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06
106. 김태하 팀장의 시점
* * *
어제는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아침부터 속이 쓰라리고, 계속해서 신물이 올라왔다.
머리는 또 왜 이렇게 깨질 것 같은지…….
당분간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원지훈, 그놈 때문이다.
이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무실로 돌아온 놈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래서 달래 준다는 핑계로 3차까지 달렸다.
지훈이는 일어났으려나?
그놈도 간만에 취해서 혀가 꼬부라졌던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선녀가 내려왔다는 말을 했던 거 같기도 한데…….
연애라도 하나?
간신히 침대에서 기어 내려 와, 테이블 위의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언제부터인지 필름이 끊긴 날에는 헤어진 은지에게 카톡을 보내곤 했다.
설마 했는데.
– 자니?
– 보고 시퍼성.
– 미안해. 낵아 잘 못했어.
또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구나.
오타까지 치면서……. 아주 가관이다.
거기다 1이라는 숫자가 지워진 것을 보니 읽고 씹힌 것 같다.
아, 미치겠다.
끓어오르는 수치심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지이잉! 지이잉!
그때 걸려 온 전화.
은지인가? 지훈인가?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전화를 받을지 말지를 한참을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세요?”
– 집이니?
김상만 회장님.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른 적 없는 아버지.
“그런데요?”
– 시간 되면, 오랜만에 점심이나 함께하자꾸나.
“전 할 말이 없습니다.”
– 태하야!
“죄송합니다.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인가 보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디십니까?”
– 오피스텔 1층 해장국집이다.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 태하야.
“네?
– 고맙다.
* * *
1층 해장국집.
작은 테이블에 회장님과 50대의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는 회장님의 비서실장 이민식.
지난 20년간 회장님을 모신 사람으로 가족보다 회장님을 잘 아는 사람이다.
“식사는 했니?”
김상만 회장님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색했다.
“아니요.”
“그럼 밥이나 먹자꾸나.”
회장님의 말이 끝나자, 그의 수족과도 같은 이민식 실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직접 해장국을 주문하고 우리가 앉은 옆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회장님은 이민식 실장과 겸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라고 하면서, 정작 신분이 낮은 사람과는 겸상도 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이 구역질 날 정도다.
“실장님도 같이 드세요.”
내가 말하자, 이민식 실장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 방금 먹고 왔습니다.”
“정말요?”
“네. 식사하세요. 도련님.”
“그 도련님이라는 말 좀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데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민식 실장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 후, 고개를 돌려 회장님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무슨 일입니까?”
“네가 일전에 말했던 것을 좀 생각해 봤다.”
은지와 헤어지던 날.
무턱대고 회장님을 찾아가, 그 잘난 호적에서 날 빼 달라고 말했었다.
그녀와 헤어진 이유는 내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상견례를 하자는 은지와 가족들에게 내 사정을 솔직히 말했고, 그들은 재벌 집 서자인 내게 혐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간통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생명이 바로 나라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어쩌면 내가 과민 반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은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요?”
“태하야. 사람에게는 누구나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의 손가락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살았다.
어머니는 내 뒷바라지를 위해 코딱지만 한 건설 회사에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던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해 돌아가셨다.
김상만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유서만 남기고.
나는 무턱대고 회장님을 찾아갔다.
중학교 3학년짜리가 살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회장님은 친자 검사를 마치고 나서야, 나를 아들로 맞이했다.
당연한 절차라고 했지만, 중학교 3학년짜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차가운 현실이었다.
그 집에서 산 3년은 지옥과도 같았다.
사모님은 나를 벌레처럼 봤고, 형이라는 사람은 나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나마 누나와는 가끔 대화를 섞었지만, 가까이하기는 어려웠다.
“태하야. 네 말대로 하마.”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마.”
“처음으로 회장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겠군요.”
“대신 태하야.”
김상만 회장이 한 손을 올리자,
옆 테이블에 있던 이민식 실장이 노란 서류 봉투를 가져왔다.
“BO커머스의 주식 양도 계약서다. 이건 네가 받아줬으면 좋겠구나.”
“…….”
“지영이와 똑같은 7%다.”
“…….”
“아비가 돼서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더구나. 근데 네가 커머스에 적응하고,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이게 너한테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 봉투를 가만 내려다봤다.
저게 생기면, 어제 그렇게 힘들어하던 지훈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구열 이사와도 맞서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탐난다.
이번만 눈 딱 감고, 모르는 척 받자.
지금까지 어렵게 살아온 보상이라 타협하고, 이번만 눈을 감는 거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있으면, 저도 주총에 참석할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여기 사인만 하면 너도 커머스의 주주가 되는 거다.”
“욕심이……. 나는군요.”
“그래. 욕심이 나면 가져도 된다. 네 것이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봉투 안의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출력된 문서를 보고 긴 한숨을 내쉬며 펜을 움켜잡았다.
“여기 사인하면 됩니까?”
“그래. 나머지는 여기 이 실장이 알아서 다 해 줄 거야.”
“회장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네, 원지훈 부장을 한 번만 만나 주십쇼.”
지훈이에게 이사회의 얘기를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다.
정근영 대표가 반대해서, 차선책으로 회장님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회장님을 설득해서, 자리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너도 그놈 얘기냐?”
“예?”
“지영이도 똑같은 말을 하더구나.”
“이사님이요?”
“그래. 그리고 지영이는 이사님이 아니고 누나다. 네 누나.”
“뭐든 상관없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원지훈 부장을 만나서 판단해 주삽쇼. 직원들이 가장 따르는 사람으로 그를 회장님 편에 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생각해 보마.”
김상만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 * *
체했나?
해장국을 먹은 것이 영 소화가 되지 않는다.
나는 노란 서류 봉투를 책상 서랍에 넣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
띠띠띠틱!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이진성 차장과 최충연 팀장이 들어왔다.
“어우, 술 냄새! 너 술 먹었냐?”
이진성 차장이 코를 틀어막고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그러게 아주 그냥 술독에 빠져 사나 보네.”
최충연 팀장 또한 맞장구를 치면서 미간을 구겼다.
“왔어요?”
“그래. 어제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기억 안 나요.”
“누구랑 마셨는데?”
“지훈이랑.”
“원 부장님?”
최충연 팀장은 지훈이의 열정적인 팬이다.
지훈이의 학창 시절 얘기가 나오면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주말에 너 혼자 있을까 봐, 걱정돼서 말이야. 야, 피파나 한판 때리자.”
“또 피파?”
“응, 빨리 세팅해!”
이진성 차장은 두 달 전쯤에 이혼했다.
그때 이후로 우리 집에 와서 술과 게임에 빠져 살았다.
“태하야. 어제 그럼 원 부장님도 술 이빠이 먹은 거야?”
지훈이 팬클럽 1호 최충연 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엄청 퍼먹었죠.”
“전화해 봐. 혹시 시간 괜찮으면 해장국이라도 하러 오시라고.”
“지금이 몇 신데요. 일어나서 처먹었겠죠.”
“아니야. 전에 마 팀장한테 들었는데, 집에 편의점 도시락이랑 레토르트들만 가득하다고 하더라.”
알아서 잘하는 놈이라고 알고 있는데…….
밥 먹는 것은 대충인가 보구나.
최충연 팀장의 말에 갑자기 지훈이 놈이 걱정됐다.
“정말요?”
“응, 맞다니까.”
“그럼 불러서 해장국이라도 먹일까요?”
“그래. 힘들다고 하면 우리가 포장해서 가도 되고.”
최충연 팀장의 말에, 이진성 차장이 한 손을 올리며 반대의 의견을 말했다.
“난 안 됨. 피파해야 함.”
“이 배신자 돌싱 새끼. 고 부장 밑에서 차장질 하니까 좋으냐?”
“거기서 돌싱이 또 왜 나와?”
“네가 그렇게 배신을 밥 먹듯이 하니까, 제수씨가 재수 없다고 이혼한 거야.”
“아니라고!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다고!”
“뻥치시네. 이 재수 없는 돌싱 배신자 새끼.”
“얼마 내기 할래? 응? 얼마 내기 할래?”
“한 달 치 월급 몰빵 한번 해 봐?”
“어쭈? 진짜지? 나중에 울고불고하기 없다!”
최충연 팀장과 이진성은 또 티격태격이다.
나는 둘이 한바탕 하는 사이, 테이블 위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훈아.”
– 왜?
“또 왜냐?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여보세요라고 하는 거라고 했지?”
– 여보세요.
“그렇게 전화 받으니까 얼마나 좋아? 밥은 먹었어?”
– 아니 방금 일어났어.
“그래? 그럼 우리 집에 올래? 해장국 시킬 건데.”
– 왜?
“충연이 형이랑 진성이 형 왔거든. 그리고 너한테 줄 선물도 있고.”
회장님께 받은 7%의 주식을 말하려 했다.
– 그래?
“응, 해장국 시킬 테니까 빨리 와. 오랜만에 피파나 하자.”
– 그래.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전화를 끊자, 최충연 팀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뭐래? 오신데?”
“네. 온답니다. 그나저나 요새 지훈이놈 여자 만나는 거 같던데요?”
“오…….”
“네. 어제 술 먹는데 선녀가 어쩌고저쩌고 하던데요?”
“선녀? 흠……. 취향이 좀 독특하군. 선녀라……. 요즘도 여친에게 그런 애칭을 쓰나?”
“그럼 설마 이름이 선녀겠어요. 하하하.”
“하긴.”
우린 함께 웃고, 해장국 세 그릇을 주문했다.
체한 것 같은 나는 소화제를 한 알 먹고, TV에 게임기를 연결했다.
잠시 후, 지훈이와 해장국이 같이 도착했고.
나는 최충연 팀장에게 상을 차려 달라고 하고, 지훈이를 방으로 데려갔다.
“왜?”
“또 왜지? 넌 친구한테 할 말이 그거 밖에 없냐?”
“나 속 쓰려.”
“그것보다 이거 좀 봐.”
나는 서랍에 있는 노란 봉투를 꺼내 지훈이에게 내밀었다.
지훈이는 봉투를 잡고, 안의 서류를 꺼내서 확인했다.
“이게 뭐야?”
“회장님이 주셨어. 처음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받았다.”
“나 때문에?”
“응, 다음 주 금요일에 주총이지? 내가 그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감동이지 이 자식아?
내가 널 이렇게 특별히 생각하는 친구다.
자, 와서 안겨라.
나는 양팔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미안하다. 진작 네 취향은 알았는데……. 받아주는 건 좀 힘들겠다.”
“뭐?”
“난 여자가 더 좋다고.”
“뭔 개소리야?”
지훈이 이놈은 언제나 내 머리 위에 있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고, 조용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맙다. 대신 내가 좋은 남자 소개해 줄게.”
“너 연애하지?”
“응?”
“너 어제 술 먹다가 선녀가 어쩌고저쩌고 했잖아?”
“내가?”
깜짝 놀란 표정의 원지훈.
요놈 봐라. 진짜 만나는 여자가 있긴 하구나.
이번엔 내가 이겼다.
근데 촌스럽게 여친의 애칭을 선녀라고 하다니…….
두고두고 놀려 주마.
“내가 확실히 기억하거든? 네가 술 먹으면서 선녀가 어쩌고저쩌고 했던 거!”
“사실은…….”
“사실은 뭐? 뭐?”
내가 다그치자, 지훈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선녀 여사님이야.”
“뭐? 진짜 이름이 선녀야?”
“응.”
“여사님은 또 뭐고? 너 유부녀 만나냐?”
“뭔 개소리야. 김선녀 여사님 몰라?”
지훈이는 책상에 걸터앉아, 그동안의 얘기를 해 줬다.
강남의 큰손 김선녀 여사와 최구열 이사와의 관계.
그리고 자신이 갖게 될 지분과 목표까지도.
힘들었겠구나.
이놈은 그 힘든 싸움을 지금까지 혼자 해 왔구나.
미안했다.
그동안 아이처럼 장난만 치고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내가 미안했다.
나는 말없이 지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때.
“자자! 부장님 나와서 해장하세요! 제가 양념 새로 해서 더 맛있을 겁니다.”
최충연 팀장이 방문을 벌컥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훈이는 밖으로 나가며, 내 등을 쓰다듬고 환하게 웃었다.
지훈이는 도련님 소리를 듣던 나를 혼내는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저놈의 웃음이 좋다.
저 표정은 자식을 걱정해 주는 아버지 같고, 나이 차이가 많은 형이 보듬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내내 저놈과 붙어 다녔다.
저 표정을 보고 싶어서.
“야 같이 가!”
“너 체했다면서?”
“그래도 맛은 봐야지.”
나는 지훈이의 어깨를 감싸고, 함께 식탁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