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10
110. 누가 그러더군요
* * *
주주총회 D-1.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
“내가 찬성하면 넌 이사가 될 수 있어. 나랑 동등해지는 거지. 아주 잠깐은…….”
“…….”
“대신 나에게 보답을 해야 해. 그 보답이 뭔지 알아?”
“…….”
“충성심.”
가진 패가 좋지 못함을 인지한 사람은 두 종류의 행동을 보인다.
머리를 숙이거나, 오히려 자신감을 보이는.
최구열 이사는 둘 중 후자였다.
“내일 주총에서 뵙겠습니다.”
“원 부장!”
내가 등을 돌리자, 그는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원지훈!”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1년 전만 해도 최구열 이사는 태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의 자서전을 보고 MD가 됐고, 책을 보고 그를 따라 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자신을 존경했던 사람에게.
나는 고개를 돌려 최구열 이사를 바라봤다.
허망한 표정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처럼.
밖으로 나와, 나를 바라보는 최문식 실장과 시선을 교류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건물 옥상의 뒤쪽으로 올라갔다.
10분이 지나자, 최문식 실장이 작은 철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잘하셨습니다.”
“들으셨나 보군요.”
“네. 그게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오늘 일도 여사님께 보고하실 겁니까?”
“아니요.”
그는 얼마 전까지 김선녀 여사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의 물건들을 통해 많은 기억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 생활을 끝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힘들었을 것이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그는 외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가족의 생계를 이어 줄 도구로 선택한 것은 주식 투자였고, 난 그에게 가능성을 보여 줬다. 지금까지 해 오던 것들을 그만둘 수 있는 가능성을.
“여사님이 움직인 겁니까?”
“네, 여사님의 내용 증명이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부장님이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하려고 부르신 듯합니다.”
대충은 예상했다.
뜬금없이 아침부터 자신의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할 때부터.
“이사님은 어떻게든 여사님과 풀어 보려 할 겁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제가 요청한 것은 알아봤습니까?”
“네, 지원팀에 친구놈이 있어서 알아봤는데, 이게 좀 복잡하더군요.”
최문식 실장은 주변을 살피고, 내 옆으로 더 바짝 달라붙었다.
“차명으로 회장님과 대표님을 지원하셨는데, 한 분은 이현아 대표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저도 이름만 들어 본 분입니다.”
“이름이 뭡니까?”
“임성수라고 하는데 들어 보신 이름인가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나는 그냥 김선녀 여사의 지인일 것으로 생각하고, 질문을 이어 갔다.
“처음 듣습니다. 실장님 혹시 자세한 금액은 알 수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지자, 최문식 실장이 나를 불렀다.
“부장님.”
“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내일이면 9%가 추가로 등재될 것이고, 20%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금만 그렇죠.”
최문식 실장은 이런 일을 많이 해서,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다.
그는 내가 지금이 아닌, 다음을 생각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지금의 것도 잃을 수 있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진지한 표정의 그에게 물었다.
“최구열 이사처럼요?”
“네.”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최문식 실장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주총회 D-DAY.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의 김상만 회장과 정근영 대표.
긴장을 숨기는 김지영 이사와 김태하 팀장.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걸어가는 김재열 사외이사.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최구열 이사.
그들은 각자 다른 얼굴을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 들어가는 내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원지훈!”
예전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진 이정우 이사였다.
베이지색 슈트에 행커치프까지 꽂은 그는 촐싹대며 내 팔과 옆구리 사이로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같이 가자, 좀.”
“좋아 보이네요.”
“응.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해. 그나저나 너!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이곳에 오기 전에 주주 명부를 확인했나 보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전에 김선녀 여사 쪽에서 나온 법무사는 최구열 이사를 지지하던 주식을 내 앞으로 변경한 후, 바뀐 주주명부를 확인하고 곧바로 돌아갔다.
과정은 어려웠지만, 결과가 너무 간단해서 허무할 정도였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네요.”
“최구열 지분이지?”
“확인했으면서 뭘 물어요?”
“잘했다. 이 미친놈아.”
“고맙습니다.”
이정우 이사는 내 앞을 막아서며,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내 슈트와 넥타이를 정리해 주며 말을 이었다.
“가자 싹 다 엎어 버리러.”
“그러죠.”
BO푸드의 대회의실.
주주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김재열 사외이사가 단상의 구석에 섰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BO 커머스의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안건은 원지훈 부장의 이사 선임 건입니다. 찬반 투표를 하기 전에, 하실 말씀이 있는 분은 말씀해 주세요.”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던 최구열 이사마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김재열 이사는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바로 거수로 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4%의 김재열 이사가 가정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7%의 김지영 이사와 7% 김태하 팀장, 1%의 이정우 이사가 차례로 손을 올렸다.
곧바로 20%의 내가 손을 들었고, 나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던 21%의 김상만 회장이 손을 들었다.
이로써 60%.
김재열 이사는 환하게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총 60%의 찬성으로 원지훈 이사의 선임 건은 가결되었습니다.”
마켓 프레시의 이사.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첫 번째 목표를 이뤘다.
나는 책상 밑의 주먹을 불끈 쥐었고,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떨궜다.
정근영 대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눈을 감고 조용히 다음을 기다렸다.
“다음은 대표이사의 해임에 대한 의견을 듣겠습니다. 먼저 의견이 있으신 분은 거수 후에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힘없이 손을 든 최구열 이사.
김재열 사외이사가 지목하자, 그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마켓 프레시가 오픈할 당시만 해도 식품군의 카테고리만으로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정근영 대표님입니다. 그런 대표이사님을 상장 전에 해임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제 노선을 확실히 정했구나.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정근영 대표를 바라봤다.
눈을 감은 그는 이미 패배를 예상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나쁜 감정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표이사가 필요하다.
내가 손을 들려고 하는 순간, 김상만 회장이 먼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실리를 포기하고 도의를 택하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실리와 도의를 모두 잡겠다는 겁니다. 새롭게 유입되는 주주들은 우리의 지난 실적을 보고 판단합니다. 지금 대표이사가 해임된다면, 그들은 회사의 임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구열 이사의 말에, 김상만 회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누가 그러더군요. 주주들을 움직일 힘은 과거의 답습이 아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저건 내가 했던 말이다.
김상만 회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김지영 이사의 대표이사 선임이 이뤄질 것을.
“회장님, 과거가 없었다면 만들어질 미래도 없는 법입니다.”
최구열 이사는 김상만 회장을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줬다.
하지만 태연한 표정의 김상만 회장은 코웃음 치며 물었다.
“그래요?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
“이사님은 마켓 프레시가 상장하기 전까지 얼마나 더 성장할 거라 보십니까?”
이 또한 김상만 회장이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나는 그때 당당히 두 배의 성장을 자신했었다.
과연 최구열 이사는 뭐라고 답할까?
모든 주주의 눈이 최구열 이사의 입에 몰렸다.
“지금 성장세를 놓고 계산해 봤을 때, 20%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표만 놓고 보면 최구열 이사의 답이 맞다.
하지만 이는 원하는 답이 아니다.
김상만 회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그럼, 전 과거보다는 미래를 선택하겠습니다. 김재열 이사님 투표를 진행하시죠.”
김재열 사외이사는 옅은 미소를 보이고,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그럼 곧바로 거수하겠습니다. 정근영 대표님의 해임에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가장 먼저 손을 든 21%의 김상만 회장.
그 뒤를 따라 4%의 김재열 사외이사와 7%의 김지영 이사가 미안한 표정을 하고 손을 들었다.
이로써 32%.
그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보며, 내가 손을 들기를 기다렸다.
그때,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는 21%의 정근영 대표.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을 하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과반을 넘었군요. 김 이사님 다음 안건으로 가시죠.”
김상만 회장이 손을 들었을 때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체념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구열 이사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반대하는 비참한 상황을 만들기까지는 싫었던 것 같았다.
김재열 이사도 이를 느끼고 재빨리 다음 안건을 읽었다.
“다음 안건은 새로운 대표이사 선임에 대한 것입니다. 후보로는 김지영 이사님만 계시니, 거수로 찬반을 투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혹시 하실 말씀이 있는 분은 지금 말씀해 주세요.”
조용한 회의실.
최구열 대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마이크를 타고 전해졌고, 주주들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최구열 이사님.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김재열 사외이사의 질문에, 최구열 이사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제가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손을 살짝 올린 김상만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짓고, 곧바로 김지영 이사를 바라봤다.
“김지영 이사님은 마켓 프레시가 상장 전까지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배 이상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김지영 이사.
그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나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 PB와 신규카테고리에 대해 자주 논의했고, 자연스럽게 내 확신이 그녀에게 옮겨 간 것이다.
“그렇군요.”
김상만 회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은 최구열 이사와 정근영 대표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럼 거수를 진행하겠습니다.”
김재열 사외이사의 말이 끝나고,
20%의 나와 4%의 김재열 이사, 7%의 김지영 이사, 7%의 김태하 팀장이 동시에 손을 올렸다.
이로써 38%
마지막으로 김상만 회장이 손을 올려 찬성의 뜻을 밝혔다.
“총 60%의 찬성으로 김지영 이사가 새로운 대표이사로 취임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