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00
100.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 * *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차이가 벌어진다.
최구열 이사는 MD 사업부를 가져가기 위해 조직 개편에 주력했다.
이정우 이사는 새로운 사업을 찾으려 했으며, 김지영 이사는 마켓 프레시의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정근영 대표는 커머스의 대표직을 지키기 위해 김상만 회장의 눈치를 살폈고, 김지욱 상무는 BO푸드의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커머스를 잊었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의 정신이 나가 있는 사이, 장상익 사외이사의 4%를 인수했고, 이정우 이사가 가진 7% 중 6%를 얻어 오기 위해 열심히 업체들을 돌았다.
해인 식품의 대표이사실.
조동진 대표는 내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좋은 기회 같은데, 저희도 요새 힘들어서…….”
김재열 사외이사의 도움으로 60억의 펀딩을 약속받은 후, 나머지 60억을 구하기 위해 친한 거래처들을 돌았다.
그리고 5개의 업체에서 30억을 더 확보했다.
내가 그동안 뿌려 둔 씨앗들이 열매를 맺은 상태였기에 지금까지는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남은 돈은 30억.
하지만 10억 이상의 펀딩을 생각했던 조동진 대표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닙니다.”
나는 조동진 대표의 말에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사무실 한쪽에 진열된 사인볼, 배트, 글러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야구 좋아하셨어요?”
“네, 요새 저거 보는 재미로 삽니다.”
“그렇군요. 좀 봐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때가 묻은 기념품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제법 유명한 메이저리거들의 사인들.
잘은 모르지만 모으기 꽤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진열장 한가운데 있는 낡은 야구공과 배트는 투명한 유리관에 별도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거 랜디 존슨의 사인볼 맞죠?”
“네. 미국까지 날아가서 직접 사 온 제 보물 1호입니다. 하하하“
“와 이건 푸욜스 배트죠?”
“부장님도 야구 좀 아시나 보네요.”
“야구를 몰라도 푸욜스 정도는 알죠.”
“맞아요. 푸욜스는 새로운 전설을 쓰는 사람이죠.”
조금 전과 다르게,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조동진 대표.
내가 배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유리 상자 안에서 배트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한 번 만져 보실래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저는 그 배트를 매일 잡습니다. 그걸 잡으면 뭐랄까…….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까요? 하하하. 하여간 위에 사인 부분은 지워지니까 만지지 마시고, 손잡이만 살짝 잡아 보세요. 부장님께도 좋은 기운을 줄 겁니다.”
나는 조동진 대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른손을 펼쳐 배트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가 이 배트를 얼마나 자주 만지고, 고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들려오는 수많은 기억.
힘들었구나.
위생 상태 점검에 거래처의 압박, 믿었던 직원까지 그만두고, 파업까지 이어지면서.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려온 기억.
그랬구나.
회사 사정이 좋지 못해서 돈을 끌어오려고 하고 있었구나.
해인 식품은 오프라인 마트에서 판매가 제법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근데, 여사님보다 독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한 회사의 대표이사가 도대체 누구에게 갑질을 당한 것일까?
나는 배트를 조동진 대표에게 돌려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기운이 생긴 것 같네요.”
“부장님. 제가 당장 도움을 드리긴 어렵겠지만, 꼭 응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와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요즘 해인도 투자처를 찾고 있죠?”
내 말에, 조동진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소문이 좀 빠르잖아요. 투자자는 찾으셨나요?”
“아직요. 그것 때문에 요새 죽겠습니다. 노조들 때문에, 채용까지 늘렸는데……. 디마트에서 압박이 심하게 들어오네요.”
“압박이요?”
“네, 걔네들은 마진 더 빼 가려고 혈안이 돼서 덤비잖아요. 어떻게 된 놈들이 지네 매출 늘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제조사 마진만 조정해서……. 아시죠?”
“이 기회에 온라인에 물건 더 풀어 보는 건 어떠세요?”
“저도 그러고 싶죠. 근데. 온라인은 또 가격 경쟁이 심해서……. 하여간 그렇습니다.”
조동진 대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이상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가 말한 돈독이 오른 사람이 누굴까?
어떤 조건을 던졌길래, 그렇게 심한 기억을 남겼을까?
나는 궁금한 마음을 누르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도와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밖으로 나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응? 돈은 다 구했어?
이 바닥의 마당발, 김재열 사외이사.
그는 많은 사람과 골프와 음주를 하며 소문을 많이 듣는 사람이다.
“아니요, 지금 해인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 해인? 거긴 왜 갔어? 걔네 다음 달이면 워크아웃 들어갈지도 몰라.
워크아웃이라…….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구나.
“그래요?”
– 응, 이번에 공장 위생 점검 때려 맞고, 마트에서 쫓겨났거든.
“하……. 그랬구나.”
– 그래. 그리고 이거 비밀이다. 절대 딴 데 가서 떠들면 안 돼!
비밀이라면서, 나에게는 잘도 말하는구나.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사님 생각은 어때요?”
– 뭐가?”
“해인이요. 살아날 수 있겠냐고요.”
– 동진이 형도 주변에 사람이 많아. 그래서 여럿 만나고 다녔을 건데, 아무래도 그 여자애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그 여자애요?”
– 응, 김 여사님 손녀딸. 이현아.
김선녀 여사.
그녀에 대해서 들어 본 기억이 있다.
사업가들에게 특별한 그녀는 부동산과 돈놀이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최근에 병으로 물러나고, 비슷한 성격의 손녀딸이 물려받았다고 들었다.
“이사님. 그분 알아요?”
– 나도 잘 몰라. 내가 여자에 좀 약한 거 너도 알잖아.
하긴 김재열 사외이사는 남자들과는 잘 어울렸지만, 유독 여자 사업가들과는 거리를 멀리 했다.
“하긴. 그렇죠?”
– 하여간 너는 그 여자 만날 생각도 하지 마.
“왜요?”
– 나도 돈구할 곳 좀 알아볼 테니까, 그 여자는 잊어. 알았지?
“그러니까 왜요?”
– 그냥 아니라면 아닌 거야!
김재열 사외이사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아군과 적군을 뚜렷이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김재열 사외이사는 특히 더 심하다.
아군은 형 동생 하며 지내지만, 적군과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다소 격한 반응에 조금은 놀랐지만, 그냥 적군일 것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 * *
다시 들어온 회사.
벽에 붙은 인사 발령 공고에 부서원들이 몰려 있었다.
—
인사 발령 공고문
MD 사업부에 신설된 커머스 사업부를 공지합니다.
로하스 커머스 : 신선, 건강, 쿠폰(신설)
발령자 : 김명진 차장 외 3명
디지털 커머스 차장 김명진 > 로하스 커머스 부장
푸드 커머스 팀장 정진택 > 로하스 커머스 차장
신석식품 팀 도재문 대리 > 쿠폰 사업팀(신설) 팀장
—
나는 공고문을 힐끔 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부장님! 이게 말이나 됩니까?”
마성근 팀장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내 계획을 말하지 않았기에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가요?”
“인사 발령 공고요! 오늘 저거 보고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어떻게 우리 사업부에서 신선식품을 빼 갑니까? 네?”
“…….”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화 안 나요? 당장 이사실 달려가셔야죠!”
“그냥 두세요.”
내 반응에, 마성근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김명진 차장도 잘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회사 나온 지 한 달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들리겠네요.”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마성근 팀장의 큰 목소리를 들은 김명진 차장이 들은 후였다.
“이미 들었습니다.”
김명진 차장은 마성근 팀장의 등을 부드럽고 쓰다듬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마성근 팀장은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씩씩대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소리쳤다.
“김대성! 내가 지난주 창고 재고 목록 올리라고 했는데, 못 들었어?”
“네? 언제요?”
“이게 따박띠박 말대꾸야!”
“갑자기 왜 그러세요? 팀장님?”
“그냥 시키면 예하고 하는 놈이 하나도 없지?”
팀원 중 가장 친한 김대성에게 화풀이하는 마성근 팀장.
김명진 차장은 특판팀을 물끄러미 보다가 내 책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요새 많이 바쁘셨죠?”
“응?”
“그냥 그래 보여서요. 어떻게 하시는 건 잘되고 계신 겁니까?”
“그냥. 뭐 그렇지.”
“장 이사님 4%는 인수하셨다고요?”
역시 소문은 빠르다.
주주명부에 이름을 올린 지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누구한테 들었어?”
“정진택 팀장님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참 대단하세요.”
“뭐가?”
“최구열 이사님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고, 그 사이에 4%의 지분을 가져가셨잖아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건가요?”
역시 김명진 차장이다.
내 속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냥 우연이지 뭐.”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절묘한데요? 혹시.”
“혹시 뭐?”
“이정우 이사님 지분도 가져오실 생각이신가요?”
귀신이구나.
지금 그것 때문에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재벌 집 아들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가져와.”
“다 투자 받아서 가져오는 거죠. 이정우 이사님도 그렇고, 최구열 이사님도 많은 돈 안 들이고 지분 가져오셨잖아요.”
“그래서?”
“부장님도 주변에 사람 많으시니까, 충분히 그러실 수 있잖아요.”
정확히 꿰뚫어 본다.
그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내 생각을 읽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화를 끝낼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의를 걸쳐 입었다.
“내가 사람이 어디 있어?”
“에이, 또 겸손이시다.”
“뭐가?”
“투자하라고 하면, 당장 달려들 업체가 여럿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내 말에, 김명진 차장은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돈 필요하시면, 제가 사람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사람?”
“네, 이 바닥에서 소문난 현금부자.”
“누군데?”
“오호. 관심은 있으신가 보군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미소를 짓는 김명진 차장.
나는 그의 알 수 없는 표정에 조금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아니,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말할게.”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 보세요. 그쪽에서도 부장님을 만나고 싶어 하니까요.”
“그쪽?”
“네, 얼마 전에 부장님을 뵙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누군데?”
“이현아 대표요. 부장님도 들어 보셨죠? 김 여사님 손녀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