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91
제91화
롱꺼 7일의 밤은 바로 롱꺼가 웡꺼, 쎄잉꺼 등 폭력조직들을 평정하고 난민지구의 주인이 되었던 바로 그 내부전쟁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직 링로드가 건설되기도 전 난민지구에서 폭력조직끼리 전쟁이 터졌고 진짜 그 다툼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밀수한 엑소슈트가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대전차포가 상대방 진영 건물을 산산조각 낸다.
대한민국 정부는 롱꺼 7일의 밤 때 전혀 개입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나중에 난민 인권단체에서 난리가 났지만, 불청객이자 외교적 골칫거리인 난민이 알아서 죽어준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오히려 고맙다는 태도였다.
“형님, 그때부터 영업했으면 정말 오래되었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삼화 구급, 주소오오가아아.”
“뭐야. 형님 그 몸을 하고 가시게요?”
“그냥 관과앙. 어차피 난 그냥 직무 배제되었다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내사 대기잖아요?”
이진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저 짝은 내가 움직이는 걸 내심 존나게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죠잉?”
이효진은 밴 안에서 이진영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진영은 삼화 구급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들고는 권투 라운드 걸처럼 빙글빙글 도는 흉내를 냈다.
오고 가는 강력부 형사들은 이진영의 장난에 휘유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호응했고 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형님, 혼자 가시게요? 로봇 아무거나 하나 데려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총도 없는데.”
“주안이라잖냐? 방벽 안쪽인데 별일 있겠어?”
김상현은 말없이 삼화 구급의 홈페이지로 눈을 돌렸다. 총알을 뚫고 드리프트를 하는 앰뷸런스가 어딘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럼 팀장님께는 뭐라고 해요?”
“그 늘씬한 내사과 미녀와 데이트. 혹은 식사?”
“왜 맨날 핑계가 그런 거래요?”
이진영은 맨손으로 휘적휘적 강력전담부에서 걸어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아름다운 눈의 세계였다. 시의 청소 로봇이 미친 듯이 눈을 길가로 밀어붙이고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였지만 계속해서 내리는 눈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이진영은 일부러 도넛 위에 뿌려진 설탕처럼 얕게 쌓인 눈길 위를 걸으며 발자국이 점점이 남는 걸 즐겼다. 이진영의 운동화 자국을 밟으며 낯선 로봇 하나가 이진영의 뒤를 쫓아 터벅터벅 걸어왔다. 로봇은 흔히 볼 수 있는 민수용 오픈프레임이었다.
이진영은 내색하지 않고 경찰서를 빠져나와 일부러 월미도역으로 향했다.
월미도역의 노점들은 눈이나 비가 내리는 날이 대목이었다.
역 근처에서는 주로 국수나 중화요리를 팔았고 국수에서 나오는 허연 김이 하얀 눈과 어우러져 뭐라 말할 수 없는 풍경을 만들었다.
술꾼들은 허연 김이 파란 방수포에 맺혀 방울져 내리는 것만 봐도 술이 땡긴다고들 했다. 아직 낮인데도 기본소득자들은 월미도 방벽을 넘어와서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진영은 일부러 늘 가던 노인의 국숫집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가게 뒤로 빠져나왔다.
“李警官? 去邊度啊? (경관님? 어디 가세요?)”
이진영에게 길을 비켜주며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바로 그의 뒤를 따라 오픈프레임 로봇이 뒤따랐다.
월미도 쪽으로 가면 갈수록 눈이 쌓여 있었다. 굴다리나 난민지구는 청소 로봇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상인들이나 난민들이 눈을 대충 치워놓았다.
이진영은 일부러 로봇을 안쪽으로 끌어들여 골탕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로봇은 이진영이 이리저리 노점 사이를 왔다 갔다 해도 기어코 그를 따라잡았다. 결국 포기한 이진영은 로봇 앞에서 몸을 돌리고 물었다.
“너 뭐야. 왜 쫓아 오는 건데?”
x3 놀부의 박
– 경위님, 경직법 1조 4항, 경찰이 직무집행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동행해야 합니다.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엥, 이브이?”
– 예, 임시 프레임입니다.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있습니다.
로봇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민수용 오픈프레임 로봇이었고 지금도 이진영의 옆으로 비슷하게 생긴 모델이 지나가고 있었다.
원래 EV-1의 프레임은 겉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모습이라면 지금 이 프레임은 위압감은커녕 과자 심부름하는 로봇처럼 보였다.
– 진통제와 여분의 배터리팩을 잊으셨더군요.
“아, 그렇군.”
이진영은 그제야 의료용 엑소슈트를 의식했다.
아침에 엑소슈트에 올라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엑소슈트를 쓰고 있다고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의료용 엑소슈트는 자연스럽게 이진영의 몸을 떠받치고 있었고 진짜 팔다리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이 엑소슈트도 무한정 움직일 수는 없었고 배터리팩이 필요했다. 이진영은 EV-1에게 배터리팩을 받아서 허리지지대의 수납함에 넣었다.
“너나 나나 파워다운이구나. 내사가 뭔지. 순찰차도 못 쓰고.”
이진영은 투덜거리며 다시 월미도역 쪽으로 향했다.
– 주안이라면 버스가 더 빠를 겁니다.
“넌 가끔 섬세하지가 못하다니까? 어제 버스 타고 그 난리를 겪었는데 버스를 또 타고 싶겠니?”
EV-1은 멍청하게 생긴 카메라 헤드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봇은 민수용 헤드라 큰 렌즈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어딘지 꺼벙해 보였다.
이진영과 EV-1은 월미도역으로 돌아와 일반 전철을 탔다.
이 전철은 1897년에 뚫린 바로 그 경인선 전철이었고 옛 1호선의 악명대로 온갖 사람들이 다 타고 있다.
하릴없이 전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는 노인들, 여전히 우산이나 수세미를 파는 잡상인도 있고 세상의 종말이 올 거라며 침을 튀기는 사이비 종교 전도자들도 있었다.
아무리 로봇이 깔끔하게 객차 안을 정리해도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와 퀴퀴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술꾼들은 전철 연결 칸에서 오줌을 누기도 했다.
이진영과 EV-1은 이런 분위기에서 전혀 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엑소슈트를 하고 있는 이진영을 힐끔 보고 전상군경이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갔다.
이진영은 1호선의 썩어가는 듯한 분위기가 싫었다. 기본소득을 받는 시민들은 썩은 동태눈깔마냥 허여멀건한 눈으로 오늘 뭘 할지, 뭐 또 말초적인 즐길 거리가 없을지 떠돌아다니는 좀비를 보는 것 같다.
웡꺼의 마약이 점점 기본소득자들에게 물이 스며들 듯 퍼져나가는 건 이들의 삶이 너무나도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가끔 이진영은 이상의 소설 속의 세계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도 심심해서 이장댁 꼬마와 뻔히 이기는 장기를 둬야 하는 일상. 심지어 꼬마도 자신이 질 걸 알지만 딱히 할 건 없기에 대충 장기를 둔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다. 어제도 오늘과 똑같았다.
기본소득은 따박따박 들어오니 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 전처럼 절대빈곤은 로봇들이 생산하는 물품 덕에 사라졌고 적어도 기본소득을 받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조금 무리하면 고급 레스토랑에 갈 수도 있고 그놈의 문화생활도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몇몇 해외 언론들은 한국의 이런 환경을 두고 새로운 ‘로마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상의 처럼 나날이 늘 똑같은지라 무료함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걱정 없이 빵과 서커스를 즐겼던 로마시민들처럼 대한민국 국민들 역시 그들만의 서커스를 찾아 좀비처럼 헤매었다.
어떤 이는 로봇을 커스터마이징하는데 몰두하거나 어떤 이는 시인 동호회에 가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시 역시 이미 인공지능 작가들에게 추월당했고 이들이 하는 건 문학적으로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20세기에서 21세기의 문화에 다시 회귀하는 건 인공지능이 창작의 영역에서 인간을 압도하며 인간들에게는 문화적 암흑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공지능이 만든 소설이나 시를 즐기기도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특단 사건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뭔가를 원했고 결국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의 정점이었던 80~90년대 문화, 올드스쿨로 회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 문화 회귀 현상도 결국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한 장기 두기’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이진영은 손에 턱을 기대고 온갖 사람들이 좀비처럼 오고 가는 모습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주안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진영은 전철 안에서 탈출하듯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시발, 니 말대로 차라리 버스가 나을 뻔했다. 빌어먹을 1호선.”
– …….
EV-1은 이진영이 실수해도 ‘거봐요.’라는 식으로 잘난 체를 하는 법이 없었다.
주안은 예나 지금이나 꽤 번화한 동네였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백화점도 보이고 고급 레스토랑도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역 근처와 번화가들 뿐이다.
역 근처의 초고층 빌딩들 말고는 전쟁 전후로 재개발이 흐지부지되면서 콘크리트가 푸슬푸슬 부서지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몇몇 노인들은 주안역 근처의 가게들을 보고 향수를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좋은 말로 해서 향수나 노스탤지어지 그냥 노후한 건물들일 뿐이다. 삼화 구급은 바로 그런 낡은 상가 건물 2층에 있었고 역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사설 구급을 하기엔 최적의 환경이군.”
주변은 주택가가 아니었고 슬럼화가 진행되며 버려진 건물들도 많았다. 이쯤 되면 버려진 집들이 범죄의 온상이 될 테지만 집주인들은 재개발만 바라보고 월세를 절대로 내리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그냥 방치되어 눈에 덮여 있었다.
여기서 방벽까지는 차로 밟으면 10분 정도로 그리 멀지 않았다. 일단은 방벽 안쪽이니 치안이나 공공서비스는 굴다리 근처와 비교할 수 없었다.
이곳의 눈은 벌써 공공 로봇이 다 치워놓았다. 아직까지 눈이 쌓여있던 월미도 역 근처의 풍경을 생각하면 아예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삼화 구급의 앰뷸런스 몇 대가 허름한 상가 앞에 주차되어 있다. 범퍼에 총알구멍이 뽕뽕 뚫려있고 슬라이딩 도어 역시 중장비에 찍힌 흔적이 있다. 이 앰뷸런스가 어제도 사선을 오고 갔다는 증거였다.
“빡세게들 사시는구만. 이브이, 얘네 허가는 제대로 난 거냐?”
– 아직 유효합니다. 클래스3 이상 무기 소지 허가도 있고요.
“클래스 3이면 화약식 자동소총까지?”
– 예, 레일식 자동소총과 중기관총은 제외입니다.
앰뷸런스에 남겨진 흔적을 보면 납득이 가다가도 ‘구급차’라는 말을 곱씹어보면 좀 아이러니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이 무장을 해야 하다니.
그러나 이들의 주 고객은 주로 롱꺼 패거리들이었고 조직에게 쫓기거나 급히 방벽 안으로 대피하려는 사람들도 주로 이용했다.
심지어 정당방위라는 상황을 이용해서 사설 구급을 용병처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삼화, 삼화. 믿으니까~ 걱정 마쎄이요우.”
이진영은 삼화 구급의 광고음악을 흥얼거리며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치킨집, 중국집 등이 점심 지나서도 영업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름 나쁜 상권은 아니었다.
이진영은 촥촥 웍을 볶고 있는 로봇을 바라보다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상가의 모습이지만 삼화 구급이 있는 2층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2층 계단참에서 AK-99를 어깨에 멘 ‘응급구조사’가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이진영과 EV-1을 바라본다.
응급구조사는 군용 방탄장갑과 보병 엑소슈트를 장비하고 있었고 우주용 헤드모듈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놈은 흡배기 호스에 담배를 꽂고 마치 물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호스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취직?”
“아니,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구조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