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별명이 개코 스트리퍼야. 또 다른 미친년이지. 개코처럼 비리경찰 냄새를 맡아서 옷을 벗긴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지.”
23대응팀장은 ‘개코 스트리퍼’라는 별명의 본청 내사 11팀장을 소개했다.
이진영은 김상현을 뿌리치고 위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내사에 찍힌 사람이니 얌전히 대표전화나 받아라? 그거구만요?”
“그치, 정직 안 당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줄 알아. 너 병원 실려 가고 니 보험등급 떨어질까 봐 내가 간신히 피하게 해준 거라고.”
이진영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한숨부터 쉬었다.
“나 참, 이럴 거면 굳이 퇴원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아냐, 근데 그게 더 좋은 판단이었을 수도 있어.”
이진영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팀장을 쳐다봤다.
“왜요?”
“저 여자, 자작극이라고 생각하거든.”
“설마 그 버스를? 개코 스트리퍼가요?”
“어, 딱 그찮아? 사망자는 없고 제일 크게 다친 게 넌데, 너는 딱 내사를 당하고 있단 말이지?”
“아니, 어떤 미친놈이 내사 혐의를 피하려고 버스에다 팬지커터를 설치하고 박살 낸답니까? 지가 디질지도 모르는데.”
“넌 저, 경력 있잖아? 의심할 만하지.”
“아아.”
이진영은 납득한듯 짧게 대답했다. 그의 군 시절 주특기는 공격 로봇 운용이었지만, 로봇을 이용해서 다리 폭파라던가 해공군 전폭기가 하지 못한 굵직굵직한 폭파 미션을 수행한 이력이 있었다. 당연히 저속폭탄 팬지커터도 밥 먹듯이 다뤘었다.
“내사혐의는 대체 뭐랍니까? 고건 좀 압시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23대응팀장은 일단 팀원들을 해산시켰다. 김상현이나 다른 팀원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였지만 제각각 해야 할 일을 찾아 떠났다.
23대응팀장은 이진영을 흡연장으로 데리고 와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줬다.
“개코가 쫓고 있는 건 웡꺼야.”
“웡꺼요? 그건 저 본청 공안 쪽에서 담당해야 할 것 같은디? 그놈들 무슨 전투기를 밀수하다가 뉴스에 나오고 그랬잖아요?”
신희정에게 들은 바로는 롱꺼 패거리 중 준군사조직에 가까운 웡꺼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웡꺼에서 돈 받아먹은 놈들이지.”
이진영은 호롭 자판기 커피를 들이마시며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사과하고 본청이 의심하는 건 네가 어떻게 중화대루에서 무사히 걸어 나왔냐는 거야.”
“아…….”
이것만은 이진영도 말하기 곤란했다.
천도영, 류모성 납치사건 때 이진영은 웡꺼 쪽에 ‘수사정보’와 류모성의 정보를 교환했다. 거기에 ‘희망빌라’를 폭파한 정 대령을 넘기면서 이진영은 웡꺼의 피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형님, 설마 나 의심하는 거예요?”
“야, 지지리 궁상 니 살림은 내가 더 잘 안다. 웡꺼에게 돈을 받았으면 넌 진작에 인천을 떴겠지.”
23대응팀장도 자판기 커피를 호롭거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넌 왜 여기 안 떠나는 거냐? 그 뭐시냐 백헌강 사건도 사실상 니가 해결한 거고, 정보국에도 끈이 있으니 정보경찰로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도 되잖아? ‘점수’도 다 채웠고.”
이진영은 미소를 지으며 눈에 뒤덮인 난민지구를 쳐다봤다.
“훗,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달까요?”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팀장은 괜히 이진영의 목 뒤를 찰싹 때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다른 애들은 필수 근무일수 채우고 나가기도 바쁜데.”
중부서는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수도권 경관들이 의무적으로 근무일수를 찍는 게 내규로 정해져 있었다. 구자연 검사 같은 경우는 야망에 불타올라 스스로 중부지검을 택했지만, 보통 경찰들은 사정이 달랐다.
월미도 신간척지는 살인, 방화, 강간 온갖 사고가 빈번하게 터지는 곳이었고 경찰들의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굴다리 근처로 들어갔다가 죽은 경찰들이 벌써 세 자릿수였다.
“이진영, 니가 그러니 더더욱 의심을 받는 거야. 이미 근무일수는 애저녁에 채웠고 승진도 싫다 전근도 싫다.”
“아, 난민지구에서 웡꺼랑 경제공동체가 되어서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져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진영은 담배를 난간에 쌓인 눈에 치익하고 껐다.
“웡꺼 새끼는 물론 롱꺼 새끼들도 싹 다 잡아 처넣고 넥타이 하나씩 선물해야지요. 저 새끼들이 존재하는 한 저곳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겁니다.”
이진영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점거리를 노려봤다.
“저 사람들.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이잖아요? 난 저 사람들을 위해 싸웠고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요. 그 지옥을 함께 빠져나와 다다른 곳이 저런 지옥이라니. 좀 허무하잖아요?”
23대응팀장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이진영을 쳐다봤다.
“아무튼…… 아니에요. 아, 형님 설마 그 개코 스트리퍼랑 짜고 무슨 도청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죠? 막 인자한 형님 포지션으로 술술 털어놓게 한 다음에 뒤에서 뒤통수 때리기?”
“야이씨, 사람을 뭘로 보고? 뒤통수는 지금도 얼마든지 때릴 수 있거든?”
팀장은 수첩으로 이진영의 머리를 때렸다.
“얌전히 있어. 니가 결백하다면 내사과도 조용히 물러날 테니까. 나 요새 위궤양 약 먹는 거 아냐? 제발 조용히 좀 지나가자.”
“하지만 버스사건은 어쩌고요?”
“거야, 뭐 강력부장님이 알아서 배당하겠지. 우리 팀이 맡을 이유는 없잖아?”
“형님, 이건 제 형사로서의 감…….”
“아, 집어치워. 또또또또 그놈의 감 타령이야. 감 먹고 싶으면 말해. 우리 시골집이 대구에서 감 농사 크게 지으니까 실컷 먹게 해줄게.”
이진영은 크게 한숨을 쉬고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이 강력전담부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문제의 개코 스트리퍼가 이진영의 자리에서 딱 기다리고 있었다.
내사과 11팀장 이효진은 마른 체형에 여자치곤 키가 컸다. 거기에 검은 바지정장 차림이라 어딘가 패션모델 같아 보였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서 미인이라면 미인이지만 쌍커풀이 없는 눈을 치켜떠서 그런지 왠지 사냥개가 노려보는 것 같다.
그녀는 이진영이 다가오는 걸 보고 씹는 담배를 질겅질겅하다 일부러 퉤하고 쓰레기통에 뱉었다. 그 모습을 본 이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금연 아니니까 그냥 담배를 피우시죠?”
“취향이야. 전쟁 때 폭약고에서 담배 피우다 뒈진 놈을 봤거든.”
이효진은 이진영의 책상 위에서 다리를 꼰 채로 다시 씹는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감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왠지 거스르기 힘든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미친년’이라는 말이 정말로 딱 맞았다.
“저기……. 아무리 본청 내사과라고 하시더라도 말이 좀 짧으신 것 같슴다?”
“뭐? 불만 있어? 그럼 찌르든가?”
이효진은 민원인이 불만이 있을 경우 청문감사관에게 민원을 제기하는 엽서를 팔랑거리다가 이진영에게 카드 쓰로잉을 하듯 던졌다. 엽서가 똑바로 이진영의 가슴팍으로 날아와 맞고 떨어졌다. 그는 엽서를 주워들고 이효진을 똑바로 노려봤다.
“일은 하게 해주셔야지?”
“뭔 일? 지금 당신 내사 중이야. 모든 사건 배당에서 해제됐고.”
이효진은 23대응팀장을 째려봤고 팀장은 괜히 김상현을 다그치며 딴청을 부렸다. 이진영은 한숨을 쉬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여전히 이효진은 책상 위에서 비키지 않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이진영은 그녀의 가슴에 걸려 있는 명찰을 보며 푸념을 했다.
“나 참. 경찰에 이씨 종친회가 특채라도 되는 건가. 다 이씨야?”
여전히 ‘이씨야’는 욕처럼 들렸다.
“왜? 먼 친척이라서 관대한 처분을 바라시게?”
“아뇨오. 딱 깨놓고 이야기합시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내가 중화대루로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거죠?”
이효진은 다시 한번 씹는 담배를 쓰레기통에 퉤하고 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진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솔직해서 좋네. 이진영 경위.”
“근데요. 제가 생각해도 낮은 확률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효진은 ‘요것 봐라’하는 표정으로 담배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효진 팀장님, 아무튼 웡꺼와 저는 무관합니다.”
“무관하시다. 무관한데 몸 성히 이진영 경위님을 무사히 돌려보내 줬다? 이상하잖아? 여러분드으을? 이런 소리 들어보신 적 있나요오오?”
이효진은 책상 위로 올라가 레슬링 선수처럼 귓가에 손을 갖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웡꺼의 중화대루에 터벅터벅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찰을 보신 부우우운! 웡꺼의 공격부대에게 둘러싸였다가 총알 한 발 안 쏘고 돌아온 슈퍼캅을 보신 부우운!”
이효진의 돌발 행동에 중부서 형사들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구자연 검사와는 좀 달랐고 마치 그녀가 씹는 담배처럼 지독한 느낌이었다.
“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 없잖아?”
“쇼 좋아하시나 봐요? 이왕이면 굴다리 한가운데서도 그렇게 외쳐보시죠? 다들 좋아하겠네요. 마침 팀장님 별명도…….”
이효진은 이진영의 멱살을 잡고 코가 닿을 거리까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개코 스트리퍼라고? 난 벗는 취향은 없어. 벗기는 취향이지.”
“고상하시군요.”
“고상한 취향이지. 니가 웡꺼랑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넌 거래를 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웡꺼가 널 곱게 돌려보내 줬을 리가 없어.”
이진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거래가 뭔지는 천천히 음미하며 알아봐 줄게. 내 별명대로 난 냄새를 맡는 거 하난 끝내주거든.”
“와, 일류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니 이 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전에 뱃지와 총부터 내놓으시지.”
“아이고 누구 말씀이시라고.”
이진영은 턱턱 뱃지와 총을 올려놓았고 그녀는 부하더러 그걸 가져가라는 시늉을 했다.
경찰 뱃지와 총이 회수되고 이효진은 이진영의 멱살을 풀어주고 책상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일부러 이진영의 서류를 건드려 후두둑 책상 밑으로 떨어지게 했다. 이진영은 서류를 주우며 투덜거렸다.
“학교 다닐 때 애들 여럿 괴롭혀본 솜씬데요?”
이효진은 그냥 ‘흐흐흐’하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강력전담부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내사과 직원 10명이 뒤따랐다. 괜히 딴청을 부리던 김상현이 이진영에게 다가왔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형님 괜찮아요?”
“괜찮겠냐? 궤도폭격을 맞은 것 같다 야.”
이진영은 서류들을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서류들은 전부 행정 로봇이 전산으로 처리하지만 이진영은 굳이 각종 서류들을 인쇄해서 파일로 정리했다. 종종 동료들은 그를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타임캅’이라고 불렀다.
“저렇게 마크하고 있으면 웡꺼와 접촉하기는 다 글렀군.”
“예? 형님 미쳤어요?”
“미치기는. 니가 그랬잖아. 팬지커터가 웡꺼에게서 흘러나온 거 같다며?”
“미쳤네. 미쳤어. 또 중화대루로 들어 갈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