요기를 하거나, 한국식 토스트를 으적거린다. 한낮인데도 일거리가 없는 이들은 마치 동물원 사파리에 갇혀 있는 사자마당 무기력한 표정으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가끔 관광객들이 미국 쿼터 동전 몇 개를 던져주면 눈에 불을 켜고 그 동전을 차지하기 위해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버스 안에 있는 관광객들 역시 이들에게 돈을 던져주면서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버스가 멈춰 설 때마다 아이들이 달려와서 버스 창가에 손을 내미는 모습이 사파리 동물원과도 같았다.
이진영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월미도 신간척지를 노려봤다. 그에게는 월미도 신간척지의 풍경이 자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신기하지도 않았다.
일주일 전에도 중부서 경관 하나가 신간척지에서 총격전에 휘말려 죽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오며 가며 이진영도 안면이 있는 제복경찰이었다.
관광객들은 이곳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와 난민계 갱들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곳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누군가에게는 짜릿한 관광코스였지만 이진영에게 이 모든 것은 일상이었다.
이진영에게는 관광객들이 월미도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이 마치 안방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 것 같아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어서 빨리 월미도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방벽을 나왔으니 두 정거장만 더 가면 이 어색한 분위기의 버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벽을 빠져나온 버스는 심정점이라는 중화요리 가게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한 명 내리고 이내 여행 캐리어와 악기 상자들을 든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버스위에 올라탔다.
아마 겁도 없이 버스에서 내려서 굴다리 근처의 만물시장에 갔다 온 모양이다.
관광객들은 링로드 공사부품을 재활용해 만든 장신구 따위를 걸치고 역시나 굴다리에서만 파는 마약 버섯 성분이 들어간 드링크를 마신다. 둘 다 신간척지 깊숙한 곳에서만 파는 굴다리의 특산품이었다.
“신났군.”
MT를 온 것처럼 들뜬 분위기의 젊은이들을 보며 이진영은 한 정거장 전에서 벨을 누르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버스 밑에서 폭발이 터졌다.
“뭐 이런 개…….”
이진영의 욕설이 채 튀어나오기도 전에 2층 버스 앞부분이 들리면서 버스는 부침개를 뒤집는 것처럼 뒤집혔다. 아래위가 바뀌면서 승객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레고를 뒤집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고속버스라면 모르지만 시내버스 따위에 안전벨트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각 자동차 메이커들은 전 좌석에 에어백이나 군용 라미네이트 튜브를 장비시키기도 하지만 이곳은 전국 재정자립도 최하위에 빛나는 인천시였다.
사람들이 버스 천장에 부딪히면서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이진영은 반사적으로 버스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가 뻗은 손은 오른손이었다. 오른손의 부분의수가 또 하필 지금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퍽!
그는 등을 호되게 버스 수직 손잡이에 찍히고 이어서 버스 천장에 패대기쳐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천지가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마냥 주변의 모든 것들이 버스 천장에 들이박힌다.
관광객이 들고 있던 팜플렛.
수상쩍은 고기로 만든 꼬치구이.
일본풍인지 중국풍인지 모를 기념품 인형.
그리고 아까 아이가 들고 있던 풍선.
풍선. 아이.
풍선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이진영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잡혔다.
아무리 이진영이 힘이 세다고 해도 뒤집힌 버스에서 여자아이를 잡는 건 무리였다. 왼손 관절이 비명을 지르듯 뻐걱하는 소리가 나면서 이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
이진영은 그 짧은 순간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입을 앙다물고 비명을 참고 있었다.
쾅!
그러나 버스는 이내 다시 한번 뒤집혔고 이진영은 아이를 감싸 안으며 충격에 대비했다.
폭탄이 한 번 더 터진 것 같았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이진영의 뺨을 긁고, 형편없이 찌그러진 손잡이가 창처럼 그의 스카잔 점퍼를 찔러서 북하고 찢어놓는다.
“크윽!”
뒤집힌 버스는 가드레일 위에 떨어지더니 비스듬한 가드레일을 타고 옆으로 다시 한번 쾅하고 굴렀다. 그 안에 탄 사람들은 놀이공원의 다람쥐통 놀이기구를 타듯 데구르르르 구른다.
이진영은 맨 뒷좌석 사이의 공간을 다리로 버티고 서서 버스 안에서 패대기쳐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았다.
가드레일에 받히고도 두 번이나 더 구른 버스는 차찬텡의 입구와 세탁소를 박살 내고서야 멈춰 섰다. 불법 무허가 건물의 간판이 버스 위로 와르르 쏟아지고 흙먼지까지 정신없이 피어오르면서 버스가 멈춰선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 곧 인춴시 며어엉물. 우월미도…….
인형을 나눠주던 로봇이 이진영의 앞에 처박혀서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에게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