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40
140. 우리가 떳떳한데 뭐가 문제야?
회사는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는 곳이다.
능력이 좋고 영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직하고 진실한 사람도 있고, 거짓말과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있으며, 때로는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엘리베이터 버튼, 전등 스위치, 화장실 수전, 그 외 모든 공용 집기에 그들의 기억이 담겨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화성이라는 이 사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신기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목소리에 힘이 서려 있고, 단 한 번의 거짓말도 없다. 더군다나 힘이 실린 목소리에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자신에게로 당기는 매력까지 있었다.
“모바일 쪽 UI를 손봐야 할 거 같은데…….”
“네. 이미 기획이 끝났습니다. 개발 팀 일정 봐서 다시 손 볼 예정입니다.”
“혹시 스토리보드를 볼 수 있을까요?”
양주영 부장은 절대 스토리보드 전체를 보여 주지 않았다.
사업부 내 기밀?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일부 페이지만 보여 줬었다. 나는 이를 최구열 이사에게 정식으로 항의했지만, 그 또한 기밀이라는 똑같은 핑계만 댈 뿐이었다.
하지만 유화성 부장은 달랐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스토리보드가 그려진 페이지를 열어 내게 건넸다.
“여기요.”
나는 그가 만든 스토리보드를 천천히 넘겨봤다.
이 양식 낯이 상당히 익다.
우린 스토리보드 표준 양식이 없다. 그래서 각자 만든 양식을 사용하는데, 이는 양주영 부장이나 고동수 부장이 보여 주던 양식과 똑같다.
역시 그랬구나.
실무는 다 유화성 부장이 쳐 내고 생색은 그들이 냈던 것이구나.
“좋은데요?”
“아,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이사님께 컨펌을 좀 받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커머스는 MD들이 제일 잘 아니까요.”
“정말 좋네요. 페이지에 있을 건 다 있고, 이렇게 슬라이딩했을 때 검색이 나오도록 하면 회원들이 편하겠어요.”
“네. 편리성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UI를 설계했습니다.”
UI(User Interface) 설계.
사용자들이 쉽게 이용하도록 페이지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전략 기획 팀이 주로 하는 업무로, 그동안 불편한 UI를 고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양 부장님은 지금까지 이걸 왜 안 보여 줬을까요?”
“그랬어요?”
“네. 사업부 기밀이라고 하던데…….”
“어라, 기밀이라는 말은 처음 듣네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유화성 부장.
나는 그가 차를 다 마신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한잔 더하실래요?”
“좋죠.”
“잠시만요.”
구석으로 가서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며 그에게 질문을 이었다.
“부장님 댁은 어디세요?”
“태어나서부터 쭉 마포에만 살았습니다.”
“그럼 멀지는 않겠네요?”
“네. 사무실 이전하고 훨씬 가까워졌죠.”
찻잔에 새로 담긴 차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러자 유화성 부장은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자신의 찻잔을 받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근데 이사님이 직접 차를 타세요?”
“예나 씨는 제가 시킨 게 있어서 좀 바쁠 겁니다.”
“그래요? 어떤 일을 하길래…….”
“카테고리별 매출 데이터를 매일 비교하거든요.”
“아……. 비서가 아니라 MD군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원래 제가 하던 일인데 예나 씨가 온 이후로 업무가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부장님이랑 수다도 떨 수 있는 거죠.”
“하하하, 복덩이를 받으셨군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그와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봐 온 김태하처럼.
그리고 이런 생각은 나뿐만 아니었다.
함께 손을 올리고 있는 회의 테이블.
이곳에서는 그의 기억이 가감 없이 들려왔다.
그도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고작 한 시간 정도의 대화였지만, 서로의 생각과 성향을 알기에 충분했다.
“전략기획부에 부장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정말 좋네요.”
내 말에, 유화성 부장이 씩 웃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간편 결제 건은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최 이사님이 허락하실까요?”
“허락하지 않으시면 설득해야죠. 저만 믿으세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짓는 유화성 부장.
그동안 MD 사업부에서는 모바일 간편 결제를 추가하자는 의견을 많이 냈었다. 하지만 보안에 문제가 있다며, 최구열 이사와 전략기획부는 질질 시간만 끌어왔었다.
서두르겠다는 말뿐이었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시원한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네, 물론이죠.”
저 웃음. 믿음이 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믿음이 간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앞으로 우리 자주 보도록 하죠.”
“그럼, 이사님 앞으로 아주 귀찮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네. 기대하겠습니다.”
입구까지 그를 배웅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김태하 차장이 내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유화성 부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어 조용히 속삭였다.
“화성 부장님이랑 얘기한 거야?”
“응.”
“담배나 피우러 갈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김태하 차장.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갔다.
* * *
“후……. 어떤 거 같아?”
“뭐가?”
“화성 부장 말이야.”
“좀 놀랐어. 전략기획부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거든.”
“괜찮은 사람 같다는 소리인가?”
“응, 사람도 진실하고, 능력도 있고. 아 참, 양 부장이 했던 프로젝트들 다 화성 부장이 했던 거지?”
“화성 부장이 그래?”
물론 아니다.
유화성 부장은 자신이 양 부장을 대신해서 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작은 기억의 단서들을 조합해서 내가 추리한 것이다.
“아니. 그냥 느낌이 그래.”
“맞아. 그룹폰 때도 고 부장이랑 양 부장 밑에서 잡일들 다 처리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화성 부장을 보살이라고 불렀지.”
“보살? 하하, 잘 어울리는데?”
“맞아. 너무 잘 어울리는 별명이지. 그래서 딱 맞는다는 거야.”
“뭐가 딱 맞는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김태하 차장은 나를 따라 난간에 기대고 서서 말을 이었다.
“너 사내 이사 찾잖아.”
“……!”
어떻게 알았을까?
이사회의 내용을 어디서 들었을까?
내가 놀란 눈을 하자, 김태하 차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척하면 척이지. 홀푸드마켓에서 말도 안 되는 사기꾼이 찾아 왔잖아. 최 이사는 분명 좋은 기회라고 설레발 쳤을 것이고, 너는 반대했겠지. 그리고 누나는 고민하고 있고.”
“와……. 어떻게 알았어?”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니야? 이 회사에 나보다 김지영, 최구열, 원지훈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오랜시간 동안 최구열 이사와 함께 일해 왔다. 그리고 나와는 막역한 친구이며, 김지영 대표는 그의 누나다.
“하긴 그러네.”
“망설이지 마. 네가 사람 제대로 본 거니까. 나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잘난 놈이라고 생각한 놈이 딱 둘 있었어.”
“둘?”
“응, 하나는 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유화성 부장이야. 화성 부장이면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는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유화성 부장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이사직을 제안할 고민까지 한다는 것을.
“이거 좀 낯 간지러운데?”
“뭐가?”
“네 입에서 직접 나 잘났다는 소리가 나오니까 말이야.”
“사실이잖아.”
“그나저나 우리 태하, 돗자리 깔아야겠어. 복채는 얼마나 주면 돼?”
“20억쯤 될 거 같은데?”
“할부되나?”
“그래 너만 특별히 해 줄게.”
과연 내가 유화성 부장을 추천하면 최구열 이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일단 그는 최구열 이사의 사람이다.
그리고 업무 능력도 탁월하고, 태하의 말대로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
새로 선임되는 이사가 가져야 하는 화제성.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일 화제성이 없는 너무도 평범한 스펙이다.
뭐가 없을까?
짧은 시간내에 그를 돋보이게 할 방법이 없을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김태하 차장은 재떨이에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예전에 그룹폰 때, 최 이사가 힘든 적이 있었어.”
“자금 때문에?”
“아니. 한국에 막상 들어왔는데, 다른 커머스들랑 경쟁이 안 됐어. 똑같은 물건을 파는데, 가격이 다른 거야. 벤더들은 그룹폰에 와서 최저가라고 하고 다른 데는 더 싸게 내주고, 다른 커머스들은 카드 할인 껴서 어떻게든 최저가 맞추는데, 카드사들은 그룹폰에 프로모션 안 주고……. 하여간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고 차별이 좀 있었지.”
이는 보통 외국계 기업이 다른 나라에 진출할 때 있는 일들이다.
이는 일종의 국수주의와 같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다른 나라에 적응할 때도 똑같은 문제를 겪는다.
“그래서?”
“그때, 그 문제들 모조리 해결한 사람이 유화성 부장이야.”
“어떻게 했는데?”
“정부에 탄원서 내고, 벤더들에게 소송 걸고, 최 이사 자서전까지 찍어 내면서 그를 스타와 애국자로 만들어 버렸어.”
“아…….”
“유화성 부장은 진짜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야. 그리고 또…….”
“또 뭐?”
“빽도 든든한 사람이잖아.”
“그래?”
빽이 좋다라…….
이건 처음 듣는 소리다.
김태하 차장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좌우로 틀며 되물었다.
“너 몰라?”
“응, 모르는데.”
“와…… 직원들 다 아는데 어떻게 너만 모르냐? 기사도 안 봤어?”
“뭔데?”
김태하 차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다시 입에 물었다.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족당 유정민 원내 대표가 화성 부장 아버지야.”
“……!”
몰랐다. 유화성 부장의 기억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아서.
“그렇다고 화성 부장이 아버지 카드 꺼내서 휘둘렀다는 말은 절대 아니야.”
“그러면?”
“여당 4선 의원의 아들이 그렇게 죽어라 뛰어다니는데, 공무원들도 눈치를 본 거겠지. 그래서 우선 순위로 처리를 해 줬을 거야. 화성 부장이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
유명 국회의원의 아들.
이 정도면 화제성은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기업의 투명성에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복잡하다 복잡해.
나는 난간에 기대서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복잡하지?”
“그래, 죽겠다. 왜 하필 국회의원이어서……. 만약 이사로 선임되면 여론이 안 좋아지는 거 아니야?”
“여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국회의원 아들을 이사로 선임했다고 언론에서 심하게 깔 거 아니야.”
“그럼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야?”
“…….”
김태하 차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
노이즈도 엄연한 마케팅.
이를 이용하는 기업들은 수없이 많다.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김태하 차장은 씩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 생각해 봐. 난 문제 없다고 봐. 우리가 떳떳한데 뭐가 문제야? 오히려 그 사람의 출신 때문에 피해야 하는 건 너무 억지잖아.”
맞다.
자격이 충분한 사람인데 오히려 화려한 배경 때문에 피할 필요는 없다.
나, 그리고 우리만 당당하면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 일단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