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09
109. 부장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같이 가자! 응?”
내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김태하 팀장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안 돼.”
“넌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내가 뭐?”
“불쌍하지도 않아? 얼마나 따신 밥이 그립겠어? 응?”
최근에 돌싱이 된 이진성 차장의 얘기다.
김태하 팀장은 이진성 차장의 생일을 맞아,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가 생일상을 차려 주자고 했다.
괜찮은 서프라이즈 파티 계획이지만, 제조사와 잡힌 저녁 약속 때문에 거절하는 중이었다.
“너 진짜 안 갈 거야?”
“약속 있다니까.”
“실망이다. 난 우리 원 부장님이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삼덕식품이랑 저녁 약속이라고!”
“선녀 씨가 삼덕에 다녀?”
나는 그의 말에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개소리야.”
“얼래? 화내는 거 보니까 더 이상한데?”
“뭐가?”
“아무리 봐도 이상해. 너 진짜 선녀 씨…….”
말끝을 흐리며, 눈을 흘기는 김태하 팀장.
김선녀 여사가 강남의 재력가라고는 전에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시간만 나면 선녀가 내 애인의 애칭이라며 놀려 댔다.
“어후. 맘대로 생각해라.”
“어……. 이거 봐라? 진짜인가 본데? 그럼 선녀 씨랑 같이 오든가.”
“개소리가 아주 풍년이구나. 여사님이 거길 왜 가?”
“뭐야? 그새 선녀에서 여사님으로 애칭을 바꾼 거야?”
내 팔을 쿡쿡 찌르며 집요하게 장난을 치는 김태하 팀장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미팅 갔다 온다.”
“그래. 아직 시간 있으니까 잘 생각해 봐. 그래도 우리 부장님이 와 주시면 좋잖아. 응?”
* * *
오후 7시 이진성 차장의 집 앞.
김태하, 최충연 팀장과 가전 팀의 박호영 팀장, 김인서 대리, 김동우, 김영신.
그리고 나.
총 7명이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삼덕의 제조 공장에서 사고가 터지면서 약속을 취소됐고, 김태하 팀장이 집으로 가려는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여기야?”
내 질문에 김태하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좀 그렇지?”
회사 인근의 오래된 오피스텔.
갈라진 벽에 배달 스티커 조각들이 요란하게 붙은 현관문은 이진성 차장의 집안 사정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자자, 다들 해야 할 일 알지?”
이번 파티를 주도했던 김태하 팀장이 함께 온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이곳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게 각자에게 임무를 나눴다.
주로 요리와 청소에 대한 것이었고, 내게 주어진 임무는 거실 청소였다.
우리 집 거실도 지저분한데…….
“차장님은 확실히 9시 이후에나 오시는 거죠?”
김인서 대리의 질문에 김태하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가 다 손을 써 놨어.”
이진성 차장은 거래처의 미팅을 마치고 9시에나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는 파티 준비를 위해 거래처에 미팅 시간을 끌어 달라고 요청한 김태하 팀장 덕분이었다.
함께 온 최충연 팀장은 장을 본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도어락의 번호키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홀아비가 풍기는 치명적인 그 향이.
“아…….”
함께 온 인원들이 동시에, 진한 냄새에 미간을 구겼다.
“이거 사람 사는 집 맞죠?”
“너무하네! 진짜. 저 소주병들은 수집하는 걸까요?”
정색하는 사람 중,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었다.
1년 전에 이혼을 한 박호영 팀장.
그는 코를 킁킁대며 짙은 수컷의 향을 느꼈다.
“걱정했는데, 다행히 호르몬 수치는 정상인가 보네요.”
나는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작은 거실로 걸어갔다.
언제 먹은 것인지,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피자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것도 5조각이 남은 채로.
치우기 위해 피자 상자를 들자, 밑이 젖어 버린 상자가 찢어져 버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피자 조각들이 먼지가 가득한 바닥을 뒹굴었다.
“헛.”
내 단말마를 들은 박호영 팀장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피자가 화석이 되기 직전이었군요.”
“호영 팀장도 이래?”
“저는 이미 절망의 단계를 지났습니다. 이 차장님도 빨리 내려놓으셔야 편해질 텐데.”
“절망의 단계라…….”
역시 이혼 선배라 그런지, 박호영 팀장은 이진성 차장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이진성 차장의 집은 완벽한 지뢰밭이었다.
물을 마셨던 컵은 누런 물때가 가득한 상태였고, 냄비 안의 형체 모를 음식은 썩은내를 풍기고 있었다.
“으헛!”
바닥을 뒹굴던 리모컨을 밟은 김영신이 괴성을 지르며 자빠졌다.
“리모컨을 왜 여기다 던져 놓은 거야? 아, 진짜 이해가 안 되네.”
김동우는 김영신을 일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소파 위의 누렇게 바랜 이불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부장님. 이거, 어제 차장님이 덮고 잔 이불이겠죠?”
나는 손가락 두 개로 이불을 집어 올리며 답했다.
“아 몰라!”
들려오는 이진성 차장의 기억.
호날두에 판교까지, 아주 오래전의 것이다.
대부분 제품을 닦거나 빨 때 기억이 지워지는데.
이 이불은 도대체 얼마 동안 빨지 않은 것인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불을 빨래통 안에 넣었다.
“자자 서두릅시다!”
김태하 팀장의 독려로 모두가 속도를 올렸다.
청소하는 인원들은 땀을 비 오듯 쏟아 냈고, 요리하는 최충연 팀장과 김인서 대리는 하나씩 음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TV 진열장 위의 볼펜 뭉치를 서랍에 집어넣는 순간.
쓸데없고 오래된 기억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정근영 대표의 목소리다.
1년 전, BO 커머스의 법인이 만들 때의 기억인 것 같은데…….
그리고 이 볼펜은 아마도 정근영 대표의 아들인 정진택 팀장을 통해 딸려 왔을 확률이 높다.
나는 정근영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는 볼펜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BO 커머스 법인을 만들 때쯤의 기억인가?
그리고 분명, 김선녀 여사의 이름을 말했다.
정근영 대표 또한 그녀의 돈을 가져다 쓴 것일까?
김상만 회장, 정근영 대표, 최구열 이사 전부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까지 손을 뻗어 둔 것인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태하야,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농땡이 부리는 건 아니지?”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김태하 팀장.
나는 그의 눈빛을 무시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최 실장님!”
최근에 내 사람이 된 최문식 실장.
그는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네. 부장님.
“퇴근하셨어요?”
– 네. 방금 최 이사님 모셔다드리고 왔습니다.
“혹시 제가 말씀드린 건 확인해 보셨나요?”
내 질문에, 최문식 실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 아직 못했습니다.
“회장님은 물론이고, 정근영 대표님도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정 대표님도요?
“네.”
– 부장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실장님. 금요일 오전까지는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 네. 서두르겠습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 우리의 땀과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처음 입주한 것 같은 깨끗한 실내와 미리 사 온 향초가 방안의 홀아비 냄새를 지워 줬다.
상 위에는 미역국과 잡채, 전, 갈비찜, 떡갈비, 군만두, 해물탕까지.
마켓 프레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레토르트들을 예쁜 일회용 접시로 옮겨 담았다.
그때.
삐삐빅!
현관문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에 우리는 재빨리 현관에서 안 보이는 거실벽 뒤로 몸을 숨겼다.
“어?”
이진성 차장은 확 바뀐 집을 보고 멍하니 섰다.
우린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았고, 어느새 고깔모자까지 쓴 김태하 팀장이 크게 소리쳤다.
“이진성 차장님 생일 축하합니다!”
김동우와 김영신은 재빨리 이진성 차장의 가방을 받아 들었고, 박호영 팀장은 음식이 차려진 상을 가리켰다.
“요리는 충연 팀장님과 인서 대리님이 하셨습니다.”
이진성 차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부끄러운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제가 아니라 김태하 팀장의 아이디어입니다.”
“아…… 그래요? 고마워, 태하야.”
“송림에서 미팅을 질질 끌어서 놀라셨죠?”
“네가 그렇게 한 거야? 어쩐지, 김 이사가 쓸데없는 말만 질질 끌더라.”
“하하하, 김 이사님 힘드셨겠네.”
“놀랐다. 처음에는 와이프가 다시 온 줄 알았어.”
와이프라는 말에 금세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선배 이혼남 박호영 팀장은 이진성 차장의 어깨에 손을 감싸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홀로서야 합니다.”
“그래. 요새는 진짜 호영이밖에 없다.”
“자, 식사하시게 손 먼저 씻고 오세요.”
우린 큰 상에 둘러앉았다.
술과 음식이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하나둘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진성 차장은 기분이 좋았는지, 주는 술을 다 받아먹으며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이거 전부 다 레토르트지?”
요리한 최충연 팀장은 이제 알았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어?”
“술이 좀 들어가니까 알겠네. 떡갈비가 춘자 푸드 제품인가?”
“맞아.”
“요즘은 진짜 레토르트도 직접 만든 거 같이 잘 나오네.”
이진성 차장은 떡갈비를 오물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박호영 팀장이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차장님.”
“응?”
“요새는 맛집 투어 안 다니십니까?”
“와이프도 없고…… 맛있는 거 먹는 낙이 사라졌잖아.”
“새 출발하셔야죠.”
“새 출발은 혼자 하냐? 그리고 지금 이 꼴로 무슨…….”
“차장님이 뭐가 어때서요? 대기업 차장에, 얼굴도 이 정도면 쓸만하고!”
“정말 쓸만해?”
“당연히 쓸만하죠! 혹시 길거리 캐스팅 같은 거 안 받으세요?”
농담이 과하다.
박호영 팀장은 술도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이진성 차장은 박호영 팀장의 칭찬에 흐뭇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여자인 김인서 대리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인서 대리가 지금 홍일점이네. 인서 대리. 내가 진지하게 묻는데.”
“…….”
“여자들은 왜 날 몰라주는 걸까? 이렇게 잘난 나를 말이야.”
“그……. 글쎄요.”
“우리 재미있는 것 좀 해 볼까?”
“네?”
“이상형 월드컵, 어때?”
“에이. 뭘 그런 걸 해요?”
김인서 대리가 손을 휘휘 저으며 거절의 표시를 했지만, 이진성 차장은 나를 힐끔 보고는 곧바로 게임을 시작했다.
“이진성, 원지훈 부장님!”
잠시 망설이던 김인서 대리는 술잔을 비우고, 환하게 웃었다.
“이거 뒤탈 없는 겁니다.”
“물론이지! 나 원래 쿨한 거 잘 알잖아.”
“딩얂; 원지훈 부장님이죠.”
취했는지, 이진성 차장은 히죽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만해! 역시 돌싱은 안 된다는 거지?”
“뒤탈 없기로 하셨잖아요. 그리고 이건 돌싱의 문제가 아닌데요?”
“아, 몰라!”
“솔직히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되잖아요. 회사에서 여직원들 원픽이 원 부장님인 거 모르세요?”
김인서 대리까지 취했나 보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무안을 주고……
나는 무안해진 분위기에 헛기침을 하며 베란다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진성 차장은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좋으시겠어요.”
“취했어요? 차장님까지 왜 그래요?”
“하늘은 참 불공평하네요. 누군 얼굴에 능력까지 주고…….”
“자자 그만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들 취한 것 같아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모처럼 가진 술자리에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까지 하며 난리였다.
오피스텔 관리실에서 민원이 들어왔고, 우린 그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와 입고 있던 외투를 소파 위에 벗어놨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보는 순간, 장문의 톡이 도착해 있었다.
—
부장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정근영 대표님도 3년 전에 여사님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내일 오후까지 대략의 금액과 조건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문식 실장
—
3년 전이라면 BO 커머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다.
그때부터 김선녀 여사가 회사에 관여했구나…….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