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94
제94화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가종은 금방이네에? 시설도 좋고.”
남자는 20대 초반이었고 붕대를 팔에 감고 있었다.
“그나저나 형사님, 왜 병원으로 부르고 난리래요. 그냥 월미도에서 보면 되지.”
“미안, 내가 내사 중이라.”
“내사요? 거봐요 내가 작작 받아먹으랬지.”
“먹긴 뭘 먹어. 만날 라면 국수, 국수 컵라면이구만.”
“아니 경찰 월급 받아 뭐해요? 맛난 거 사묵지?”
“보험료.”
“보험료요? 가종보험 아니에요?”
“민영보험. 보험료는 싸게 보장은 폭넓게, 여러분의 가, 족같은 오클랜드 인슈얼런스.”
이진영이 보험사 광고 문구를 따라 하자 남자는 킥하고 웃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튼 왜 불렀어요?”
“버스 폭발사고 팬지, 니네 쪽에서 나온 거지?”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굴다리엔 없는 게 없으니까.”
“최근에 팬지 사간 사람 알 수 있을까?”
청년은 요우티아오를 으적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님들 명단은 접근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 얼마를 더 주면 되는데?”
“돈을 천만금을 줘도 안 돼요. 아저씨가 중화대루 방문한 다음부터 형님들도 보안이 빡세졌거든요. 안에서 벌써 짭새 끄나풀이라고 세 명이나 죽었어요.”
예상한 대로의 답을 듣고 이진영은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그 버스 테러범 찾고 있는 거죠?”
이진영은 청년의 말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어차피 환자보호법에 따라 도청이 되지 않는 밀실인데도 청년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문이 있어요. 무슨 브로커인지 조직인지가 새로 거래를 터서 무기를 대량 구매했대요. 그래서 한동안 중화대루 근처에서 돈이 좀 돌았어요. 제 생각이지만 그 조직이 팬지를 산 거 같아요.”
이진영은 몇 가지 키워드를 수첩에 적어넣었다.
“무슨 조직인데?”
“저 같은 놈은 모르죠. 그냥 소문이에요. 러다이트일지 아니면 뭐 또 다른 놈들일지.”
“혹시 아선 인더스트리 공격한 놈들하고 같은 놈들이야?”
“모른다니까요. 근데 웡꺼 형님하고 윗선 형님들이 돈을 뿌린 걸 보면 꽤나 돈이 되는 장사였다나 봐요.”
“인간해방전선이나 어지간한 러다이트는 이미 너네랑 거래를 텄잖아. 그쪽이 아니라 새로운 거래처라는 거냐?”
“몇 번을 말해요. 새로운 거래처라고.”
“그게 언젠데.”
“잘 모르겠어요. 한두 달 전인가? 석 달 전인가? 저도 듣기만 했는데 그간 하던 사업을 뭐 불렸다나?”
“그간 하던 사업? 건 또 뭐야?”
“그걸 알면 나도 그 사업하겠죠. 얼마나 사업이 잘되면 그쪽이랑 거래를 트고 중화대루에 돈이 좀 돌드만요.”
신사업.
이진영은 그 말 역시 수첩에 써넣었다. 정보국이나 육공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웡꺼 내부의 거래정보였다. 지금 이진영과 이야기하고 있는 놈은 그의 정보원 전항매(全恒梅-췬헝마이)였다.
“러다이트는 아니고?”
“그니까 모른다니까.”
전항매는 다시 눈을 뒤룩거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관심 있을 만한 게 또 하나 있어요.”
“뭔데?”
“최신 정본데. 어제 술 마시다 옆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넌 서설이 길어. 본론부터. 뭔데?”
“무슨 대령이라던가? 큰 몸값을 지불하고 빠져나갔대요. 아저씨 말고 중화대루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사람일 거예요.”
이진영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수첩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하게 말해봐?”
“무슨 군복을 입은 애들이 대령을 몸값 얼마라더라? 아 맞다. 2억 달러, 2억 달러를 주고 데려갔다. 뭐 이렇게만 들었어요. 고것 때문에 조직원들 세뱃돈이 뿔어날 거라고 다들 기대하고 있어요.”
2억 달러 하필이면 천도영 사건에서 정 대령이 요구한 액수와 같았다.
“혹시 그 대령이 정 대령이라는 사람이야?”
“그건 모르겠어요. 암튼 내가 긁어온 정보는 이게 다예요. 돈이나 줘요.”
전항매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뻗었고 이진영은 둘둘 만 백 달러짜리 지폐를 전항매에게 건넸다. 녀석은 냉큼 돈을 받아 그걸 붕대에 꽂아 넣었다. 이진영은 들고 있던 하얀 번호표를 구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거 줘요.”
“왜?”
“진짜로 뿌러졌거든요. 팔.”
“나 참. 병원으로 오라고 하길 잘했군.”
이진영은 얼마 남지 않은 일반 번호표를 넘겼고 청년은 시시덕거리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약속한 5분의 시간이 지나고 곧바로 디스플레이에 안내문구가 떴다.
– 연장하시겠습니까? 연장하시면 10분당 진료비에 한화 2만 원가량이 청구됩니다.
이곳은 환자보호법에 따라 도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때론 환자들이 ‘러브호텔’ 대용으로 쓰기도 하고 온갖 구리구리한 거래를 하기도 했다.
바깥에서는 라종 환자들이 진료실에 들어가지 못해 아등바등하는 것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씁쓸한 안내문구였다.
이진영은 또 예스 버튼을 누르고 눈알을 번득였다.
전항매에게 전해들은 웡꺼 내부의 정보가 아주 쏠쏠했다. 아무리 하위 조직원이라도 ‘새로운 거래처’라고 표현한 걸 보면 분명 뭔가 있었다.
게다가 정 대령으로 추정되는 자가 중화대루에서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는 건 신희정에게도 반드시 알려야 할 정보였다.
“새로운 세력. 테러 세력인가? 빌어먹을 친구찬스를 써야겠군.”
그는 바로 유선 케이블로 군용통신기를 연결해서 그걸로 신희정에게 전화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는다. 이진영은 가끔 술 먹자고 신희정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때마다 신희정은 냉큼 전화를 받았다. 특히 이세화를 소개시켜준 뒤로 두 사람은 괜히 어색한지 이진영을 불러서 종종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정도라면 정말 어지간히 바쁘다는 이야기다. 이진영이 실망한 표정으로 통신 종료 버튼에 손을 가져가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고오오 요원니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대답이 없다가 잠시 후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저는 신희정 요원이 아닙니다.
이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시죠?”
– 부하직원입니다.
이진영은 통신기를 귀에서 떼고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신희정의 번호가 맞다.
“요원님은요?”
– 차석, 아니 지휘관님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 대신 메시지 전해드릴까요?
“아뇨, 그냥 술 먹자고 전화한 겁니다.”
– 술이요?
“마침 아네호 급 데낄라가 들어왔다 뭐 그렇게 전해주시면 알 겁니다.”
– 예 알겠습니다.
“아 잠깐. 혹시 요원님 아산에 계시나요?”
–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 번호로 전화한다고 알려주세요.”
전화는 예의 없게 툭 끊어졌다.
“뭐야 이건? 아무튼 골때리는구만.”
이진영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건 번호는 신희정의 개인 전화번호였고 아무리 부하라도 개인 전화를 받는 건 여러모로 이상했다.
“여자친구? 아니지, 그 양반 이세화 팀장 꼬실라고 눈이 돌아갔는데.”
신희정은 주당인 이세화와 술을 여러 번 마셨다가 만날 그녀의 주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격침당했다. 이진영은 왠지 불안한 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산에서 뭔 일이 터진 모양이군. 결국 친구찬스는 못 쓰는 건가?”
이진영이 고비를 겪을 때마다 신희정의 정보국 자산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줬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제기랄, 결국 다시 원점이로군.”
이진영은 사용종료 버튼을 누르고 병실에서 나섰다. 어차피 이곳에서 죽치고 있어도 보험료와 진료비만 올라갈 뿐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
병실을 나와서는 또다시 아수라장 같은 로비였다. 라종보험 환자들은 서로 아파서 죽겠다며 아픈 몸으로 밀치고 새치기를 했다.
“차라리 1호선보다는 여기가 낫구만.”
이진영은 아까 1호선의 권태로운 풍경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하철에서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좀비처럼 있던 사람들이 여기서는 제각각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고 울기까지 했다.
이진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수납을 마치고 영 입맛이 씁쓸했는지 병원에서 담배를 사서 흡연장으로 향했다.
“아 시발, 존나 춥네.”
지금 바깥은 시베리아 한복판처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초거대 구조물인 링로드조차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마치 그냥 하얀 캔버스 위에 점점이 회색 점이 찍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밖으로 나왔는데도 머리에 눈이 엉겨 붙었다. 치우기도 힘든 떡진 눈이었다.
그 바람에 병원 청소 로봇들이 눈을 치우며 애를 먹었다. 계속 눈을 옆으로 밀지만 페이로더 밑으로 직 진 눈이 빠져나오며 하얗게 설탕유리공예를 만드는 것 같았다.
이진영은 병원 건물 저쪽에 있는 흡연장을 바라보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엑소슈트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냥 운동화였다면 얕게 깔린 눈에 쭐떡 자빠졌을지도 모르지만, 의료용 엑소슈트는 멀끔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이야, 이거 좋구만. 중독되겠어.”
흡연장 안은 의외로 훈훈했고 이진영은 안에 들어오자마자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었다.
“담배 한 번 피우기 빡세네.”
이진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 겉비닐을 뜯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곧바로 허리를 굽혀 담배를 주우려고 했다.
삐삐삐.
배터리 방전 알람이 울렸다.
오늘 같은 추운 날씨에는 배터리 효율이 좋지 못하다. 그는 아까 EV-1이 여분의 배터리팩을 가져온 걸 떠올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렸다. 그러고는 앞으로 자세를 숙인 자세로 수납함에서 배터리를 꺼내서 장착하려고 했다.
그 잠깐 사이에 청소 로봇이 떨어진 담배가 쓰레기인 줄 알고 냉큼 달려왔다. 이진영은 허리를 굽힌 채로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아, 아냐. 그거 쓰레기. 야! 로봇. 쓰레기 아니라니까?”
로봇은 막무가내로 새 담배를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으려 했다. 이진영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이런 종류의 청소 로봇들은 EV-1같은 고급 인공지능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굉장히 저급한 인공지능을 사용한다.
특단 사건에서 범인들이 이용한 방법 역시 이런 저급한 인공지능의 이익형량에 관한 허점이었다.
“어이쿠. 쌩돈 버리실 뻔했네요? 어?”
마침 쓰레기통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로봇의 매니퓰레이터 암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어?”
구면이다. 사고 직전 우동을 먹을 때 봤던 제1기병 출신.
그 참전용사가 이진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이진영의 담배를 들고 다가왔다.
“형사님, 입원하셨어요?”
“아, 예. 사고를 좀 당해서.”
“사고요?”
“교통사고? 뭐 그런 겁니다.”
버스 폭발 테러 사고였지만 이진영은 에둘러서 교통사고라고 말했다. 참전용사는 이진영이 배터리팩을 교체하는 걸 보고 혀를 찼다.
“아이고, 많이 다치신 모양이네.”
“간호 로봇 말로는 거시기가 날아갈 뻔했다는군요.”
참전용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우’하는 표정으로 이진영의 아랫도리를 쳐다본다. 이진영은 이 남자가 썩 맘에 들었는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가 머뭇거렸다.
“아무튼, 당신…….”
“아 이제야 통성명을 하네요. 한승우입니다.”
한승우는 반갑게 이진영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는 스포츠 머리에 뿔테안경을 쓰고 꽤나 쾌활한 인상이었다.
“저는 이진영입니다.”
“이진영이요?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