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85
제85화
상처 부위를 절개하는 것도 엄밀하게 보면 로봇이 인간을 해치는 것이고, 상처 부위를 절개하지 않아 죽는 걸 방치하는 것도 로봇 3원칙 위반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진단은 로봇이 내리고 인간인 외과의가 직접 절개하는 방법이이다. 하지만 이건 또 이솝우화의 당나귀를 팔러 가는 부자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외과의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술 로봇을 도입한 건데 외과의가 무지막지한 업무부담을 받으며 로봇의 지시에 따라 절개를 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다. 그야말로 당나귀를 들고 낑낑대는 부자와 똑같았다.
어떤 의미로 경찰 로봇보다 더 높은 이익형량 사고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의료 로봇이었고 피곤에 쩌든 외과의들은 금방 해결책을 찾았다.
– 처치할까요?
“어, 그래. 수고해.”
당직 의사는 로봇이 브리핑해주는 것만 보고 오케이 버튼을 눌렀다. 인간의 ‘명령’이 떨어지면 로봇은 칼이나 자동차 같은 인간의 도구로서 절개 명령을 수행한다.
간호 로봇 셋이 달려들어 갈비뼈가 으스러진 환자의 옆구리를 절개하고 능숙한 솜씨로 뼈를 뽑고 폐를 꿰맨다.
마취, 절개, 약물 투여, 봉합.
이 모든 것이 세 대의 간호 로봇이 달려들자 앗하는 순간에 끝났다. 도합 18개의 의료용 매니퓰레이터는 인간 의사 3명이 하지 못하는 일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해냈다.
의사는 수술 처리 과정을 힐끔 쳐다보고 모니터에 뜬 결과를 보고 다시 한번 오케이 버튼을 눌렀다.
몇몇 사람들은 응급실 의사를 의사가 아니라 공장노동자나 다를 바 없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마치 수많은 공작기계의 버튼을 누르고 과정과 결과만 이상 없으면 오케이인 공장노동자.
그 독설가들의 말도 마냥 틀린 건 아니지만 이 의사들은 이전 시대의 의사처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버튼을 눌러야 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이진영 같은 사람이 보기엔 그냥 컵라면 온수 버튼을 누르는 편의점 알바 로봇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응급환자들을 차례로 처리하고 방금 전 그 의사가 한숨을 내쉬며 이진영에게 다가왔다.
“에…….”
– 버스 폭발사고 환자입니다.
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이진영을 바라보자 간호 로봇이 옆의 요로결석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며 대답했다.
“아, 괜찮으세요?”
이진영은 얼빠진 얼굴로 의사를 쳐다봤다.
“괜찮냐고요?”
“아니, 특진 요청하시길래 뭐 급박한 건 줄 알았는데 별 이상은 없네요.”
의사는 이진영의 외견과 로봇과 인공지능이 정리해준 이진영의 차트를 바라봤다.
“당장 걸을 수는 있습니까?”
“예 뭐. 한 5주 정도 지나면 자유롭게 걸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주요?”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이진영을 바라봤다. 수염이 파르라니 자란 것이 어지간히 피로에 시달린 게 아닌 모양이다.
“환자분 로봇에게 들으셨죠? 파편이 동맥에 박힐 뻔했어요. 근육도 꽤 손상을 입었고요. 약물치료하고 얌전히 쉬시다 보면 괜찮을 거예요. 아, 가종보험에 경찰이셨구나? 그럼 꿀 좀 빠시는 거 아니에요?”
이진영은 ‘꿀 빠는 소리 허네?’하는 표정으로 의사를 빤히 바라봤다. 의사는 이진영의 뚱한 표정을 보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아, 그건 안 돼요. 물리치료까지 해서 7주까지는 늘려드릴 수는 있는데, 뭐 한 달 더 늘려달라거나 뭐 공상판정 해달라거나 그런 양반들 많거든요. 그리고 또 어차피 경찰병원 가실 거면 그쪽 의사들이 좀 판정이 짜니까 내가 높여봤자 아무 소용없고요. 괜히 나만 평판 나빠지지.”
“아뇨,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뇨?”
“빨리 치료했으면 해요. 하도 병원 신세를 져서 경찰공제회에서 찍히기도 했고 보험사가 한 번만 더 입원하면 해지한다고 지랄이라서 당장 휴직하면 보험 등급이 달랑달랑해요. 예수의 기적이라도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의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차트를 바라봤다.
“그냥 파편 박힌 거고 처리는 말끔했으니 의족은 어떠신가요?”
이진영은 자신의 부분 손가락 의수를 바라봤다. 그는 폭발로 손을 잃었고 의수가 없으면 넥타이 하나 매지 못한다.
“아, 다리를 자르라는 게 아니라. 요새 잘 나와요. 엑소슈트형으로.”
의사는 마치 의료기기 영업사원처럼 차트 모니터에 각종 의족 보조기기를 띄워주었다.
전쟁기술의 발전은 엑소슈트형 의족의 발전에 아주 큰 디딤돌이 되었다.
예전에는 하반신 마비를 당하면 그냥 전동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지만, 요새는 다양한 메이커에서 다양한 모델이 나와서 선택지가 많았다.
“허벅지 근육 부상이시니, 이 모델 추천해요. 운동선수 재활용으로 아주 호평을 받았거든요. 대여료도 싸고.”
“호리코시…….”
이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호리코시는 특단사건 때문에 거의 망할 뻔했지만, 여전히 의료용 기기에서는 알아주는 메이커였다. 그는 다양하게 생긴 의족 엑소슈트 모듈을 바라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호리코시 잘 나와요. 모델도 이만하면 이쁘죠.”
“아뇨, 아선이나 에이테크 건 없나요? 군용 모델도 좋고요. 장갑판은 없어도 되니까.”
“군용 모델은 보험이……. 그 아마 안 될걸요? 아시잖아요? 육군이 까탈스럽게 구는 거.”
“나 참. 알겠습니다. 일단 호리코시 써보고 나중에 바꾸도록 하지요. 상조회 쪽에 알아볼게요.”
이진영은 깐깐한 보험사 담당 직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작년 여름부터 EV-1과 함께 사선을 여러 번 넘나들었고 사기업 보험 직원은 진작부터 ‘당신과는 거래 끊을 거야!’라며 난리를 쳤다.
“자 더 질문 없으면 저는…….”
“선생님, 로봇에게 들으니 터진 게 팬지커터라는 데 사상자가 많았나요? 테러 사건 같은데? 어떻게 되었나요?”
의사는 다음 환자의 차트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냥 환자 차트만 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테런지 아닌지는 경관님이 더 잘 알지 않나요? 회사에 전화에 보세요.”
맞는 말이라 이진영은 머뭇거렸다.
“혹시 이 병원에 사상자가 실려 왔나요? 아이가 한 명 같이 타고 있었거든요.”
“아이요?”
그 대목에서 의사는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부모를 힐끔 쳐다봤다. 응급실에 오는 환자의 대부분은 아이들이었다.
“자세한 건 원무과에 물어보세요. 저는 이만.”
의사는 딱 특진료 10만 원 가량의 시간만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서는 다시 응급환자에게로 다가가 차트를 확인하고 로봇들에게 처치를 지시했다.
그나마 특진료를 내야 인간 의사와 이야기나 나누지, 라종보험 환자들은 간호 로봇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야! 빨리 내 아들부터 보라고! 애 이가 깨져서 난리야!”
– 치아 보험이 있으십니까?
“아니? 비싼 돈 내고 응급실 온 건데 봐봐. 애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잖아?”
– 저희 병원은 제휴 치아 보험이 없으시면 순위가 빠르지 않습니다. 근처 메디컬 치과로 가시길 바랍니다.
엄마는 급기야 로봇의 매니퓰레이터를 잡고 난리를 쳤지만 경비로봇과 경비원에게 제지당했다.
“어! 라종보험이라고 이래도 돼! 이래도 되냐고오오! 애가 피를 흘리는데 봐줘야 할 거 아니야아아!”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로봇들은 응급실 우선순위에 따라 처치를 계속하고 의사들은 로봇들 사이를 오가면서 처치과정을 지켜봤다.
이곳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영리병원 중에는 응급실에서도 기본소득자들인 라종보험을 받아주지 않는 곳도 많았다. 이런 곳마저 없어져 버리면 그들은 아픈 몸을 앰뷸런스에 태우고 라종보험을 받아주는 곳으로 유랑을 떠나야 할 지경이었으니.
이진영이 의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국가 가종보험에 영리보험 가입자였기 때문이다. 라종보험이었다면 특진료가 30, 40만 원은 넘었을지도 모른다.
응급환자들이 뜸해졌을 때쯤 간호 로봇이 이진영의 의족 엑소슈트 모듈을 가지고 왔다.
– 환자분 불편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간호 로봇은 여섯 개의 매니퓰레이터 암 중 두 개로 이진영을 부축하고, 나머지 팔로는 엑소슈트 모듈의 죔쇠를 풀었다. 이진영은 압축 붕대가 감긴 다리를 엑소슈트의 다리에 밀어 넣었다.
이 의료기 엑소슈트는 일전에 폐차장에서 처절한 혈투를 벌인 ‘팔라딘’과 비교해 보면 엑소슈트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우선 말발굽 모양의 메인지지대와 골반을 스트랩으로 고정시켰다.
메인지지대에서는 척추 쪽으로 척추와 비슷한 모양의 지지대가 뻗어 나와 마치 낙하산 배낭처럼 어깨에 스트랩으로 고정되었다.
이 의족은 허리부상 환자 재활에도 도움이 되는 의료기기였고 허리를 뒤로 당기면 마치 의자 등받이처럼 척추지지대가 받쳐줬다.
말발굽 같은 메인지지대에서 허벅지 바깥쪽으로 넓적하고 두툼한 지지대가 이어지다 무릎 쯤에 동그란 관절 부품 아래로 꺾여 내려갔다. 그렇게 운동화를 신은 발바닥까지 합금 엑소슈트가 감쌌다.
장착이 완료되자 죽마 위에 탄 것과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허리, 척추, 다리의 외골격이 이진영의 체중을 떠받치면서 이진영은 뒤로 엉덩이를 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거의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 한 번 걸어보십시오.
“이 모델은 롤러대시 모듈 같은 건 없나?”
– 롤러대시 옵션을 원하십니까?
로봇이나 의사나 의료기기 영업사원처럼 보였다. 로봇은 냉큼 이 모델에 호환되는 롤러대시 모듈을 보여줬지만 가격이 다 만만치 않았다.
이진영은 별수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서 주변을 걸었다.
호리코시의 의료용 엑소슈트 모듈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초창기 모델처럼 듣기 싫은 ‘위잉’하는 구동음도 들리지 않았고 한쪽 무릎을 들어 올려 까치발로 서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달리는 건 무리겠지?”
– 예, 환자의 부상상태에 따라 첫 2주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도 달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고마워. 이제 퇴원 수속하면 되나?”
– 예. 원무과에서 결제하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당 병원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 로봇의 서비스를 설문하고…….
이진영은 디스플레이에서 하트 다섯 개를 누르고 자신의 물건을 챙겼다.
“응급실에 있으면 더 아픈 것 같단 말이야.”
이진영은 걸레짝이 된 점퍼와 권총집을 들고 응급실을 빠져나와 병원 로비로 향했다.
병원 로비는 얼핏 보면 호텔 로비처럼 보였다. 커다란 샹들리에와 5층 높이의 유리구조물이 로비 한 가운데서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밖이 통째로 보이는 전면 유리창이라 눈이 하늘하늘 내리는 바깥 풍경을 안에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인테리어와 달리 의자가 쭉 늘어선 로비 1층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은 인천에서 가장 큰 병원이기도 했고 라종 환자를 받아주는 국가 지정병원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사람들은 무슨 경주마를 보는 것마냥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 오늘 월요일이었지.”
라종보험 환자들은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응급실에 오지 않았다.
오늘 점심에 갔던 치과에도 주말 내내 치통을 참고 참다가 응급 처리를 피해 온 라종 환자들이 많았다. 지금 이곳 또한 주말 동안 통증을 참다가 접수하러 온 환자들로 넘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