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86
제86화
작게는 칼에 베인 사람부터. 크게는 곧 죽을 것처럼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들까지.
그깟 응급실비가 뭐라고 사람들은 고통을 끙끙 참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응급실에 아이 환자가 많은 것도 바로 비용 때문이다. 부모는 자신의 보험 등급이 뭐건 간에 자신의 아이가 아프면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진영은 뒤늦게 요일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원무과에서 행정 로봇이 일을 착착 처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번호표가 129번 세 자릿수였다.
만약 가사로봇이 있었다면 번호표를 대신 들게 하고 마실이라도 나가겠지만 이진영은 불행히도 혼자였다.
그는 혼자서 로비를 바라보다가 공중전화로 눈을 돌렸다.
이진영은 안내 로봇 쪽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안내 로봇은 스킨이 씌워진 휴머노이드였고 양자동공만 아니면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 병원 유니폼을 예쁘게 입은 모습을 보면 그냥 스무 살 정도의 아가씨로 보였다.
“로봇, 내 순서 되면 알려줄 수 있나?”
– 예, 물론입니다. 환자분께서는 가종보험으로 보다 빠른 수납을 할 수 있는데 처리할까요?
이진영은 아파서 끙끙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전화할 데가 많으니까.”
로봇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비켰고 이진영은 공중전화로 다가가 카드를 넣었다. 정말로 전화할 데가 많긴 했다. 이진영은 수첩에서 전화번호를 보고 잠시 생각하다 ‘오클랜드 인슈얼런스’로 전화를 걸었다.
“하이고오오. 이거 죄송…….”
이진영이 곡소리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속사포 랩처럼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다.
– 아니, 경관님.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작년 여름부터 이게 뭐예요? 가을에는 무슨 열차 탈선사고 현장에 있지를 않나, 이번에는 뭐요? 버스가 전복됐다고요? 연례 행사급도 아니고 계절마다 이게 무슨. 뭐 가는 데마다 사건 사고 나는 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이러다 저희 망하게 생겼어요. 안 그래도 상부에서 경관님 보험 해지하라고 난리에요!
이진영은 수화기에서 귀를 잠시 떼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가 점점 소리가 잦아들자 말했다.
“죄송합니다.”
– 아니 지금 월미도 근처 사는 사람들은 보험 다 해지하라고 난리 났다니까요?
“아니, 이번에는 좀 억울해요. 난 그냥 가만히 버스 타고 가는데 뻥하고 터졌거든요.”
– 뻥이요? 그게 말이에요? 아무튼 다음 달부터 보험료 많이 올라갈 거예요.
“얼마나요?”
-최소 30만 원이요. 지금 부장님이 해지하라는 거 제가 간신히 말린 거예요.
이진영은 한숨을 쉬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보험료가 얼마나 오를지 물어보려 전화했건만 보험담당자의 대답은 칼 같았다. 30만 원이나 인상되면 총 보험료는 120만 원으로 이진영 월급의 3분의 1이 의료보험으로 날아가는 셈이었다.
– 보험료가 부담되시면 해지하시거나 아니면 피부양자 보험을 해지하세요. 전 부인분 직장 있으시다면서요? 아니 그러면 다종이나 나종보험일 텐데 왜 굳이 우리 오클랜드에…….
“딸 때문에요. 초등학교 다니거든요. 요새 애들 그런다잖아요? 라종 인생이라고.”
-아…….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보험담당자가 말문이 막힌 듯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도 집이 가난한지 부자인지 잘 알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나 부모의 월급으로 2백충이니 임대아파트 거지니 급수를 나누고 서로 차별했다면 요새는 보험 등급으로 놀리거나 괴롭혔다.
가, 나, 다, 라. 법에서 정해놓은 보험 등급분류가 낙인이 되는 세상. 아이들은 ‘라종 인생’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평생 기본소득자인 라종으로 살다가 라종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이진영의 딸은 그의 피부양자긴 하지만 동거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료보험인 가종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다. 결국 이진영은 아이를 위해 영리보험인 오클랜드 인슈얼런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 휴……. 라종 인생. 어쩔 수 없군요.
“예, 그런 거죠. 잘 부탁드립니다. 뭐 담배나 술을 줄이죠 뭐.”
– 나 참. 말이나 못 하면. 아무튼 보험료는 제가 방어해볼 테니 제발, 제발 위험한 짓 좀 하지 마세요.
“먹고 살려다 보니 허허. 아무튼 그 의료용 엑소슈트의 롤러대시 모듈 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 아, 예 그것도 알아볼게요. 근데 그건 경찰상조회나 병원 쪽 임대업자랑 이야기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경찰 업무용 롤러대시 모듈은 이쪽에는 없어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그건 제가 알아볼게요.”
보험담당자는 인사치레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진영은 후우하고 한숨을 쉬고는 이번에는 인천 중부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어? 쌍현이냐?”
– 어, 형님! 형님이에요?? 괜찮아요?
“야, 광저우 메모리얼이면 코앞인데 문병도 안 오고 뭐 하는 거냐?”
– 입원하셨어요?
“아니, 통원 치료. 하마터면 파편에 꼬추가 잘릴 뻔했어. 고자가 될 뻔했댄다.”
수화기 너머에서 진심으로 ‘으으’하는 소리가 들렸다.
–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아직 약은 안 탔는데 주사제랑 뭐 타가야 할 것 같아.”
– 그럼 병가 내시는 게 낫지 않아요?
“그래도 누가 내 꼬추를 잘라먹으려고 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누구냐? 버스?”
김상현이 키보드를 타다닥하고 치는 소리가 들렸다.
– 아직은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성명 발표 안 했어?”
– 예, 딱히 성명을 발표한 데도 없고요. 사망자도 없습니다.
“사망자가 없다고?”
이진영은 폭발 당시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관광 홍보 로봇이 박살 나고 이진영도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어 엑소슈트 신세를 질 정도의 폭발이었다.
버스는 여러 번 전복하며 데굴데굴 굴렀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벨트를 안 했으니 최소 몇 명은 목이나 척추가 부러져 죽었을 것이다.
“버스가 뒤집혔는데 사망자가 없다는 게 말이 돼?”
– 그게……. 마침 앰뷸런스랑 의료 로봇이 주변에 있었대요. 그리고 뭐 사람들도 타박상이나 골절이 대다수고 중환자실로 실려 간 사람은 없구요.
이진영은 쓰러지기 전 웨에엥하고 달려오던 앰뷸런스가 떠올랐다. 그는 사망자가 없다는 사실에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는 무사한 거군.”
– 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의료 로봇 이야기 들어보니까 팬지커터라던데 이거 어디서 나온 거야?”
– 뻔할 뻔자죠. 그런 폭약의 출처야.
“웡꺼.”
천도영 유괴사건 이후 웡꺼와 중부서 강력전담부는 휴전 비스무리한 상황이었다.
이진영은 웡꺼에게 수사 정보를 흘리고 약속대로 희망빌라 폭파 범인인 정 대령을 넘겼다. 나름 깔끔한 일 처리에 웡꺼도 만족했다는 뒷소문이 돌았다.
또한 웡꺼는 웡꺼대로 다가오는 춘절을 준비한다고 바빴고 중부서는 중부서대로 연말연시 각종 행사와 서류 행정처리에 한창이었다.
하지만 웡꺼가 짭짤한 사업인 무기 밀수와 인신매매를 그만둘 리 없었다. 지금도 전국 어딘가에서는 아이가 납치당하고 누군가는 권총을 들고 은행강도를 한다.
대한민국이 강력범죄가 치솟은 건 두말할 것 없이 웡꺼의 지분이 반 이상이었다.
– 어, 형님. 설마 또 중화대루로 뛰어들 생각은 아니죠? 그 폭탄 출처 확인하겠다고?
“내가 미쳤냐? 애 목숨이 걸렸다면 몰라도.”
이진영은 중화대루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때는 정말로 류모성의 목숨이 간당간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쳐들어간 것이다. 이진영은 그때 살벌한 웡꺼 패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튼 서로 갈 테니 자료 좀 모아놔 줘. 그리고 뭐 공안 애들은 얘기 없어?”
– 공안이요? 조용한데요?
“웬일이지? 5살 꼬맹이가 방귀를 뀌어도 폭탄 테러랍시고 간섭하는 새끼들이.”
– 그야 사람이 안 죽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이딴 건 월미도에서 뉴스거리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딴 데서 지금 장난 아니거든요?
지금도 병원 TV에는 경찰청의 블랙스와트가 은행강도와 대치 중인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채널을 돌리면 나날이 심해져 가는 러다이트 테러리스트의 폭발사고 따위가 방영 중일 것이다.
어제만 해도 아선 인더스트리의 공장 하나가 러다이트 강경파로 추정되는 놈들에게 박살이 났다.
“하긴, 버스 폭파사고야 뉴스감도 안 되긴 하겠다. 로봇 공장이 박살 나는 와중인데 말이지.”
아선 공장의 폭발사고는 생각보다 심했다. 지금 아선은 1분기에 육군에 납품할 KF-31과 로봇쇼에서 호평을 받은 각종 민수용 모델들이 착착 출하되어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공장 하나가 완파 당하면서 너른 아산 벌판에서 아직도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뉴스 앵커는 이 공장 테러로 인해 아선은 물론 대한민국 역시 1분기 성장률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거라고 말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로봇의 사지를 찢으며 아선 공장 폭발 테러를 칭송하고 있었다.
공안 3사들은 아선 공장 폭발 테러에 혈안이 되어 전력을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고로 사람도 죽지 않은 버스 테러 따위는 그들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아무튼 상현아, 곧 들어갈게.”
– 예? 팀장님이 그냥 퇴근하래요.
“아니, 그래도 좀…….”
– 몸조리나 잘하세요. 버스 테러 수사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니까 못 믿겠다는 거 아냐.”
– 쫌 믿어봐요. 나 참. 끊어요.
이진영과 김상현은 악담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마침 전화를 끊자 안내 로봇이 순서가 되었음을 알렸다. 사실 이진영의 순번은 벌써 지나가 있었지만 그는 가종보험 가입자였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수납을 받았다.
“아니 저 사람은 전화하다 와도 되는 데 나는 왜 기다려야 하는데? 피가 줄줄 나는 거 안 보여?”
– 응급치료를 받으시려면 응급실로…….
“야! 라종보험 들고 응급실 가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 당 병원은 인천시의 지정병원으로서 라종보험 환자들에게도 인천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남자는 참지 못하고 안내 로봇을 발로 걷어찼다. 여자형 안내 로봇의 미니스커트 유니폼에 진흙 발자국이 찍혔다. 사람이라면 기분 나쁘다 못해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지만, 로봇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 로봇에 대한 일체의 공격행위는 경찰에게 통보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남자는 더 약 올랐는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로봇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손바닥이 로봇의 뺨에 닿기 전 이진영의 남자의 팔을 잡았다.
“환자분, 작작 좀 하시죠.”
“너, 넌 뭐야? 뭔데?”
이진영은 한 손으로 경찰 뱃지를 보여줬다.
“저 모델. 피부 찢어지면 얼마나 드는지 알아? 나 같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응급실에 가겠다. 알잖아? 병원 놈들이 얼마나 돈에 빠삭한지.”
“그……. 그…….”
남자는 ‘그’만 연발하다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가 화를 내는 이유도 다 보험 등급과 돈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불만과 불안함이 섞인 눈초리로 로봇과 이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거야 누가 인간이고 누가 로봇인지.”
병원은 의사와 간호 로봇과의 관계도 그렇고 누가 로봇이고 인간인지 헷갈린다. 분명 존중을 받아야 할 인간은 보험 등급에 따라 로비 의자에서 끙끙대며 기다리고 로봇은 마치 이곳의 주인인 것마냥 인간을 안내한다.
병원에 갔다 오면 너도나도 러다이트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가뜩이나 살풍경한 곳에서 사람들은 등급에 따라 실컷 기다리다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울분을 풀 데가 마땅히 없으니 로봇에게 푸는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