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15
115. 뭐 그럭저럭 볼 만합디다
* * *
“선애 씨! 이사님 메이크업 좀 봐 줘!”
“조명 팀! 반사판 확인 안 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30여 명의 사람들.
방송이 아닌, 유튜브 촬영 현장에도 이렇게 스텝이 많을 줄은 몰랐다.
오늘의 주인공은 김지영 이사.
BO푸드 홍보팀은 그녀에게 역동적이고 친근한 여성 CEO의 이미지를 입히기 위해 각종 스케줄을 만들어 냈다.
이전에도 방송과 인터뷰의 경험이 많아서 잘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녀는 아침 첫 스케줄부터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김지영 이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화장이 짙어서 그래. 회사는 어쩌고?”
“연차 냈지.”
“나 때문에?”
“응, 오늘은 우리 지영이 매니저 좀 하려고.”
“피…….”
나는 김지영 이사의 어깨를 쓰다듬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던 검은 슈트의 건장한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부장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김지영 이사의 비서실장 황도만.
그는 비서와 경호를 겸하는 인물로, BO 푸드에서부터 그녀의 비서로 일했었다.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요.”
유튜브 채널의 인터뷰 2건과 생방송 라디오의 패널 출연, 시청률 10%가 넘는 퀴즈 프로그램 녹화까지.
오늘 김지영 이사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중요한 날이라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황도만 실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대표님의 이미지가 곧 회사의 이미지니까 제가 보조해야죠.”
“아……. 그런가요?”
황도만 실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와 김지영 이사와의 관계를 모르는 그에게는 내 등장이 의외로 보였나 보다.
“실장님. 오늘 잘해 봐요.”
나는 황도만 실장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 서서 촬영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은 국내 1위 식품 커머스! 마켓 프레시의 김지영 이사님과 바른 먹거리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켓 프레시의 김지영입니다.”
누구 여자인지, 참 예쁘다.
풀 메이크업에 화려한 조명까지 비추니, 그녀의 외모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미인이십니다. 마켓 프레시 모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하하하.”
“아닙니다. 메이크업이랑 조명빨입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메이크업 하시기 전부터 쭉 지켜봤습니다.”
음흉한 눈빛과 끈적거리는 말투까지.
BJ 만식이라는 저놈,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까 메이크업을 할 때부터 주변에서 서성대던 것을 본 것 같은데…….
나는 옆에 있는 황도만 실장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 BJ 유명한 사람이에요?”
“구독자 100만이 넘는 유명한 분입니다.”
“그렇게 인기가 많아요?”
“네, 돈도 많고 나름 플렉스한 케릭터로 유명합니다. 왜요?”
“저 눈빛 봐요. 음흉한 게 영 보기 싫잖아요.”
“그런가요? 전 모르겠는데?”
하긴 모르겠지.
애인으로 보는 것과 비서로 보는 시점은 차이가 있으니까.
“한 번만 더 저렇게 웃으면 당장 방송 접게 할 겁니다.”
“네?”
“저 웃음 뭔가 성희롱하는 거 같잖아요. 왜 아래위는 훑어보고 지랄이야?”
“아……. 부장님.”
내가 앞으로 튀어 나갈 것 같자, 황도만 실장이 내 팔을 꽉 움켜잡았다.
“왜요?”
“참으세요. 저 BJ는 다른 출연자들한테도 다 저렇게 했어요.”
“근데 다 참았답니까?”
“네, 다른 출연자들과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너무 예민했나?
짧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후……. 그래요. 이거 얼마나 걸리죠?”
“1시간이면 끝날 겁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밖으로 나갔다.
계속 보면 열불이 터질 것 같았기에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여! 원지훈이!”
새하얀 슈트에 머리를 뒤로 모두 넘긴, 말끔한 옷차림의 이정우 이사가 한 손을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니, 이제는 이사가 아니라 대표라 불러야 하나?
“대표님!”
내가 부르자, 이정우는 내 어깨를 감싸며 피식 웃었다.
“야, 어색해.”
“네?”
“그냥 형이라고 불러.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알았어요.”
“오늘 지영 씨 촬영이지?”
“지영 씨?”
“으, 알겠다. 김지영 대표님!”
“아……. 네.”
“대표님이 출동하셔서 마프 최고의 비서가 따라오셨구나. 근데 왜 밖에 있어?”
이정우는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답답해서요. 이사님, 아니 형도 저 BJ 잘 알아요?”
“응, 잘 알지. 만식이는 왜?”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돈 좋아하는 평범한 BJ야.”
“돈 좋아하는 게 평범한 BJ입니까?”
“그럼 뭘 좋아해?”
“일에 대한 열정이나 구독자에 대한 애정 뭐 이런 걸 원하는 것이 진정한 BJ죠!”
“너 어디 아파?”
이정우는 내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갸우뚱 해 보였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요. 저 만식이라는 놈.”
“이상하네. 평소 차분하던 원지훈이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제가 뭘요?”
이정우는 내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고,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촬영을 하는 만식이라는 BJ와 김지영 이사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1시간 후.
촬영이 끝나고 카메라와 조명들이 하나둘 뒤로 빠졌다.
나는 황도만 실장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가로채서, 김지영 이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BO 푸드 회장님 따님이시죠?”
BJ 만식이라는 놈이 김지영 이사의 옆에 바짝 붙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지영 이사는 그런 그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몸을 뒤로 살짝 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역시 부자들의 유전자가 우월한가 봅니다. 하하하.”
“네?”
“미인이시라고요. 오늘 다른 스케줄 있으세요? 전 편집할 때까지 시간 비는데.”
“아……. 저 그게.”
왜 바보같이 딱 거절을 못하지?
들고 있던 생수병으로 만식이라는 BJ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김지영 이사에게 생수병을 내밀었다.
“여기 물이요.”
“지훈아, 촬영 어땠어?”
“뭐 그럭저럭 볼 만합디다.”
“합디다?”
내 마음을 모르는 김지영 이사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리고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만식이라는 놈은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히죽거렸다.
“이사님, 언제 답을 주실 겁니까?”
“네?”
“조금 전에 시간 괜찮으시냐고 물었잖아요.”
“아뇨.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
“그럼 전번이라도 좀 주세요. 연락드려도 되죠?”
안 되겠다.
저놈을 먼저 떼어 내야겠다.
나는 둘 사이로 강제로 몸을 밀어 넣고, 만식이 놈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만하시죠.”
“비서님이신가? 아니면 집사?”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린놈이 돈 좀 번다고 어깨에 뽕이나 들어가 있고.
남의 여자에게 그따위 저급한 눈길이나 보내고.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만식이 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니요. 마켓 프레시 직원입니다.”
“직원? 아 그러시구나. 잠깐만 비켜 봐요. 이사님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만식이 놈이 내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나는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그대로 서서 버텨 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놈이 보던 대본을 쓸어내렸다.
더러운 놈.
많은 기억이 차례로 들려왔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본 위에 올려져 있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자세로 말했다.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뭐요?”
미간을 구기는 만식이 놈.
나는 놈의 멱살을 잡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소란에 촬영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던 이정우가 곧바로 달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만식이 놈의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만식아! 그만해.”
“왜요?”
“넌 어떻게 BJ라는 놈이 그렇게 눈치가 그렇게 없냐?”
“뭐가요?”
“모르겠어? 이사님 남친 있다는 거.”
“헛……. 진짜요?”
“그래. 그분 내가 아는데 꽤 무서워. 열 받으면 너 정도는 아무도 모르게 묻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조심해.”
이정우의 협박에 만식이 놈이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이정우는 내게 한쪽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가져갔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마 알고 있는 건가?
잘 숨겨 왔는데…….
질투라는 이 감정 때문에 걸린 걸까?
김지영 이사가 화장을 고치는 사이, 나는 이정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셨어요?”
“응, 진작 알고 있었지.”
괜히 나 혼자 조심을 떨었나?
허무한 마음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언제부터요?”
“저번에 주총 끝나고 회식할 때.”
“많이 티 났어요?”
“완전, 정확히는 내가 눈치가 빨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이정우는 눈치가 상당히 없는 편이다.
그가 알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김재열 사외이사도 알았다는 건데…….
입이 싸기로 유명한 김재열 이사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비밀 지켜 주실 거죠?”
“내가 이제 어디다 말하겠냐. 잘해 봐. 근데 나이 차이가 좀 나지 않아?”
“그게 뭐요?”
나는 김지영 이사의 나이를 얘기하는 것을 싫다.
이정우는 내 눈을 보고 한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야! 눈 풀어. 너 이제 나도 치겠다?”
“여자가 평균 수명이 더 길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이정우는 그만 얘기하라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그보다 걱정은 김재열 사외이사다.
나는 그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김재열 이사님은…….”
“걱정하지 마. 그 양반은 모를 거다. 그날 너보다 더 취해서 난리였으니까.”
“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술만 마시면 모든 비밀을 술술 털어놓는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걸린 게 아니라…….
이정우는 내 어깨를 툭 치고 다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 * *
촬영을 마친 김지영 이사와 나는 밖으로 나와서, 차를 가지러 간 황도만 실장을 기다렸다.
“잠깐만.”
화장을 급하게 지워서 그런지.
그녀의 볼 옆에 약간 묻어 있는 검은 마스카라의 흔적을 손으로 지워 줬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움켜잡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지훈이 질투한 거야?”
“내가 뭐?”
“아까 BJ랑 중간에서 말이야.”
“아니거든.”
“그래? 난 질투한 거라고 생각하고 심쿵했는데.”
“그놈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야.”
김지영 이사는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갑자기 뭐야? 황 실장님이라도 오면 어쩌라고?”
“왜? 오면 오라지 뭐.”
“응?”
“기억나? 우리 한 달만 만나 보자고 했던 거.”
기억난다.
그녀는 지금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한 달간 만나 보자고 했었다.
“기억나.”
“그럼 내일이 우리 만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란 것도 알겠네?”
“그래.”
“고마워. 지훈아.”
고맙다는 말이 여기서 왜 나올까?
그녀는 멍한 표정의 내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다가오는 황 실장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재빨리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냥 고맙다는 거야. 오늘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고, 아까 그 BJ랑 싸워 줘서 고맙고, 내가 웃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진짜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또 있어?”
불안했다.
그리고 기분이 영 찝찝했다.
혹시나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할까 봐.
나는 승합차에 오르는 그녀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