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33
133. 덕산 맨이 겨우 이 정도에 흔들리면 안 되지
끼이익!
낡은 의자 소리와 함께 40대 중반의 남자가 일어났다.
덕산식품의 사무실.
아직도 철제 책상을 쓰는 회사가 있다니…….
이곳의 책상과 의자는 박물관에서나 보던 수준이었다.
그리고 십여 개의 낡은 철제 책상이 놓인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겨우 셋이 전부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송민호 부장님?”
“네,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성근이에게 전화 받았습니다.”
송민호 부장.
덥수룩한 머리에 새치가 삐쭉 삐져나온 그는 마성근 팀장보다도 훨씬 노안이었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은 손.
얼룩이 묻어 있는 회색 회사 로고가 박힌 점퍼.
안에 입은 하얀 셔츠는 방금 샀는지, 가슴 한가운데로 오랫동안 접혀 있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났다.
“아……. 네.”
“이렇게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실이 좀 누추하죠?”
“아닙니다. 역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덕산이네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그를 따라 사무실 구석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제대로 지우지 않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화이트보드와 한쪽 벽에 쌓인 오래된 집기들에는 뽀얀 먼지가 지난 세월을 말해 줬다.
그래도 손님이 온다고 해서 준비했는지, 깔끔히 정리된 회의 테이블 위로 캔 음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우롱차가.
“앉으시죠.”
“네.”
자리에 앉자, 송민호 부장은 의자를 앞으로 잡아당기며 안경 뒤의 눈을 반짝였다.
“저희 스낵을 시식해 보셨다고요?”
“아……. 네.”
부담스럽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떻습니까?”
“좋던데요?”
“역시. 마프의 MD 이사님이라 제품 보는 눈이 탁월하시군요.”
“아닙니다. 덕산의 신제품은 다른 직원들도 전부 좋아했습니다.”
“그래요? 하하하.”
“특히 자색 고구마는 감동이었습니다.”
“오! 고구마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송민호 부장은 제법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제품 연구팀의 수장이라 그런지 제품들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고, 마케팅과 온라인 커머스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했다.
“혹시 처음 사입 비용은 얼마나 생각하시나요?”
조심스럽게 묻는 송민호 부장.
나는 처음에 생각했던 금액을 숨김없이 얘기했다.
“일단 조건만 맞으면 1년 치 사입비로 20억 정도를 생각합니다.”
“요즘 마프가 대세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
“부장님은 덕산에 얼마나 계셨나요?”
“올해로 덕산 맨 20년차입니다.”
가슴을 쫙 펴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송민호 부장.
그의 반짝이는 눈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나는 씩 웃으며, 그와 마주한 테이블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렸다.
공장이 다시 돌아간다고?
그럼 지금 생산 라인이 멈춰 있다는 말인가?
덕산의 사정이 좋지 못한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도 100년 전통의 덕산식품인데…….
나는 송민호 부장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근이 많으신가 봅니다. 사무실에 직원이 얼마 없던데.”
“아……. 네. 다들 좀 바쁘죠. 그나저나 저희 샘플 좀 더 가져와 볼까요?”
“네, 그러면 좋죠.”
“하하 잠시만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송민호 부장.
나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앞에 있던 캔 음료를 움켜잡았다.
20억은 1년치 사입비에 해당하는 돈.
이를 가지고 겨우 석 달을 돌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급한 불을 끈다라.
참 무책임한 생각이다.
그냥 돌아갈까?
마성근 팀장은 왜 이런 회사를 만나 보라고 했던 것일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한 손에 낡은 쟁반을 든 송민호 부장이 회의실로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다섯 개의 작은 종이 접시가 있었고, 그 위에는 웨지 감자처럼 생긴 이들의 스낵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 저희가 생산할 제품은 총 다섯 가지입니다.”
마성근 팀장이 보여 줬던 샘플은 네 종.
그 사이 한 종이 더 만들어진 것인가?
“마 팀장님 통해서 확인했던 샘플은 네 종이었는데요?”
“아 요거. 명란 마요가 추가됐습니다.”
송민호 부장은 가운데 있는 종이 접시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이건가요?”
“네. 한번 드셔 보세요. 독은 없으니까. 하핫.”
누가 마성근 팀장이 강력히 추천한 사람 아니랄까 봐.
개그코드도 비슷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가리키는 스낵 한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오는 탄성.
이거…….
장난 아니다.
어제 먹었던 제품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정말 2014년도의 꿀 버터 칩을 재현할 만한 스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소스.
분명 시중에서 판매하는 일반 마요네즈가 아니라 직접 만든 제품이다.
“이 마요네즈. 직접 만드신 겁니까? 정말 맛이 독특하네요.”
“역시 단번에 아시는군요. 하하.”
“이건 그냥 마요네즈로 덜어서 판매해도 대박이겠는데요?”
“고추냉이랑 허브를 좀 넣고, 저희만의 특별한 비법을 좀 넣었습니다.”
특별한 비법이 뭘까?
이 알싸한 끝 맛이 느껴지는 것은 익숙한 맛이긴 한데…….
“특별한 비법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하하하, 며느리도 절대 안 가르쳐 주는 저희만의 비법입니다.”
크게 웃으며 분위기를 자신의 쪽으로 몰고 가는 송민호 부장.
하지만 말려들면 안 된다.
상대는 지금 1년 사입비 20억으로 겨우 석 달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판에.
“공장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고 해도 공장을 돌릴 수 없으면 말짱 도루묵.
난 내 눈으로 직접 공장이 돌아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네, 내려가시죠.”
송민호 부장 의외로 술술 답했다.
분명, 공장이 지금 안 돌아가고 있다는 기억을 했는데…….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그를 따라 1층 생산 공장으로 내려갔다.
* * *
1층 생산 공장.
생각보다 규모는 작다.
아니, 내가 봐 왔던 식품 공장들 규모 중에서 가장 작다.
이전에는 전국에 5개가 넘는 대형 공장을 보유했던 덕산인데…….
지금은 서른 명도 안 되는 직원들이 작은 설비 앞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설비들에는 억지로 녹을 벗겨 낸 흔적이 역력했다.
“어이! 포프! 유탕기 확인했어?”
“오케이! 했어!”
포프라고 불리는 외국인 노동자와 60대 남자가 나를 힐끔 보며 소리쳤다.
소리치지 않아도 될 만한 내용인데 말이다.
“황링! 슬라이서 세척해! 후라이어에 기름때 빼고!”
“포프! 내가 뒤에서 받으라고 했잖아!”
유탕기 근처에서 소리치는 60대의 남자.
이렇게 입으로만 일하는 공장은 처음이다.
식품 공장 하루 이틀 다녀본 게 아닌데…….
“저분은 누구시죠?”
내 질문에, 송민호 부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황규연 부장님이라고 생산 책임자십니다. 덕산에서만 40년 넘게 일하셨죠.”
“아……. 네. 근데 매번 저렇게 일하시나요?”
“하핫, 좀 말이 많으시죠? 오늘 이사님 오셔서 더 긴장하셨나 봅니다.”
“제가 온다는 걸 아나요?”
“그럼요. 저희는 각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사이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으로 시커먼 컨베이어 벨트 위를 훑었다. 이곳은 사람의 손이 많이 타는 곳으로 공장 실사 때는 꼭 확인하는 곳이다.
이 사람들 뭐지?
밀린 급여와 회사의 처지를 한탄해야 정상인데…….
혹시 다 같이 머리를 다친 것은 아닐까?
나는 컨베이어 벨트에 손을 올린 채로 멍하니 섰다.
그리고 그때.
“이사님. 이사님?”
나를 부르는 송민호 부장의 목소리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네?”
“여기 유탕기 보이시죠? 이건 저희가 직접 설계에서 제작까지 한 설비입니다. 여기 작은 벨브랑 게이지로 기름의 투명도를 체크하고, 기름이 다되면 자동으로 이쪽 호스로 빠져나가는 원리죠. 한 마디로 건강한 스낵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겠군요. 이런 유탕기는 처음 봅니다.”
“마프도 건강을 중요시하잖아요. 저희도 그렇습니다.”
공장을 살피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까?
뭔데 불평 하나 없이 회사가 좋아질 거라는 생각만 하는 걸까?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그런가?
아니면 회사에 지분이 많아서 나가지 못하는 건가?
나는 그렇게 수많은 생각을 하며 공장의 모든 설비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와 위생모와 위생복을 벗어 내려놓았다.
“어떠셨습니까?”
“네. 덕분에 잘 봤습니다.”
“낡은 설비들은 조금 있는데,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네. 그렇겠군요. 일단 서울로 돌아가서 좀 생각해 보고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소 실망한 표정의 송민호 부장.
그는 내가 바로 답을 주거나, 아니면 긍정의 표시라도 보이길 원했을 것이다.
“아……. 네 그러셔야죠.”
“오늘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먼 길 와주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혹시 KTX 타고 가시나요?”
“아니요. 내일 오전 일찍 비행기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나주 배 농장에 간 정진택 차장이 늦는다면서 호텔을 덥석 예약해 버렸다. 그리고 나도 오랜만에 온 광주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기대를 하고 이를 수락했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어디서 주무시나요?”
“시내에 호텔을 예약해 놨습니다.”
“그럼, 식사는…….”
“함께 내려온 사람이 있어서요. 오면 같이 먹을 생각입니다.”
“그래요? 그럼 현지인 맛집 좀 소개해 드릴까요?”
“그럼 저야 고맙죠.”
내 답에, 송민호 부장은 상의를 걸치며 환하게 웃었다.
“가시죠! 차도 없으실 텐데,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이렇데 직접 바래다 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뭐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제 나이쯤 되면 슬슬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집니다.”
부담스럽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내 팔을 살짝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자 빨리 가시죠. 거기 늦으면 자리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알아서 먹고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먼 길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보냅니까? 자자, 빨리 가시죠.”
송민호 부장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결국, 나는 그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궁금했다.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회사에 왜 남아 있으며,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언제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지가.
그 모습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