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14
114. 제가 힘써 드린다고 했잖아요
앞에 놓인 400mL의 작은 생수병.
나는 재빨리 생수병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천천히 뚜껑을 열며, 진삼 차동연 부장의 조금 전 기억을 들었다.
뭘 꺼내겠다는 거지?
이번 협상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단편적인 기억을 놓고 수많은 가정을 세워 봤다.
하지만 부족하다.
너무 작은 기억이라 어떤 가정도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나는 일단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볼 생각을 하고, 고개를 돌려 김한솔 대리를 불렀다.
“한솔 대리님. 계약서 사본 가져온 거 있죠?”
“네.”
“차 부장님 한 부 드리고, 저도 주세요.”
“알겠습니다.”
김한솔 대리가 양쪽에 계약서를 나눠 줬다.
나는 계약서의 세 번째 장을 펼친 후, 차동연 부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부장님께서 계약 위반이 아니라고 하시니, 저희도 그럼 계약서에 적힌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
“8조 3항. 지정된 납품 시기를 초과할 경우 을은 30퍼센트의 가산금을 지급한다.”
침착하고 정확한 내 어조에 차동연 부장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곧바로 이전과 같이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계약 기간은 4개월이나 남았습니다. 우린 그 기간 동안 차질 없이 입고할 예정입니다.”
“연휴 이후의 재고로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모르죠. 일단 우리는 계약서에 명시된 일정에 맞춰서 입고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다음 장을 넘겨 새로운 조항을 읽었다.
“11조 2항. 제품의 오염이나 손상이 있을 때 갑은 을의 입고를 거부할 수 있으며, 을은 갑이 거부한 제품을 제외하고 재입고를 해야 한다. 계약서 좋아하시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아시겠죠?”
“…….”
이는 계약서에 통상적으로 들어가는 항목이다.
하지만 이를 새롭게 해석하면, 우리가 진삼의 제품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테이블 옆의 티슈를 뽑아 만지작거리는 차동연 부장.
간혹 이런 사람이 있다.
미팅 중에 노트에 낙서를 하거나, 영수증이나 휴지로 종이를 접는.
나는 티슈 한 장을 꾹꾹 눌러 접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입고를 거부하면 진삼의 제품은 공중으로 뜨게 되겠죠.”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은 재고가 아닌, 오염이나 손상이 있을 경우입니다.”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차동연 부장.
하지만 틀렸다.
제품의 오염과 손상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다.
“상자 모서리에 흠집이 있는 제품을 구매한 회원님들의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그런 제품을 받습니까?”
“…….”
“제품의 오염을 판단하는 것은 진삼이 아닌 저희 마켓 프레시입니다.”
“저희 제품을 일부러 받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 두고 봐야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계약서를 악용하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계약서로 돌려준다.
내 말에 박대영 차장과 김한솔 대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차동연 부장은 30퍼센트의 가산금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차동연 부장은 안경을 벗어, 만지작거리던 휴지로 안경의 표면을 닦아내며 말했다.
“계약서 15조 4항. 을은 계약이 종료되더라도 갑의 서비스 연속성을 위해 최소 3개월의 유예 기간을 둔다. 이 계약서에는 최소만 명시되어 있고, 최대는 명시되어 있지 않네요.”
전략 기획부에서 만든 허점투성이의 계약서.
이래서 내 협박에 태연했구나.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계속해서 물류를 이동하면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계약이 종료하지 않으면 진삼이 손해입니다.”
“물류비용이 얼마나 한다고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프에서도 우리 물류를 검수할 인건비가 들어가니까 퉁치는 거로 하죠.”
이게 부장을 달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인가?
다시 조목조목 계약서를 따져서 붙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럼 끝나지 않는 싸움을 되풀이하는 것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새로운 약점을 찾아야 한다.
생수병에서 들었던 기억은 무슨 뜻일까?
뭐를 꺼내 보겠다는 말일까?
나는 생수병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계약서 사본을 찢어 버렸다.
“우리 끝나지도 않을 싸움은 그만합시다.”
“그럴까요?”
차동연 부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나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그의 앞에 있던 계약서를 도로 가져왔다. 그리고 계약서 종이에 담긴 그의 기억을 들었다.
쉽게 가자라…….
간혹 이런 경우가 있다.
성수기를 맞이해서 물량의 확보가 급한 유통사가 추가로 대금을 지급하거나, 제품의 공급가를 변경해 준다. 그리고 홍삼 제품군의 생산 물량이 적은 올해는 더더욱 다른 오픈마켓이나 마트들에서 추가 대금을 지급했을 확률이 높다.
우선 지금은 이를 확인해야 한다.
“에이마켓은 홍삼 제품 확보하려고 예산을 많이 잡았다더군요.”
“아 그래요?”
“네. 제가 듣기론 60억 정도를 추가 예산으로 책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표정의 변화가 없는 차동연 부장.
강적이다.
대부분은 약간의 표정 변화라도 있는 편인데,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럼 더 밀어붙여야 한다.
최대한 그의 표정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에이마켓에서 진삼에는 얼마 안 썼나 보죠?”
“아니요. 저희도 제법 받았습니다.”
“인삼인이라고 아시죠?”
“네.”
“이번 설 기간에 홍삼제품만 수수료 조정을 받았다네요.”
“네. 그렇겠죠.”
“그리고 천삼은 디파짓까지 받았다던데요?”
“그렇군요.”
보통 이 정도의 강수를 던지면, 반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차동연 부장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가 만지작거리는 티슈 조각을 물끄러미 봤다.
저 티슈 조각에는 많은 기억이 있을 텐데.
나는 테이블 위의 손을 옆으로 틀며, 생수병의 남은 생수가 쏟아지도록 했다. 마치 크게 당황한 담당자가 실수한 것처럼.
주르륵!
생수병의 작은 주둥이로 물이 새어 나오고,
순식간에 테이블이 흥건해졌다.
차동연 부장은 재빨리 티슈를 여러 장 뽑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가 건넨 티슈를 받으며,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이 쏟아진 물에 팔린 사이,
그가 만지작거리던 티슈 조각을 오른손으로 쥐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내 도발이 먹혔구나.
그럼 이제 둘 중 하나다.
회사로 받길 원하는지, 개인이 받길 원하는지.
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이번 게임은 너무도 쉽게 끝낼 수 있다.
나는 씩 웃으며 물기를 흡수한 티슈를 휴지통에 버렸다.
“죄송합니다. 이런 실수 잘 안 하는데……. 하하하“
“새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부장님 혹시 담배 태우세요?”
내 질문에 차동연 부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나가서 한 대 피우고 오죠. 긴히 드릴 말씀도 좀 있고.”
“네. 그러죠.”
“차장님, 잠깐 부장님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나는 박대영 차장과 김한솔 대리를 회의실에 남겨 두고, 차동연 부장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사람이 아무도 없는 흡연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가 없는 것처럼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자 차동연 부장은 자신의 라이터를 켜서, 내게 들이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라이터에서 들려온 기억으로는 아직 명확히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후자의 경우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그래야 더 쉬워질 수 있으니까.
“설에 어디 가세요?”
“본가에 내려갑니다. 부장님은요?”
“전 그냥 집에서 굴러다닐 겁니다. 차 부장님은 본가가 어디세요?”
“부산입니다.”
“와. 부산 좋죠. 부산 언제 가야 하는데.”
“언제 가실 때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아는 맛집들 리스트 드릴게요.”
“오! 현지인 맛집이라는 겁니까?”
차동연 부장은 고향 얘기가 나오자, 이전과는 다르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일부러 부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신이 나서 답을 했다.
“티켓은 예약하셨어요?”
“예매 못 했습니다. 비행기, KTX 전부 다 풀이더군요.”
“그럼 자차로 이동하시게요?”
“네. 아마도 그럴 거 같아요.”
“아 운전하기 힘드실 텐데.”
“뭐 어쩔 수 없죠.”
“아 참, 그거 아세요? 요새는 명절에 부산까지 싸게 대리운전을 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부산에 가야 할 기사님이 조금 덜 받고 가는 거죠.”
“그거 괜찮은 서비스네요. 얼마나 할까요?”
갑자기 예상하지 않던 돈이 생긴 사람은 안 해 본 것을 해 보고 싶어 한다.
지금의 차동연 부장처럼.
“아마 20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오……. 생각보다 비싸지 않네요.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안 그래도 운전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는데.”
“이번에 보너스 많이 나왔나 보죠?”
“보너스 좀 받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요거 봐라?
차동연 부장은 내가 살갑게 대하자, 곧바로 이에 응해 줬다.
마치 나와 친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
이제 90퍼센트 이상은 확실하다.
차동연 부장은 회사가 아닌 개인의 리베이트를 원한다는 것이.
“제가 힘 좀 써볼까요? 그 보너스 나갈 수 있도록.”
이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내 돌발 발언을 들은 차동연 부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인가요?”
보통 리베이트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고마움을 표하거나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고 하는 것이 정상인데…….
역시 쉬운 사람은 아니구나.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 설에는 홍삼 제품들이 씨가 말랐잖아요.”
“…….”
“에이마켓이 어떤 조건을 제시했을지는 저도 대충 압니다.”
이 또한 두리뭉실한 말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목적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요? 하핫.”
차동연 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담배를 따라 꺼내 물고, 그에게 다시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했다.
회사가 마프랑 이어지는 것을 선호한다라…….
차동연 부장이 아닌 다른 사람과 협상을 한다면 쉬워질 거라는 말이구나.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거래처에서 셋이나 왔는데, 혼자 상대를 한 이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웠는데, 이를 여유롭게 받아친 이유.
물류가 발생하면 회사 손해가 분명한데도, 이를 묵인하려 했던 이유.
이제 끝내야겠구나.
나는 담배를 문 채로,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왜?
“저번에 진삼 천 대표님이랑 필드 나가셨죠?”
– 응? 진상? 천 대표가 누군데 진상이라는 거야?
“천 대표님한테 차동연 부장님 설 보너스 좀 주라고 하세요. 이렇게 돈 좋아하시는 분한테 도대체 뭐 하는 겁니까?”
– 너 또 전화로 장난질 치는구나?
내 수법을 잘 아는 김재열 사외이사가 실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그리고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차동연 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잘 아시네.”
– 자, 시작해 봐. 열심히 맞춰 줄 테니까.
“오죽했으면 에이마켓에서 설 보너스를 다 챙겨 주겠습니까?”
– 오. 에이마켓, 좋은 회사네. 남의 직원 보너스도 챙겨 주고.
“이사님 잊지 말고, 진삼 천 대표님께 꼭 전화 넣어 주세요.”
– 오케이!
내가 전화를 끊자, 차동연 부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두리뭉실한 계약서와 두리뭉실한 말.
이는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차동연 부장은 개인의 이득을 위해 이를 악용했고, 나는 우리의 이득을 위해 이를 이용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왜요? 제가 힘써 드린다고 했잖아요.”
“…….”
“부장님. 조만간 천 대표님이 보너스 아니면 퇴직금을 준비해 주실 겁니다. 아……. 그리고 부산에 저도 아는 맛집들 많으니까 리스트는 필요 없습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차동연 부장.
이제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마켓 프레시에 물량을 내주거나,
끝까지 에이마켓을 고집하며 퇴직금을 받거나.
나는 씩 웃으며, 재떨이에 담배를 껐다. 그리고 씩씩대는 그를 흡연실에 홀로 남겨 둔 채로 박대영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장님. 내려오세요. 여기는 상황 종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