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03
103. 뒤에 든든한 자본가라도 계신가 보네요
* * *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최구열 이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입구의 책상에는 여자 비서가 앉아 있었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앉는 긴 소파에는 작고 삐쩍 마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 남자가 김선녀 여사가 붙여 놨다는 그 사람인가?
태블릿을 보고 있던 남자는 내 시선을 느끼고,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태블릿을 보기 시작했다.
마치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처음 인사드리네요. 성함이…….”
내가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문식이라고 합니다.”
키는 160 초반에 매서워 보이는 눈.
벌어진 미간과 만두처럼 뭉그러진 귀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운동하셨어요? 몸이 장난이 아니네요.”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곧바로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원 부장! 요새 많이 바쁘지?”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 최구열 이사.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쳤다.
“아닙니다. 덕분에 많이 한가해졌습니다.”
“그래?”
“네. 친절하게 사업부를 셋으로 쪼개 주셔서, 할 일이 많이 줄었거든요.”
“하하하, 그래?”
최구열 이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MD 사업부를 가져가겠다는 생각에, 자신이 숲을 보지 못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 앉지.”
나는 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최구열 이사는 소파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번에 장상익 사외이사님의 4%를 인수했다고?”
“네.”
“그래. 잘했어. 아무래도 우리 사람이 주식을 들고 있어야지.”
우리 사람이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사업부에는 별문제는 없고?”
처음과 똑같은 질문을 한다.
빙빙 돌려서 말하겠다는 것을 보니, 뭔가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려나 보다.
“네, 문제없습니다.”
“그래, 원 부장이 잘 하겠지.”
최구열 이사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를 보며,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차를 가져오라고도 안 했네. 녹차? 커피?”
“아닙니다. 오늘 많이 마셔서 괜찮습니다.”
“아……. 그래.”
“하실 말씀이 뭔가요?”
본론을 꺼내라는 내 신호에 최구열 이사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이정우 이사 말이야.”
“네.”
“이번에 가진 주식을 내놓는다고 들었네. 새로운 사업을 한다지?”
소식이 늦구나.
아마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이제야 들었나 보다.
“예, 이정우 이사님의 지분은 제가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건 들었네.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근데 말이지.”
“네?”
“자금은 어떻게 마련할 생각인가? 못해도 200억은 들고 있어야 할 텐데?”
200억이라니…….
정말 모르는 건가?
이정우 이사가 얼마에 내놓았는지도 모르고, 김선녀 여사가 내게로 돌아섰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 건가?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MD 사업부를 쪼개는 것에만 몰두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정보에 늦을 최구열 이사가 아닌데…….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금은 열심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 혹시 말이지. 내가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이정우 이사는 최구열 이사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최구열 이사도 이를 잘 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이정우 이사의 주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를 통해 사려는 생각인 것이다.
“아닙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원 부장의 지분이 12%가 되는 건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이정우 이사가 6%만 내놓은 것마저도 모르다니.
뭔가 이상하다.
나는 내 생각을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두고 봐야죠.”
“그래서 말인데. 원 부장. 솔직히 난 우리 둘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
“내가 자네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 이정우 이사는 나에 팔겠다고 하겠지. 근데 그래서 뭐하나. 우리 둘이 경쟁해서, 정작 이득을 보는 사람은 이정우 이사인데 말이야.”
협박이다.
이정우 이사에게 이득을 주기 싫으니, 그 지분을 나누자는 협박.
만약 내가 거절하면 자신은 언제든 금액을 올려서 매입할 수 있다는 협박.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럼 더 쉽게 말하지. 이정우 이사가 내놓은 주식 중 절반, 3.5%는 내가 살 수 있도록 해 주시게. 그럼 서로 손해 볼 일이 없을 거니까.”
고작 이런 조건이라니.
너무 쉽다. 평소의 최구열 이사답지 않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떠보기 위해 마지막 수를 던져 봤다.
“뒤에 든든한 자본가라도 계신가 보네요.”
“응?”
“이틀 후에 이정우 이사가 돌아옵니다. 그가 오기 전에 절반의 금액을 마련하시려면 이사님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하, 돈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돈 얘기에 최구열 이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선녀 여사를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돈줄이 있다는 말일까?
아무래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다.
“이사님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응?”
“이정우 이사님의 주식을 사려면 제 명의로 사야 합니다. 계좌 번호를 드릴 테니, 내일까지 입금해 주세요.”
“그래. 알았네.”
최구열 이사는 허겁지겁 책상 위의 볼펜과 메모지를 가져다줬다.
볼펜을 잡자.
장상익 사외이사의 지분을 놓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여사님께 사람을 바꿔 달라고 한다라…….
병신 같은 놈은 저 밖에 있는 최문식이라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이 기억들로 100% 확신할 수 없지만, 90% 이상은 확실하다.
최구열 이사가 내일까지 구할 수 있다는 돈은 김선녀 여사의 돈이라는 것이.
나는 메모지에 계좌 번호를 적고, 그에게 다시 돌려줬다.
“내일까지입니다. 만약 입금이 안 되면 거래는 없던 게 될 겁니다.”
“그래, 걱정하지 말게.”
“이사님 뒤에도 든든한 자금이 있나 보군요?”
내 의미심장한 미소가 섞인 말에, 최구열 이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그런 셈이지.”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여전히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는 최문식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고개를 들이밀자, 최문식은 흠칫 놀라며 태블릿을 내가 안 보이는 쪽으로 치웠다.
“거참 그러지 말고 좀 같이 봅시다.”
나는 강제로 그가 잡고 있던 태블릿을 움켜잡았다.
김선녀 여사가 붙여 둔 사람은 확실하다.
그녀는 이 남자를 통해 최구열 이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다가, 이제는 반대로 정보를 묶는 수단으로 쓰고 있구나.
김선녀 여사.
무섭게도 잔인하고, 치밀하다.
한 배를 탔던 사람을 이렇게 묶어 버리다니…….
“주식하세요?”
최문식이 태블릿으로 보고 있던 것은 주식 프로그램이었다.
내 질문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주식을 좀 할 줄 아는데. 그건 아시죠?”
“네.”
“고급 소스 좀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조금 전과 다르게 방긋 웃어 보이는 최문식.
나를 조사했다면, 내가 주식으로 꽤 많은 돈을 불린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가 정보를 준다는 말에 솔깃했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술 한잔 사세요.”
“네?”
“이거 집 한 채 값은 되는 정보인데? 그것도 3개월 안에.”
“정말입니까?”
내 허풍에, 최문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언제 시간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최문식.
역시 돈 앞에는 장사가 없다.
나는 먼 곳을 보며, 잠시 날짜를 계산하는 척했다.
“이번 주는 힘들고, 다음 주에 합시다.”
“다음 주 언제요?”
“음……. 일단 스케줄 보고 연락드릴게요.”
나는 최문식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내가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는 앉은 채로 고개만 까닥거렸던 최문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제 명함입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명함을 내미는 최문식.
나는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나에겐 최문식이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를 통해 최구열 이사의 눈을 가리거나, 김선녀 여사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있으니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 * *
17층 MD 사업부 사무실 안.
금요일 밤이라 대부분이 일찍 퇴근한 상태였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 내 책상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이제 퇴근하십니까?”
김명진 차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명진 차장. 아, 이제 부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닙니다. 다음 주에 정식 발령인데요.”
“그래. 오늘 많이 늦어?”
“저도 금방 마무리하고 갈 겁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불금인데, 적당히 하고 들어가.”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어디다 차를 세워 놨더라…….
나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삐빅!
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차 앞을 가로로 막아선 검은색 세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중 주차를 해 둔 것인가?
주차할 자리도 많은데…….
세단의 앞으로 다가가자,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두툼한 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내렸다.
“오빠! 오빠는 맨날 이렇게 늦어?”
김선녀 여사의 후계자이자 손녀딸인 이현화 대표.
그 철부지 같은 아이가 짙은 눈화장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뭡니까?”
“뭐긴 뭐야? 오빠 기다리느라고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차나 빼세요.”
“금요일인데 약속도 없는 불쌍한 영혼들끼리 술 한잔 어때?”
“약속이 있네요.”
“누구? 누구랑 약속인데?”
“근데 아까부터 왜 반말입니까?”
“그럼 오빠도 말 놓든가?”
김선녀 여사는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후계자라는 이 철부지 아가씨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같다.
점점 궁금해졌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쩌면 이 철부지 아가씨에게서 그 힌트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말고 가자. 응? 딱 1시간이면 돼. 아니, 30분. 비지니스 안 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이현화 대표.
“30분입니다.”
“오케이 콜! 30분 고고고!”
“여기 말고, 동네로 가시죠.”
아무래도 회사 근처에는 아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럼 이동하는 시간은 빼고 30분인 거지?”
“제 차 뒤로 따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