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93
제93화
“그게 문제야. 웡꺼 패거리와 접촉하면 좋을 것 같은데. EV-1 마크는?”
– 드론이 떠 있습니다.
“역시나. 서로 얌전히 들어가야겠군. 끄나풀이라고 폭탄이 어떻게 된 건지 다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진영은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중부서로 되돌아왔다. 전임 인공지능인 택시 기사는 불필요한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고 이진영은 눈이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했다.
택시는 금방 중부서 앞에 도착했다. 이진영은 달러로 차비를 계산하고 흡연장으로 향했다.
“야, 이거 담배도 제대로 못 피우겠네.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네.”
눈발이 흩날리는 흡연장에는 이효진이 담배를 짝짝 씹으며 전화를 받다가 검은 침을 퉤 하고 바닥에 뱉었다. 타르처럼 침이 하얀 눈에 튀겼다.
이효진은 이진영을 노려봤지만, 딱히 이진영에게 뭐라고 할 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진영은 럭키 스트라이크를 입에 물고 이효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냥개.
그녀는 옷 입은 스타일이나 전체적으로 보면 도회적인 미녀 커리어우먼으로 보였지만 검은 정장 깊숙한 곳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킬러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지옥을 겪었길래 저토록 사나운 기운을 풍길까?
이효진은 전화를 끊고 씹는 담배를 퉤 하고 쓰레기통에 뱉었다.
루니툰의 한 장면처럼 검은 침과 담배가 쓰레기통 윗부분에 맞아 탱하는 소리가 났다. 회전식 뚜껑이 팽그르르 돌고 이진영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설날 기인열전에 나오셔도 되겠네요.”
이효진은 이진영을 빤히 쳐다보다 먼저 내사팀의 밴이 있는 곳으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팀장님, 나 마중 나온 거 아니에요?”
“자의식 한번 끝내주는군. 이혼남 주제에.”
“에에이, 나 따라온 거 다 아는데? 진짜로 데이트 하고 싶으면 말해요. 밥은 사줍니다. 여기 홍소우육면 잘하는 데 있거든요.”
이효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토록 뻔뻔한 피내사자는 또 처음이었다.
“피내사자한테는 안 얻어먹어.”
“그럼 내사 혐의가 풀리면 언제든 말씀하십쇼.”
“풀릴 것 같아? 그리고 난 중국요리 싫어. 전쟁 때 질리게 먹었거든.”
“그럼 한식 중에 국밥을…….”
이효진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밴으로 걸어갔다.
이진영은 코트를 어깨에 걸친 이효진의 뒷모습 쪽을 향해 괜히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로 돌아와 김상현부터 찾았다. 김상현은 영장을 받으러 법원에 갔고 이진영은 자기 자리에 앉아 괜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EV-1은 이진영에게 물었다.
– 괜찮겠습니까?
“뭐가? 아, 내사과? 괜찮아. 내가 떳떳하면 하늘의 해나 달을 어찌 두려워하리오. 이 세상의 나의 편이 될 것이라.”
EV-1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이번에는 내가 지어낸 하는 말이야. 드립 받아줄라고 검색할 필요 없어. 아무튼 번호 기록했지?”
– 예, 물론입니다.
EV-1은 삼화 구급에서 프린터에서 번호가 나올 때마다 기록한 것은 물론 이미 해당 번호들로 검색까지 해놨다.
– 삼화 구급 원장이 말한 번호는 시 외곽의 폐차장입니다.
“오, 이런 시부랄. 쎄잉꺼 거기?”
이진영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EV-1과 이진영은 천도영 유괴사건 때 폐차장으로 유인되어 천수관음에게 죽을 뻔했다. 그 뒤로 이진영은 폐차장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고 말했다.
“왜 하필 거기야.”
– CCTV가 없으니까요.
이진영은 알면서도 물었고 정답을 듣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쎄잉꺼의 폐차장은 굴다리만큼이나 위험한 곳이었고 그곳에는 CCTV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구리구리한 거래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있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곤 했다.
“전화한 시간은 폭발이 터지기 전까지 딱 세 시간 전이로군.”
세 시간이면 모든 세팅을 다 마치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의도적이었군요.
“그래, 그거 하나만은 확실해졌지. 폭발을 내서 버스를 뒤집고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앰뷸런스를 대기시키다니?”
– 놀부 같군요.
이진영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범인의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다시 붙여놓는 놀부의 행동과 똑같았다.
“놀부는 흥부처럼 보물이 들어있는 박을 얻으려 머흘쩡한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렸는디, 하아따 요 범인 놈은 왜 그랬을까?”
지나가던 형사가 괜히 ‘얼쑤’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다시 난관에 부딪히자 이진영은 괜히 군용통신기를 만지작거렸다. 신희정이라면 경찰 권한이나 영장 없이도 위성이나 각종 감청장비를 이용해 단서를 알아낼 수도 있다.
“전화를 했다간 난리 나겠지.”
이진영이 사고 후 새로 발급받은 통신기와 전화는 내사과에서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수상쩍은 누군가와 도약통신이라도 한다 치면 이효진이 도끼눈을 하고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이진영은 신희정이 남기고 간 장난감 농구공을 괜히 쪼물딱거리다 골대에 던졌다. 탱, 공은 맥없이 림에 맞고 튕겨 나오고 EV-1이 공을 주워서 이진영에게 되돌려 줬다. 그는 한동안 공을 노려봤다.
“이브이, 대기해. 병원에 갔다 올게.”
– 예, 알겠습니다.
이진영은 화이트보드의 행선지에 메모리얼 병원이라고 써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내사과 직원 한 명이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왔다. 아까도 1호선 지하철이나 삼화 구급까지 내사과 놈들이 미행했었다.
이진영은 내사를 받는 사람치고는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중부서를 나와 메모리얼 병원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아, 기사양반 여기 인터넷 사용해도 되지? 아무래도 병원 예약을 해야 할 것 같아.”
– 물론입니다.
이진영은 택시에 비치된 인터넷으로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냈다. 뒤에는 내사과의 미행자가 따라오고 있었지만, 이진영이 택시 안에서 뭘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 * *
메모리얼 병원의 로비는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화요일이라 응급환자가 줄어들었나 싶었지만 연일 내리는 눈으로 환자들이 끊이지 않는 듯 했다.
아무리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보조해준다 한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오늘은 빙판에 미끄러진 환자들과 감기에 걸려 콜록대는 환자들이 많았다.
이진영은 각종 환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알록달록한 유니폼에 아름다운 미소녀 모습의 안내 로봇이 이진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 환자분. 환자분은 가종보험이라 일반 대기표가 아닌 노란색, 노란색 대기표를 뽑으시면 빨리 수속이 처리됩니다.
“아니, 괜찮아. 회사 땡땡이치고 나온 거라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거든.”
– 아, 그러십니까.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이진영은 하얀색 일반 번호표를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병원 로비 앉아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라종 환자라 일반 번호표를 든 사람 일색이었다. 그들은 부러진 상처를 끙끙대며 빨리 자신의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치과에서처럼 여기서도 보험등급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니이이, 내가 다종이라니까! 난 초등학교 야구 코치라고!”
– 환자분의 현재 보험등급은 라종입니다.
“여기 봐! 학교의 위임장이랑 세금 증명서도 있어!”
– 그건 세무서 등 관계기관에 제출하시고 보험심사평가원에 이의를 제기해 주십시오. 수납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기계적인 반응만 하는 로봇에게 분통을 터뜨리다가 경비 로봇에게 끌려 나갔다.
“아니! 나 다종 맞다니까아아아아!”
이진영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로비에 나와 있는 환자들이 달고 있는 명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죄수번호 명찰이나 군대 계급장처럼 사람들은 가슴팍에 색으로 구분된 명찰을 달고 다녔다.
라종은 파란색, 다종은 초록색, 나종은 분홍색, 가종은 노란색이었다. 이진영도 만약 입원하면 노란색 전자식 명찰을 달게 될 것이다.
노란 명찰을 단 사람은 마치 뭐라도 되는 것마냥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지만, 파란색 명찰을 단 라종 환자들은 어딘가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밖에서 보면 우스꽝스럽지만 인간은 계급체계에 누구보다 익숙하다. 군대에서는 고작 금속으로 만들어진 계급장에 경례를 붙여야 하고, 사회에서는 고급 양복이나 시계, 혹은 차로 등 가진 걸로 자신의 계급을 확인하기 마련이었다.
병원에서는 그게 색깔 명찰이었다.
이진영의 앞을 꼬마 하나가 보육 로봇과 지나가며 이진영이 전날 받은 처방전 종이를 바라봤다.
“노란 종이. 가종, 가종이야. 싱기하다아. 아저씨 가종이에요?”
사람이 아니라 가종.
이진영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꼬마는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괜히 자신의 파란 명찰을 만지작거리다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진영은 한동안 이 아수라장을 바라보다 누군가가 입구로 들어오는 걸 노려봤다. 그리고는 미리 뽑은 노란색 번호표를 접수대에 냈다.
– 가종보험 환자님, 예약하신 외과 외래 진료실 2-506으로 노란색, 노란색 선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바닥에도 네 가지 색깔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각기 다른 등급을 가진 보험환자들의 동선의 혼란을 막으려고 아예 보험 등급별로 처치실과 주사실이 달랐다.
이 안내선도 마치 러시아워 때의 도심 상행선과 하행선을 보는 것 같다. 노란선 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만, 파란선 위에는 교통체증에 걸린 것마냥 온갖 사람들이 끙끙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휠체어 로봇이나 개인 가사 로봇이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다들 길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라종 환자들은 파란 안내선 위에서 고통을 참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괜히 ‘라종인생’ 운운하며 동급생을 따돌리는 게 아니다.
그깟 흔한 감기로 병원에 왔을 때.
다른 환자들이 급행열차 타듯 진료실로 향하는 걸 보고 아이들은 이것이 ‘사회’라는 걸 체험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같은 외과 외래진료지만 노란선을 따라 먼저 진료실에 들어가는 이진영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외과 진료실에서도 역시 인간 의사는 볼 수 없었다. 이진영은 간호 로봇에게 새로 상처 부위의 주사 등 처치와 드레싱을 받고 경과 상황을 의사에게 통보받았다. 의사가 로봇에게 보고를 받고 인터폰으로 말했다.
– 예, 경과 좋네요~~ 내일 한 번 더 오세요.
그나마 가종 환자라 의사가 직접 이야기를 한 거지 라종 환자라면 의사의 통보 역시 간호 로봇이 대신해 줬을 것이다. 간호 로봇은 이진영의 바지를 입혀주고 엑소슈트 위에 올려주기까지 했다.
– 환자분, 상처가 덧날 수 있으니 무리한 활동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냥 걷기만 했어.”
– 걷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환자분의 현재 상황은 절차대로라면 입원을…….
이진영은 로봇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잽싸게 터치패널의 예스 버튼을 눌렀고 로봇은 바로 행동을 멈췄다.
“어이 로봇, 이 진료실 다음 예약은? 나 한 5분만 있다가도 될까?”
– 물론입니다.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은 가종보험 환자에게 각종 혜택을…….
“알았으니까 잠깐 비켜줄래?”
로봇은 잠자코 진료실을 비워줬다. 이 역시 가종 환자의 특권이었다. 로봇이 나가자마자 외래 진료실 2-506호 문을 누군가 똑똑 두드렸다.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