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28
128. 무슨 현대판 홍길동도 아니고
* * *
“네가 웬일이야?”
설 명절 연휴 첫날.
김재열 사외이사가 새로 이사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 손에 들린 나무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좋네. 연예인들 사는 집 같네.”
“네,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니까 집값이 많이 싸더라고요. 그래서 욕심 좀 내봤죠.”
“잘했어. 집 구경 좀 해도 되지?”
“네. 마음대로 하세요. 물건은 구했어요?”
내 질문에 김재열 사외이사는 나무 상자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내가 누구냐. 당연히 구했지.”
“오! 대박! 역시 우리 형님이야!”
내가 나무상자의 앞으로 걸어가자,
김재열 사외이사는 양팔까지 벌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돈은?”
“알았어요. 지금 바로 입금할게요.”
내가 휴대전화로 뱅킹 앱을 실행하는 사이.
김재열 사외이사가 뭔가 부탁이 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훈아……. 나 있잖아.”
“뭐요?”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저거 맛 좀 보면 안 될까? 내가 이거 들고 오면서 얼마나 침을 흘렸는지 알아?”
“그럼, 공 하나 빼고 입금해도 되죠?”
내 농담에 김재열 사외이사가 재빨리 미간을 구겼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낭만이 없어. 낭만이.”
“무슨 낭만 타령이에요?”
“칼로 살살 긁어서 따내면 티도 안 나. 거기다 위스키 좀 섞으면 아무도 몰라.”
“그렇게 하면 입금 안 합니다!”
정말 맛이라도 보고 싶었나 보다.
김재열 사외이사는 입맛을 다신 후, 한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 몰라.”
“일단 물건 먼저 확인할게요.”
나는 쭈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나무상자를 벗겨 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종이 상자의 뚜껑을 살살 달래듯이 떼어 냈다.
멕칼렌 1939. 40년산.
무려 1,300만 원이나 하는 이 위스키는 40년의 숙성 과정을 거친 전 세계에 몇 병 안 되는 귀한 몸이다.
김상만 회장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날, 이걸 마시고 좋아했던 기억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최고의 마당발인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부탁한 것이다. 돈이 얼마가 들건 구해 달라고.
“근데 이게 회장님한테 먹힐까?”
“네. 먹힐 겁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왜? 요리해 주게?”
“짜장라면 끓여 먹으려고 했거든요. 같이 드실래요?”
“좋지. 고춧가루 팍팍 뿌려서 가져와!”
김재열 사외이사는 환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나는 대문 앞의 초인종을 눌렀다.
곧바로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렸고, 긴 정원을 천천히 걸어갔다.
문 앞에 나와 있는 김지영.
분홍색 한복을 입은 자태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와…….”
“왜? 별로야?”
“아니. 너무 예뻐서…….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했나 보네.”
지영이는 내가 들고 있는 나무상자를 받아 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어 내가 들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오셨어요?”
김지욱 상무 내외가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나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에 나는 사뭇 놀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김상만 회장.
그는 나를 보고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 거하게 차려진 음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지.”
인사도 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목소리 톤이 이전과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상 위로 가득한 각종 명절 음식들.
반찬만 50종은 되려나?
이걸 어떻게 다 먹지?
어제 짜장라면을 먹고 쫄쫄 굶어서 배가 고프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과하다.
“아버님. 음식이 꽤 많네요.”
아버님이라는 단어.
타고난 넉살 때문일까?
아니면 이 단어를 회장님이 좋아한다는 기억을 읽어서 그럴까?
나는 이전보다 태연하게 이 단어를 내뱉었다.
“많이 먹어야 일을 하지.”
“네. 오늘도 많이 먹고 죽어라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어렵게 구했습니다.”
테이블 위로 들고 있던 나무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대가 가득한 표정의 김지욱 상무가 나무상자의 포장을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형님! 귀한 놈입니다. 좀 살살하시죠.”
“형님?”
형님이라는 단어는 처음이다.
김지욱 상무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어색하다. 원 이사.”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 주세요.”
“영업을 해서 그런지 넉살 하나는 타고났구나?”
“영업이 아니라 MD입니다.”
“그게 그거지 뭐.”
“흠……. 흠…….”
김지욱 상무의 태도에 김상만 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김지욱 상무는 자세를 고쳐 앉고 김상만 회장의 앞으로 나무상자를 밀어 줬다.
조금씩 열리는 포장지.
웅장한 자태의 위스키병이 머금고 있던 빛을 허공에 내뿜었다.
멕칼렌 1939.
라벨을 본 김상만 회장의 표정에 처음 보는 미소가 가득해졌다.
“와……. 멕칼렌이잖아! 거기다 1939야?”
김지욱 상무의 설레발.
“지영아. 잔을 좀 가져와야겠다.”
“아침부터 술 드시게요?”
“그래. 좋은 술은 좋은 사람과 나눠 먹는 거다.”
급하게 개봉을 준비하는 김상만 회장.
좋은 사람이라…….
기분은 좋다. 그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아니. 내가 고맙지. 안 그래도 최 비서에게 이 술을 구해 보라고 했는데 말이야.”
술잔이 오가고.
기분이 좋았는지, 김상만 회장의 말이 길어졌다.
과거 자신이 고생하며 창업했던 얘기와 돌아가신 아내의 얘기 등등.
평소 듣지 못한 얘기들이 줄줄 새어 나왔다.
“회장님!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김지욱 상무.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는 참 애교가 많은 사람이다.
김상만 회장의 옆에 달라붙어서 촐싹대는 모습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면서.
“아버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왜 형님이나 지영이, 그리고 형수님까지 집에서 회장님이라고 부르나요?”
“…….”
“무슨 현대판 홍길동도 아니고 하하하.”
홍길동이라는 말은 뺄 걸 그랬나?
김상만 회장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내가 아니지.
나는 조금 전까지 김상만 회장이 만지작거리던 술병을 움켜잡았다.
“제가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그랬구나.
집에서 대화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호칭이 이어진 거구나.
술을 받은 김상만 회장은 천천히 술맛을 음미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가 시킨 건 아니네.”
“네?”
“호칭 말일세.”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김지욱 상무는 옆으로 바짝 달라붙어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부지!”
“…….”
“아. 어색하네요.”
술 때문인가?
아기처럼 애교를 떠는 김지욱 상무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꺼내놓았다.
“지호 엔터의 최민우 대표를 기억하시나요?”
그의 이름이 나오자 김상만 회장은 바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최민우?”
“네.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최 대표가 1.7%의 BO푸드 주식으로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커머스 주식 3.5%를 스왑하고 싶어 합니다.”
“그 얘기는 이미 최민우와 끝냈네.”
“아버님. 지금 최 대표의 제안을 거부하면 여사님께 갈 수도 있습니다.”
“겨우 1.7%? 가라고 해. 그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으니까.”
고개를 틀어 버리는 김상만 회장.
이제 슬슬 들고 있는 무기를 꺼내 봐야겠구나.
“5%의 동의서를 받아온다면 괜찮겠습니까?”
“5%?”
김상만 회장은 5%라는 수치에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림없지.”
“그럼 얼마나 요구해 볼까요?”
“최소 7%는 가져와야 할 걸세.”
역시 김상만 회장이다.
사실, 내가 알기엔 5%면 충분하다.
하지만 타고난 사업가인 그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협상안을 꺼낸 것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씩 웃었다.
“6%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6%라…….”
“네. 6%면 시가로 750억이 넘습니다. 꽤 큰 금액입니다.”
“아니. 최소 7%는 있어야 하네. 이 또한 자네가 아는 사람 같아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는 거야.”
“음…….”
“그리고 이 술도 마음에 들었고.”
사실, 최민우 대표에게 요구했던 동의서는 7%.
김상만 회장이 이렇게 나올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순순히 수락하면 곧바로 8%, 9%의 요구가 나올 것이 뻔하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어렵겠지만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버님. 7% 정도면 가능한 겁니까?”
“일단 두고 봐야지.”
말은 두고 본다고 했지만, 김상만 회장의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한편, 이미 술에 취한 김지욱 상무.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최민우 걔……. 진택이 친구인데? 하하하 그때는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안 그래요 아부지? 네? 아부지?”
“…….”
“진택이 놈한테 받은 거지? 캬아. 그놈이 쓸모가 있을 때도 다 있구나.”
김지욱 상무의 술주정에 김상만 회장은 인상을 구겼다.
“아가. 데리고 들어가거라.”
“네.”
김지욱 상무가 방으로 옮겨지고, 다시 술자리가 이어졌다.
지영이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안주를 내 접시 위에 올려 줬고, 김상만 회장은 그런 딸의 행동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영아. 이제 아비는 관심도 없는 거냐?”
“아니요. 회장님.”
여전히 회장이라고 부르는 김지영.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김지욱 상무처럼 붙임성이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김상만 회장은 지영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딩동!
집 안으로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김지영이 일어나 인터폰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인터폰에 보이는 화면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태하 왔네요.”
“태하가?”
김상만 회장의 아픈 손가락 김태하.
그는 한쪽 팔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휘청!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큰 몸을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김지영이 두 팔로 그를 끌어안으며 간신히 큰 사고를 모면했다.
“조심하세요.”
“그래.”
“술 좀 그만 드시고요.”
“하하 지금 우리 딸이 내 걱정해 주는 건가? 이게 얼마만이지?”
“…….”
“오늘 기분이 아주 좋구나. 좋은 술에 좋은 사람. 그리고 아들까지 오니.”
현관문이 열리고.
한 손에 보자기로 포장한 선물 상자를 들고 있던 김태하가 쭈뼛했다. 그리고 나와 지영이, 김상만 회장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 왔습니다.”
“그래. 태하야. 잘 왔다. 잘 왔어.”
술 때문인지, 아니면 은퇴를 앞둔 시기라 그런지.
김상만 회장은 전과 달리 부쩍 약해져 있었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김태하를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잘 왔어. 잘 왔어.”
“…….”
“식사는? 상을 새로 봐야지?”
“아닙니다. 먹었습니다.”
“지영아. 방에 가서 지욱이 놈 좀 깨워라. 모처럼 가족이 다 모였구나.”
항상 매사에 차갑고 냉정했던 김상만 회장이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딸.
모처럼 찾아온 아들.
아버지라 부르며 애교까지 떨던 큰아들.
그리고 원하던 제안을 들고 술까지 가져온 온 나.
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미소가 그의 입가로 번져 갔다.
“자자! 가족이 다 모였으니까 화투 한판 칠까요? 어이 처남! 현금 좀 들고 왔지?”
내 말에, 지영이가 피식 웃었고, 태하는 헤드록을 걸며 장난을 쳤다.
김상만 회장은 그런 우리를 환하게 웃으며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