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liviate RAW novel - Chapter 84
Epilogue. 06
황홀한 꿈
“생일인 것도 잊고 있었는데.”
재한이 낮게 읊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송정원 다녀왔다면서요. 생일이라 부르셨던 게 아니셨어요?”
“작은아버지 일 때문에 부르셨던 거라. 그나마 매년 내 생일 알리미 해주는 엄마도 부산 출장 중이시고.”
“아…….”
“당신 아니었으면 나도 깜빡했을 거야.”
“실은 생일상 차려주려고 했었는데.”
“뭐? 언제.”
재한이 짙은 눈썹을 들썩였다.
“아까 통화할 때요. 조퇴하고 회사에서 나오는 길이었거든요.”
“그랬음 진작 말을 하지, 왜.”
“아팠잖아요. 회장님 호출도 있었고.”
“그딴 게 대수야? 그런 줄 알았으면 당장 달려왔지.”
발끈해 목소리를 높이는 재한의 과격한 반응에, 지아도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따가 퇴근하고 와서 해줄게요. 아직 생일 많이 남았으니까.”
“생일 선물들이 너무 황송해서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재한이 제 손에 걸린 팔찌를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역시나, 지아의 예상대로 무엇이든 근사하게 소화해 내는 남자였다. 디자인이 너무 단순하고 밋밋해서 별로 안 어울리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게 다 무색할 만큼.
“마음에 들어요?”
“당연히 마음에 들지. 누가 만든 건데.”
재한이 지아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며 속삭였다.
“나도 너한테 줄 거 있는데.”
“뭔데요?”
재한은 기다란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무언가를 지아 앞에 가져왔다.
심플한 무늬로 장식된 붉은색 상자였다.
“뭐예요?”
“선물.”
“무슨 선물……?”
“열어 봐.”
직접 확인하라는 듯 그가 상자를 향해 턱짓을 했다.
상자를 받아든 지아는 천천히 뚜껑을 열어젖혔다.
새초롬하게 반짝거리는 달 위에 앉은 새하얀 나비.
상자 속에 담긴 펜던트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게…….”
“너 주려고 주문했던 거야, 재작년 여름에.”
“재작년이요?”
지아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재작년 여름에 혼자 피렌체 출장 갔었을 때. 너한테 고백하면서 주려고 했었는데, 워낙 제작이 오래 걸리는 물건이라고 해서 주문만 해놓고 계속 기다렸었어. 그러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전부 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고.”
“…….”
“근데 참 희한하지. 이번에도 우연히 또 같은 곳에 들어가서 같은 주문을 하려고 했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실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기억을 잃는다고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란 걸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에게 있어 같은 여자와 두 번 사랑에 빠질 확률은 정확히 백 퍼센트였으므로.
“걸어 봐.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주문한 디자인이니까.”
재한이 직접 지아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 주었다. 가느다란 목덜미에 걸린 펜던트가 반짝이며 예쁜 빛을 냈다.
“예쁘다.”
목덜미에 흐르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목엔 지아가 먼저 채워 놓은 은색의 금속이 반짝거렸다.
“고마워요.”
벅차오른 마음을 어쩌지 못한 지아가 하릴없이 진심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런 지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대꾸하는 재한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나도 고마워.”
“축하해요. 생일도, 그리고 기억 다 돌아온 것도. 또…….”
“사랑해.”
돌연 말끝을 자르고 들려온 고백에 지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만 봤다.
일순간 모든 게 다 정지해버리고 온 우주에 남자와 자신, 단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마법처럼.
매끈한 입술이 한 번 더 나직이 진동했다. 그리고 마법 같은 주문이 한 번 더 이어졌다.
“사랑해, 남지아.”
재한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발갛게 달싹이는 입술 위에 도톰한 입술이 겹쳐 닿았다. 달큼한 숨이 한가득 밀려들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차창 밖, 맑아진 하늘 너머로 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새하얗게 친 차양 너머,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오후.
하얀 드레스 차림의 지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 앞의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꼭 꿈 같단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이었고, 길게 돌아온 길이었으니까.
하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지아는 애써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야! 너 진짜 너무 심각하게 예쁜 거 아니냐?!”
때마침 불쑥 대기실로 들어선 영은이 지아를 이리저리 돌아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특히 이거 드레스! 드레스 누가 골라줬어? 어?”
아무래도 드레스 고르는 걸 도와준 게 자기라는 걸 크게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지아는 넉살 좋게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누구긴 누구야, 남지아 친구 신영은이지.”
“그러게, 내가 안목 하나는 끝내주지. 남지아 미모에 찰떡처럼 어울린다 진짜.”
지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엄마는?”
“밖에. 들어오면 괜히 기분 이상할 것 같다고 그냥 밖에 계시겠대. 수혁이랑 밖에 같이 앉아 계셔.”
영은이 알 만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함께 자던 엄마가 밤새 몰래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제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아도, 하나뿐인 딸의 결혼에 아무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었다.
지아의 표정을 읽어낸 영은이 걱정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 이게 다 너무 좋아서 그러시는 거니까. 동네에도 너 결혼한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고 다니셨는지, 동네 어르신들이 아주 진저리를 다 치시더라.”
보지 않아도 훤한 엄마의 오지랖이긴 했다.
“몇 시야? 이제 곧 식 시작할 때 되지 않았어?”
영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양을 젖히고 길게 뻗은 다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재한이었다.
들어오면서부터 지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한을 보며, 영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놀랄 힘도 없다는 듯이.
“엑스트라는 이만 나가 봐야겠다. 파이팅!”
영은은 지아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대기실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지아는 제게로 다가서는 재한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턱시도가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왜. 긴장했어?”
어느새 가깝게 다가온 그가 자연스레 손을 잡아 쥐며 물었다.
“아뇨.”
고개를 저으며 애써 미소를 짓는 지아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재한이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춰왔다.
“예뻐 죽겠네.”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가 오른쪽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긴. 잔뜩 얼었는데.”
재한은 대번에 지아의 속내를 꿰뚫은 듯 말했다.
“솔직히 조금 떨리긴 해요.”
지아가 기어코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자,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내 손 잡고 나랑 같이 갈 건데 뭐가 떨려.”
“그냥요. 뭐랄까, 진짜 내가 재한 씨랑 결혼하는 게 맞나 싶어서요. 아무래도 안 믿기고…….”
“꿈 같지.”
제가 하려던 말을 정확히 이어 말하는 남자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홀한 꿈.”
그의 말에 동의하며, 지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
“나도 꿈 같아, 지금이.”
“…….”
“그러니까 우리 깨지 말자.”
“…….”
“이 꿈, 영원히 깨지 말고 황홀하게 살자, 같이.”
다정하고, 단단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지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질 못했다. 그저 입술에 꾹 힘을 주어 감쳐물었을 따름이었다.
꽉 움켜 쥐인 손가락 사이로, 두 개의 반지가 기분 좋게 맞물려 닿았다.
“자, 이제 신랑 신부 동시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랑, 신부 입장!”
때마침 드리워진 차양 너머에서 기다렸던 음성이 들려왔다.
“가자.”
재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지아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어렸다.
머리 위에 흩날리던 차양이 걷히고, 재한과 지아가 새하얀 햇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모든 게 눈부신 날이었다. 다신 없을 황홀한 꿈 같은 어느 날이었다.
,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