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liviate RAW novel - Chapter 83
Epilogue. 05
오블리비아테
– 빨리 보고 싶어서요.
귓가에 들려오는 귀여운 목소리에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말릴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일종의 통보인 거였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알고 이러는 건지.
재한은 웃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우유와 바나나, 그리고 시리얼을 골라 계산을 했다. 내일 아침으로 먹일 것들이었다.
생전 아침 따윈 챙기지도 않던 자신이 편의점까지 들어와 이런 걸 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남지아에게 미쳐있다 싶었다.
여전히 밖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비가 내리는데, 구태여 밖으로 마중을 나오겠다는 게 퍽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심 반가웠다.
자신도 빨리 보고 싶어 죽겠단 생각을 했으니까.
혹시나 또 길이 엇갈릴까 봐 편의점 앞에서 지아가 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쏴아 –
재한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여전히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진통제를 몇 개나 먹었음에도 어쩐 일인지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아 앞에서는 아픈 내색을 별로 하고 싶지 않단 생각에, 그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약을 꺼내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때였다.
돌연 눈앞에 시허연 섬광이 이는가 싶더니, 관자놀이가 깨질 것처럼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윽!”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도의 통증에, 재한은 이를 사리물며 주먹을 바득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찾아 쥐는 순간이었다.
희미한 시야로, 길 건너 저 멀리에서부터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제 몸집보다도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곤,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동그란 머리통.
남지아.
“하!”
재한은 신음 같은 헛숨을 토해냈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통증 사이로, 희미한 무언가가 빠르게 번쩍이며 스쳐 지났다.
‘말해 봐요, 나 좋아하는지.’
‘나 좋아한다면서요.’
‘그럼 나한테 와야지, 왜 엉뚱한 데서 사람 속을 뒤집어.’
‘압니까? 남지아 씬 참 거슬리지 않아서 좋아요.’
분명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아무것도 애쓰지 않아도, 엉망으로 조각난 기억들이 파편처럼 머리에 들어박히는 감각이 선연했다. 마치 꽉 막혀있던 무언가를 잔인하게 깨부수는 것만 같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자위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길 건너에 선 지아의 모습이 아스라했다.
투두둑.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우산과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숨이 콱 들어 막혔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뿌연 것들이 눈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삐이-
귀를 찢는 듯한 이명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대표님!”
그 시끄러운 이명 사이로, 다급한 목소리가 재한을 흔들었다.
“대표님!”
“…….”
“왜 이러세요? 네?!”
그 목소리에, 겨우 휘청이며 버티고 서 있던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명이 걷히고, 서서히 주변의 소리가 돌아왔다. 여전히 뿌연 시야엔 오로지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만이 선명할 뿐이었다.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된 지아가 핸드폰을 꺼내 들며 다급히 119를 누르려 하는 순간이었다.
재한은 본능처럼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젖어 있던 그의 품 안으로, 지아의 몸이 쏙 들어가 안겼다.
익숙한 향기와 그리웠던 체온에, 그제야 꽉 막혔던 숨통이 툭, 터지는 것만 같았다.
지아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하, 대표님. 왜…….”
“다 돌아왔어.”
“……네?”
쏴아 –
요란하게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에, 지아는 제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무슨……!”
“기억.”
“…….”
“다 기억났다고, 너.”
고여있던 눈물이 후드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여전히 당황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아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한을 바라봤다.
비를 맞아 흠뻑 젖은 그는 그녀를 욕조 안으로 들어 앉히며 샤워기 물을 틀었다.
“정말이에요?”
지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전부 다?”
“어. 전부 다.”
답을 한 재한이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날 나한테 달리기 잘한다고 말했던 거, 술 마시고 나한테 고백했던 거, 그러다 또 네가 먼저 몸만 섞는 관계 다 그만두자고 말했던 거까지, 전부 다 기억해.”
혼란스러워하는 지아와 달리, 재한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더 침착하기만 했다.
“하. 어떻게 이렇게 한 번에, 갑자기……. 이게 말이 돼요?”
“그러게. 나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거짓말하는 것 같네.”
“어떻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재한의 얼굴에, 감정이 북받친 지아의 말끝에 물기가 섞이고 있었다.
“어떻게 이래요, 어떻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제 기억 속에만 있던 남자가 돌아와 선 것이었다.
“또 우네.”
재한의 손가락이 지아의 젖은 눈자위를 스윽, 훑고 지났다.
그와 동시에, 지아는 두 팔을 뻗어 재한의 목에 매달려 안겼다. 울음 섞인 목소리 끝이 파르르, 갈라져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
그동안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리움이었다.
재한이 영영 자신과의 시간을 기억해내지 못한대도 상관은 없었으나 그 시간, 그 기억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나 아팠고, 그렇게나 달콤했고, 그렇게나 뜨거웠던 순간들을.
재한은 흐느끼듯 들썩이는 그녀의 몸을 토닥토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더 울어도 괜찮다는 듯이.
“미안해. 기억 돌아오고 나니까, 그동안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더 잘 알겠다.”
고개를 들어 올린 지아의 눈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더 커진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남자를 직시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 미안해해도 된다니까…….”
“난 계속 미안해, 그래도.”
“…….”
“너 잊었던 거.”
“…….”
“그래서 너 외롭게 했던 거.”
“…….”
“다 미안해.”
새빨개진 지아의 두 뺨을 쓰다듬는 재한의 목울대가 무겁게 들썩였다.
자신은 짧은 상상만으로도 이렇게나 아프고 버거운데, 이 여자는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건지 감히 가늠조차 되질 않아서였다.
재한은 다시 제 품으로 파고드는 지아를 꼭 끌어안았다. 같은 박자로 울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음악처럼 아스라했다.
***
어스름, 새벽빛이 밝아오는 시간.
얼핏 잠에서 깬 지아가 침실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거실 한구석, 스탠드 불빛 아래 앉은 재한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는 옆얼굴이 자못 궁금해 가까이 다가갔다. 예민하게 인기척을 느낀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왜 더 안 자고.”
“대표님은요?”
“머리가 복잡해서.”
“혹시 계속 아픈 거예요?”
곧바로 걱정스러운 빛을 내는 지아의 눈동자를 보며 재한이 피식 웃었다. 꼭 놀란 토끼 같아서.
“아니. 안 아파.”
고개를 젓자, 그제야 동그란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냥. 기억이 떠오르니까 생각할 게 많아지네.”
재한은 가만히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네. 정말 괜찮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하는 지아의 말에 재한이 능청스레 웃으며 입을 맞췄다. 그를 따라 웃는 지아의 얼굴에도 그제야 안도의 기색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비 그쳤네요.”
창밖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쳐 있었다. 구름 걷힌 하늘엔 커다란 달까지 새하얗게 빛났다.
“참, 잠깐만요.”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재한의 품을 벗어난 지아가 소파 한 편에 올려져 있던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재한이 지아의 집에서부터 가져왔던, 젖은 쇼핑백이었다.
“저 대표님한테 드릴 거 있어요.”
작은 상자 속에서 팔찌를 꺼내든 지아가 그대로 재한의 손목을 끌어다 팔찌를 채웠다. 달카닥, 소리를 내며 제 손목에 걸린 팔찌를 내려다보는 재한의 눈썹이 깊게 들썩였다.
“뭐야, 이게?”
“생일 선물이에요. 내가 직접 만든 거.”
“…….”
“생일 축하해요.”
재한의 잇새에서 픽 웃음이 샜다.
“언제 만들었는데.”
“대표님 몰래 틈틈이요.”
“아. 주말마다 나 버리고 친구들 만나러 가선 이거 만들었어?”
재한의 타박에 지아가 쌜쭉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있고, 첫 생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대표님 기억으론 저랑 맞는 첫 생일이기도 하고요.”
“…….”
“그래서 특별한 선물 해드리고 싶었어요. 지금껏 늘 받기만 했으니까.”
“내가 할 소리를 선수 치네.”
“생일 축하해요.”
까치발을 든 그녀가 쪽, 재한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그러자 맞닿았던 입술 위로 물감이 번지듯 희미한 미소가 동그랗게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