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97
제97화
마이크로웍스 본사, 한국지사, 그리고 파주에 있는 아선 인더스트리 본사까지.
CNN에서 다음으로 보여주는 화면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온갖 단체들이었다.
한국의 인류해방전선은 제일 먼저 성명을 발표해 ‘간악한 로봇 기업들에게 불의 응징을 날렸다’라며 의기양양했다.
그 뒤로는 세상에는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일본, 아랍 에미리트, 영국 스코틀랜드. 세계 각지에서 마이크로웍스-아선 인더스트리 회사 폭발을 지지했다.
말만 들어보면 벌써 그들이 주장하는 ‘인간해방의 날’이 온 것 같았다. CNN은 전문가를 연결해서 러다이트 테러가 국제조직망을 통해 더 대규모로 변했고 이는 현대 문명에 대한 전쟁이라며 떠들어댔다.
안 그래도 백악관은 NSC를 소집하고 준전시체제로 돌입했고 청와대 역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이크로웍스가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마이크로웍스는 한국의 태성 AI과 일본의 아오타니 인공공학을 합병하고 명실상부 전세계 인공지능 OS 공급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한 거대 OS 회사였다.
이 회사의 본사와 가장 중요한 지사인 한국지사 즉 옛 ‘태성 AI’가 공격당했으니 경제적 파장도 만만찮았다.
채널을 돌리니 이번에는 언제나 그렇듯 경제 이야기였다. 경제전문가들이 이번 1/4 분기의 경제 전망이 암울하다면서 경제지표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각 방송사는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마이크로웍스-아선 폭탄 테러를 방영하고 있었다. 이진영은 멍청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껐다.
“뭔 말인지 알겠다. 큰 폭탄이 터졌으니 작은 폭탄은 우리끼리 알아서 하란 뜻이겠지?”
“뭐 그렇죠. 근데 감식 로봇하고 인공지능은 죄다 차출되었습니다. 아마 돌돌이도 내일은 강남으로 가야 할 거예요.”
“강남으로?”
“전국에서 가장 감식 알고리즘이 뛰어난 곳이 여기잖아요?”
이진영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에게 성장동력의 한 축을 크게 후드려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근데 상현아. 저 돈벌레들이 이렇게 정교하게 타격이 가능할까? 저놈들은 도네이션 받은 걸로도 지들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난리잖아?”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은 서로 ‘교리’에 따라 입장도 살짝씩 다르다.
일체의 기계와 전자장비를 거부하는 ‘러다이트 퀘이크’도 있고, 어떤 곳은 단순 전자식 장비는 OK, 또 어떤 곳은 인공지능만 안 되지 전자 밥솥의 자동조리 기능 같은 건 오케이 하는 식이다.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상과 교리의 갈래가 있었다.
“미국 마이크로웍스면 미국 국방부랑 비슷한 보안이지 않나? 쟤네들이 어떻게 뚫었지?”
이진영은 문득 전항매에게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새로운 범죄조직? 그리고 정 대령의 탈출?
그는 곧바로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이크로웍스의 폭파범이 누군지는 그가 신경 쓸 사안도 그의 관할도 아니었다.
“이젠 개인감정 문제지.”
“형님, 뭐가요?”
“버스랑 택시 폭탄 테러 앤드 저격.”
“아아.”
“아아는 또 뭔 아아야. 내가 이 새끼들은 반드시 잡아서 족쳐주겠어.”
이진영의 눈이 이글이글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확인하려다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그는 내사 중이었고 비무장이었다.
“내사팀은 뭐 한다냐? 나 공격받는 거 보고도 헬기 하나 안 보내더라.”
“몰라요, 아침부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네.”
“너 아니지?”
“뭐요 또?”
“막 친한 척 다가와가지고 썰 풀었더니 뒷구멍으로는 막 녹음하고.”
“아 누굴 스피커로 보시나. 내가 형님하고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김상현은 억울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이진영은 한동안 뉴스 화면에서 강남의 옛 태성 AI 건물이 폭파되는 광경을 바라봤다.
이진영은 저 건물에 갔다 온 적 있었다.
“도은주. 그 양반은 괜찮을라나?”
도은주는 전에 특단 사건을 해결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공지능 OS 설계자였다.
그녀와는 천도영 사건을 계기로 다시 만나긴 했는데 둘 사이의 관계는 미적지근했다. 도은주는 이진영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진영은 그녀를 드라이하게 대할 뿐이다.
그는 문득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져서 전화를 들었다.
“형님 또 어디 가요?”
이진영은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환자에게 병상을 내줬다.
“도은주 씨한테 전화. 넌 수속 마치고 로비로 와줘.”
“도은주가 누구예요?”
김상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혼한 형수님 이름이 은주였었나?”
이진영은 바로 로비 의자에 앉아 도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수작을 부리며 그녀의 개인번호쯤은 진작에 따놨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EV-1은 이진영의 초조한 모습을 보고 그냥 조용히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EV-1의 가장 좋은 점은 말해도 될 때와 아닐 때를 잘 안다는 점이었다.
이진영은 초조한 표정으로 이번에는 그녀의 직장 전화번호, 마이크로웍스 한국지사의 직장 전화를 꾹꾹 눌렀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구슬프게 연주되며 잠시 뒤 인공지능이 전화를 받았다.
“도은주 주임을 연결…….”
– 지금 마이크로웍스 한국지사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모든 업무를 종료했습니다. 고객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긴급 OS 출장이나…….
미리 녹음된 말이 튀어나오자 이진영은 전화를 끊었다.
“이런 개시부랄.”
이진영의 뜻을 오해했는지 노란 번호표를 쥔 사람은 마패를 쥔 것처럼 일부러 번호표를 팔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끔 가종 환자나 비싼 영리보험을 든 사람들은 자신이 라종 환자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 걸 즐긴다.
이진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도은주에게 다시 전화를 하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이진영은 전화대기를 하는 이등병처럼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 아, 형사님이셨구나?
도은주의 쾌활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아, 주임님 괜찮아요? 폭탄 테러 났다길래 괜찮은가 해서 그냥 안부 전화 드린 거예요.”
– 오오, 지금 저 걱정해준 거예요? 쪼금 감동인데? 근데요. 저번에 만났을 때 저 이미 설계과 과장으로 승진했다고 말했을 텐데요?
“아 미안해요. 지금 어디예요?”
– 병원이죠. 멀쩡하게 말하는 거 보면 그냥 긁힌 거고요. 운이 좋았어요.
“운이 좋다뇨?”
– 그……. 뉴스 안 봤어요?
이진영은 로비에 있는 TV로 눈을 돌렸다. 뉴스는 광고 중이었고 로고 화면 옆에 현재 부상과 사망자 숫자가 떠 있었다. 사망자만 21명. 저곳이 월미도도 아니고 강남인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정말 괜찮아요?”
– 몇 번을 물어봐요. 운이 좋았어요. 회사로 돌아오는 데 폭발이 펑 터져서…….
걱정돼서 전화는 걸었지만, 딱히 둘 사이에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도은주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 나 신촌 세브란스에 있어요. 문병 안 올 거예요?
“하하, 저도 문병 갈 형편은 아닌지라.”
– 형편이고 자시고. 아, 잠깐. 잠깐. 지금 형사님도 병원 아니에요? 이거 형사님 아니에요?
도은주도 뉴스를 보고 있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마침 병원 TV도 이진영이 저격을 피해 고가도로 아래로 롤러대시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전국이 세계적인 테러로 난리인 마당에도 월미도 상황을 보도하는 곳은 있었다.
바로 경찰 24시 프로그램이었다. 월미도 중부서는 총격전이나 이런저런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경찰 24시의 단골손님들이었다.
고가도로에서 일어난 총격전을 이 프로그램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이진영은 필사적으로 아래로 내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 아하, 알았어요. 그쪽도 병원이겠네요?
“정답.”
– 그럼 정답 맞힌 김에 뭐 하나 요청해도 되요?
“뭘요?”
– 나중에 술이나 한잔해요.
이진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좋은 걸로 사죠. 아무튼…… 그…… 없나요?”
– 뭐가요?
“잘생긴 그 사람이 전화를 걸었다거나.
이진영이 전화를 건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도은주도 금방 이진영의 뜻을 알아채고 다시 시큰둥하게 말했다.
– 모올라요. 그 사람이랑 이야기한 지도 한참 됐네요.
도은주는 테러를 당한 사람이고 수사를 위해 신희정이 반드시 접촉했을 만한 사람이었다. 도은주는 옛 태성 AI의 핵심 관계자였고 사실상 마이크로 한국 지부의 실질적인 책임실무 담당자였다. 이번 테러의 원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희정은 도은주와 접촉하지 않았다. 이진영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아이쿠. 아무튼 나중에 좋은 자리에서 뵙죠.”
– 좋은 자리는 됐고 이번엔 와인으로 해요. 또 그놈의 아저씨 냄새나는 술은 집어치우고.
이진영은 다시 빙긋 웃으며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는 김상현이 대신 병원 수속을 마치고 이진영의 옷가지 따위를 가져왔다.
“또 여자예요?”
“여자는 맞는데 그런 거 아니야.”
“도은주라는 여자 아녜요? 아 형님은 만날 카사노바처럼 여자만 만나고 돌아댕기시드라. 나한테도 좀 소개해주고 그래요.”
“소개는 무슨. 그리고 나 지금 퇴근해도 되지? 어차피 내사받는 중이라 서류작업도 없을 테고.”
“아뇨, 팀장님이 대기했다가 퇴근하래요. 그리고 서류작업 할 거 많아요.”
“그럼 차량 지원은? 또 택시 타고 나가라고? 또 한바탕 활극이 벌어지고 경찰 24시에 나올지도 모르는데?”
“지원 같은 소리 하시네요. 지금 아선이랑 강남 테러로 강력부 인원들 차출되었어요. 저도 가봐야 해요.”
“하긴, 테러 수사는 인천 중부서가 최고니까.”
이진영이 당한 총격 사건은 평상시라면 분명 경찰 본청이나 공안에서도 눈독을 들일만한 사건이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못했다.
오히려 경찰청은 중부서 인원들을 대거 강남과 아산으로 파견해서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시간은 얼추 4시 30분. 이진영은 김상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병원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나 참. EV-1 너라도 따라가라. 요새 저 양반, 가는 곳마다 폭풍을 부르고 있으니까.”
이진영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병원문을 열려고 했다. 김상현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진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총도 없이 반격도 못 하고 사냥감처럼 무력하게 저격당하는 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브이 지금도 노리고 있을지 몰라.”
– 민간 카메라로 접속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격수는 딱 봐도 군 출신이야. 아무리 너라도 민간망이라면 쉽게 잡을 수 없을 거야.”
– 군 출신이라면 관련 기록을 검색해볼까요?
“아니, 육공을 털어도 쓸만한 건 없을 거야. 육군은 광저우와 중국에서 한 모든 뻘짓거리들을 거기 묻어두고 왔으니까. 흥, 뭐가 땡큐 포 유어 서비스냐? 근처에서 강력 사건이 벌어지면 먼저 노숙자가 된 퇴역병을 찾으면서.”
메모리얼 병원에도 국방부 캠페인인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노란 리본이 붙어 있었다. 마침 꼬마 아가씨가 군복을 입은 병사를 보고 ‘헌신에 감사드려요’하고 꾸뻑 인사를 하는 TV 광고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참전자들은 그 광고를 곱게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