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22
122. 불안하시죠?
* * *
“대리님. 저 부탁이 있는데요.”
몸을 배배 꼬며 배시시 웃는 가공식품 팀의 이연희 사원.
그녀는 사업부 남자 부서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애교는 또 얼마나 많은지…….
대리, 과장들은 그녀의 부탁이라면 끔뻑 죽는다.
“응 뭔데?”
가공식품 팀의 박호식 대리.
오늘의 타깃은 아랫배만 툭 튀어나온 이티형 몸매의 그였나 보다.
다음은 안 봐도 훤하다.
공용 물건들에 담긴 기억으로, 부서원들의 직설적인 기억과 뒷담화까지 들었으니까.
“1시까지 광중 돈가스 보고서랑 발주서 넣어야 하는데……. 제가 일이 좀 있어서…….”
발주서를 넣을 때는 일단, 지난 판매 수량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제조사의 생산현황과 마켓 프레시에서 판매될 수량을 예측하고, 프로모션이 들어갈 수 있는 일정과 특판이나 배너 노출 현황을 체크하고, 회원들의 재구매율과 반품률까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한마디로 할 일이 많다는 말이다.
“급한 일이야?”
“네…….”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이연희.
박호식 대리는 이에 넘어가고 말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30분 전까지 보고서 만들어 둘 테니까, 연희 씨는 다녀와서 광중이랑 통화만 해.”
“대리님도 바쁘시잖아요.”
“아니야. 오늘은 시간 좀 있어. 정 고마우면 다음에 커피나 한 잔 사던가.”
“알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길에 커피 사 올게요.”
“오! 오늘은 연희 씨가 사주는 커피를 마시겠구나. 하핫”
“대리님 라떼 드시죠?”
“기억하네?”
“그럼요! 제가 대리님 생각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PB상품 선정 때문에 김태하 팀장의 자리로 와있던 나는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냥 둘 거야?”
내 질문에 김태하 팀장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연희 씨, 매번 저런 식인 거 같던데?”
“아……. 뭐 급한 일이 있나 보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한 손을 휘휘 젓는 김태하 팀장.
그는 팀원들을 방목하는 스타일이다.
팀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결과로만 평가한다.
나는 김태하 팀장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그들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박호식 대리의 어깨를 주무르는 이연희.
요란한 소리를 내며 키보드를 치는 박호식 대리.
얼핏 보기에는 참 다정한 사수와 부사수로 보이겠지만, 이연희의 속마음을 아는 내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김태하 팀장은 내가 그들을 보는 것을 알고, 손을 펼쳐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뭘 그렇게 자꾸 봐?”
“아니야.”
상장을 앞두고 김태하 팀장은 PB상품을 준비하기 위해 바빴다.
평소 칼퇴를 하는 그가 10시 넘어서까지 회사에 남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김태하 팀장이 꺼내 둔 업체 리스트를 훑어보다, DK 푸드가 적힌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단 DK 접근해 보자. 여기 레토르트 상태는 좋은데, 매출은 영 꽝이잖아.”
“안 그래도 약속 잡아놨어.”
“그래?”
“응. 이따 밥 먹고 바로 넘어갈 거야.”
“그래. 잘 다녀오고.”
나는 김태하 팀장의 팔을 툭 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박호식 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가장 중요한 업무인 브랜드 발주를 남에게 맡긴 건지.
이연희의 정신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업무를 보고, 다시 가공식품 팀의 공간으로 걸어갔다.
자리로 돌아온 박호식 대리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타이핑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온 것도 모르고.
“많이 바쁜가 보네.”
자연스럽게 박호식 대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듣게 된 박호식 대리의 기억.
김칫국을 한 사발 드링킹 하고 있구나.
약간의 호의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는 은근 많다.
이어서 들려온 이연희의 기억.
설마……. 지금까지 할 줄 몰라서 도망갔던 것인가?
이건 예상 못했다.
나는 그녀가 업무시간 중에 다른 일을 한다고만 생각했다.
얼마나 이런 일이 반복되었을까?
나는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때, 외투를 걸쳐 입은 김태하 팀장이 내 팔을 툭 쳤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DK는 언제 가?”
“지금 가려고.”
“점심은 어떻게 하고?”
“길 막히는 거 같아서, 차에서 대충 때울 거야.”
“그래. 잘 다녀오고.”
김태하 팀장은 손목의 시계를 보며,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팀장은 저렇게 바쁜데…….
나는 김태하 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의 옆으로 재빨리 따라붙었다.
“태하야.”
“응?”
“이따 너희 팀원들 데려다가 교육 좀 할까 하는데 괜찮아?”
“왜? 누가 사고 쳤어?”
“아니 사고는 아니고.”
김태하 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뭔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불안하구나?”
“응?”
“곧 있으면 BO푸드에서 분사할 거고, 너도 이사 발령 나면 아무래도 밑에 직원들 챙기기 어려워질 거니까.”
이전과 다르게 왜 이렇게 불안한가 했더니…….
맞는 것 같다.
이번엔 태하가 내 기억을 읽었구나.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
“악역은 내가 할 테니까, 넌 조금만 해. 이사가 사원까지 혼내면 모양 빠지잖아.”
“그런 거 아니야.”
“하여간 적당히 해.”
* * *
오후 1시.
양손에 커피를 든 이연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박호식 대리가 마무리 지은 자료를 넘기며 천천히 확인했다.
“역시 우리 대리님이시네.”
“응. 연희 씨 메일로 보내 놨으니까, 인트라넷에 올려.”
“예압!”
“광중에 전화해서 확인받고.”
“저……. 대리님.”
“응?”
“전화도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거기 박 과장님이 자꾸 같이 밥 먹자고…….”
“광중에 과장이면……. 박정신 과장?”
“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알았어. 내가 할게.”
박호석 대리는 씩씩거리며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저것도 거짓 핑계일 것이다.
못 봐주겠다.
도저히 더는 못 봐주겠다.
“이연희 씨!”
내가 부르자,
그녀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네. 부장님.”
“광중 보고서 나한테 전달해 줄래? 태하 팀장이 자리를 비워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출력해서 회의실로 와.”
잠시 후, MD 사업부의 소형 회의실.
나는 이연희가 출력한 문서를 천천히 넘겨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희 씨가 몇 년 차지?”
“이제 2년 조금 넘었습니다.”
배시시 웃으며 답하는 이연희.
나는 그녀의 이 웃음이 가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광중은 재구매율이 많이 떨어졌네.”
“아……. 네.”
“원인은 파악했어?”
“아 그게…….”
“그게 뭐?”
“제품 중량이 10% 빠지면서 매출이 빠진 것 같습니다.”
틀렸다.
보고서에는 중량을 줄인 것은 9월이고, 매출이 빠진 것은 그 이전인 7월이다.
“확실해?”
내가 되묻자, 이연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긴장한 표정의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나가서 정우 과장, 호석 대리, 동우 씨도 들어오라고 해.”
최정우 과장, 박호석 대리, 김동우 사원.
이연희의 업무를 대신해 주는 가공식품 팀의 삼인방.
그들을 이대로 두며, 똑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만 될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이 모두 회의실로 들어왔다.
나는 광중의 보고서를 넘기며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연희 씨, 광중 재구매율 떨어진 원인은 찾았나?”
“7월에 광중 식품 공장 파업으로 저희가 재고 수량을 조정해서 그렇습니다.”
이연희를 대신해서 답하는 박호석 대리.
나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이연희에게 물었다.
“지금도 파업 중인가?”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수량을 풀어 줬어야 하는데 깜박했습니다.”
이번엔 최정우 과장이 대신 나섰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최정우 과장을 바라봤다.
“난 이연희 씨한테 물었는데?”
“…….”
“광중이 최 과장 브랜드인가?”
“그건 아니지만…….”
“이연희 씨.”
“네?”
고개를 푹 숙인 이연희.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언성을 높였다.
“선임들이 이연희 씨 백업이야? 아니면 콜센터야?”
“…….”
“최 과장, 박 대리, 김동우 씨. 당신들은 이연희 씨 이대로 둘 거야?”
“…….”
“진심으로 이연희 씨를 위한다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늦어도 되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 여기 있는 셋은 하나하나 꼼꼼히 가르쳐 주고, 발주서는 꼭 이연희 씨 혼자 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연희 씨!”
내가 불렀지만, 이연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다시 불렀다.
“이연희 씨!”
“……네.”
“내일, 광중이랑 약속 잡아.”
“네?”
“나랑 같이 나간다고 미리 약속 잡아 놓으라고.”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요즘 들어 부서원들 개개인의 문제점이 보였고, 잘하는 부서원들은 더 격려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내보내고 혼자 회의실에 남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때,
“고생하시네요.”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정진택 차장.
나는 그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요?”
“밖에서 대충 들렸습니다. 저도 연희 씨 스타일 대충 알고 태하 팀장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정진택 차장은 내 옆자리의 의자를 꺼내 앉으며 말을 이었다.
“불안하시죠?”
요즘 내 마음을 잘 알고 있구나.
김선녀 여사로의 경영권 압박과 상장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부장님 정도는 아니어도 다들 밖에 나가면 날고 긴다는 사람들입니다.”
괜한 걱정이었나?
정진택 차장의 말이 맞다.
예측이 정확한 김진명 부장은 벤더들 사이에서 노스트라다무스라 불렸고,
침착하고 차분하다는 평가를 받는 김태하 팀장,
깐깐하고 쉽지 않다는 평판이 자자한 장선영 차장,
생산자 영업의 달인이라 불리는 정진택 차장까지.
모두가 제 몫 이상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럴까요?”
“얼마 전에 재문 팀장이랑 소주 한잔 했는데요.”
신선식품 팀의 대리였던 쿠폰 사업팀의 도재문 팀장.
정진택 차장이 그를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네.”
“에이마켓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답니다. 연봉도 50% 이상 올려 준다고 했다던데.”
“그래요?”
“네. 근데 재문이가 그 좋은 제안을 마다했답니다. 나 같으면 바로 갈 텐데. 하하하.”
“…….”
“아마 재문이 말고 다른 직원들도 그럴걸요? 요즘 다른 커머스에서는 마프 애들 빼가려고 안달이에요.”
몰랐다.
그동안 지분싸움과 김선녀 여사에 몰두하느라.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요.”
“그나저나 친구들 좀 섭외해 봤습니다.”
“친구들이요?”
“저번에 얘기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경영권 방어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것인가?
돕겠다는 말은 그냥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는데, 진짜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기억납니다.”
“시간 좀 내주세요. 보면 분명 도움이 될 놈들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정진택 차장은 내 답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