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52
152. 중간의 입장에서 정리해 줄 사람
“로열에서 나온 신제품 반응이 좋습니다.”
오랜만에 내 방을 찾은 김경일 팀장이 로열체스의 신제품 평가서를 내밀었다.
반려동물 사료 시장 점유율 1위인 로열체스.
그들은 얼마 전까지 ‘우리들’이라는 회사의 뒤를 잇는 업체였다.
국내 사료 시장은 연 2조 원의 규모로 절대 강자가 없는 곳이다.
네슬레가 세계적인 기업이긴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6위.
그들의 사료는 국내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20억이면, 너무 큰 거 아닌가? 우리들 제품도 재고 많지 않아?”
로열체스의 제품을 이전보다 2배 이상 사들이자는 김경일 팀장.
나는 1위와 2위의 시장 점유율이 얼마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기에 그의 계획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고는 이벤트로 금방 다 쳐낼 수 있습니다.”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확신에 찬 표정의 김경일 팀장.
그와 1년 이상을 함께했기에 잘 안다. 그가 확실하다는 말을 하면 믿어도 된다는 것을.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로열 쪽 사입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김경일 팀장은 짧게 답을 하고,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그때 상품 평가서에서 들려오는 그의 기억.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김경일 팀장을 불렀다.
“경일 팀장!”
“네?”
“요새 뭐 재미있는 일 좀 없어? 영 심심해서 말이야.”
내 말에 김경일 팀장이 씩 웃으며 답했다.
“푸른 쪽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동물병원 의사들이 만든 브랜드 푸른.
좋은 제품들을 만들자는 의지로 똘똘 뭉친 의사가 여럿 있는 유한회사다.
3개월 전, 우린 그들에게 PB 상품 개발의 명목으로 2억의 금액을 투자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아직 제품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
“네, 특히 김성유 원장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흠…….”
김성유 원장은 푸른의 대표이사로 이번 프로젝트의 메인이다.
그리고 경력도 가장 많고, 방송에도 여러 번 나온 사람이라 제품 광고에도 그의 이미지를 쓰기로 했었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김경일 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간 되시면 좀 도와주세요.”
“내가?”
“네, 이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료나 반려동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려 했는데…….
“알잖아. 나 그쪽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
“그래서 도와달라는 겁니다.”
“몇 시에 가는데?”
“여기서 점심 먹고 출발하면 됩니다.”
“그래. 같이 가 보자.”
김경일 팀장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 * *
청담동 동물병원.
케이지 안에 있는 강아지들이 낯선 우리에게 짖어댔다.
“안녕하세요.”
김경일 팀장이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머, 팀장님. 또 오셨어요?”
“네. 원장님께 전화드렸는데, 병원에 계세요?”
“지금 진료 중이세요.”
“언제 끝나요?”
“금방 끝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김경일 팀장은 나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신호를 하고, 자신도 내 옆에 앉았다.
“여기 자주 왔었어?”
“아니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왔습니다. 자주 오면 제 속이 썩어 버릴 거 같아서요.”
일산 사무실에서 거리가 꽤 멀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닫힌 진료실의 문을 바라봤다.
그때, 문이 열리고 축 늘어진 강아지를 안은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김경일 팀장은 그녀의 유난히 작은 강아지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요!”
“네?”
“사료 급여량 줄였어요?”
“네?”
“저혈당증 왔잖아요. 한참 클 아이에게 사료를 줄이면 어떡합니까?”
“의사세요?”
황당하다는 표정의 여자.
김경일 팀장은 그런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최소 하루에 4번은 사료를 줘야 합니다. 심하면 경련이나 혼수상태도 올 수 있고…….”
김경일 팀장은 평소 저런 캐릭터가 아니다.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오지랖은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평소 강아지에 애정이 많다고는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그가 하는 행동을 바라봤다.
그때.
“경일 팀장! 그만해도 돼! 내가 다 말씀드렸어.”
진료실에 있던 김성유 원장이 밖으로 나와 김경일 팀장을 말리고, 여자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액 맞고 가세요. 그리고 여기 이 사람 말처럼, 내일부터는 사료량 늘려 주시고, 최소 하루에 4번은 주셔야 합니다.”
“네.”
“스피츠 품종은 많이 안 크니까 안심하고 먹이셔도 됩니다.”
김성유 원장이 여자를 잘 타일러 보냈다.
이를 물끄러미 보던 김경일 팀장은 미간을 구기며 따지듯이 물었다.
“많이 클 거 같다고 안 먹이는 겁니까?”
“아직도 그런 사람 많은 거 알잖아.”
“영양 상태는 어때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김경일 팀장.
김성유 원장은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타일렀다.
“자자, 내가 알아듣게 잘 설명했으니까, 그만하고 우리 얘기나 하지.”
“…….”
“김 팀장 나 못 믿어?”
김성유 원장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자, 김경일 팀장은 그제야 나를 소개했다.
“여긴 원지훈 이사님이십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저도 원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 명함을 받아 든 김성유 원장은 푸른 가운 상의 주머니에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김성유입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그는 병원의 끝에 있는 상담실로 우릴 안내했다.
우리가 모두 자리에 앉자, 처음에 인사했던 간호사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방긋 웃었다.
“너무 늦어서 이사님이 직접 오신 건가요? 하핫.”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꺼내는 김성유 원장.
그래도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나 보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왜 예상보다 늦어지는 걸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김 팀장도 저도 이번 제품에 욕심이 많아서 의견이 잘 조율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요?”
나는 고개를 돌려 김경일 팀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얼굴이 조금 붉게 상기된 그가 김성유 원장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알팔파를 왜 자꾸 고민하는 겁니까?”
알팔파.
최근 영양학적 가치 및 의학적 효능이 주목받으면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채소다. 주로 말이나 토끼 등의 사료로 많이 쓰이는데, 국내에서 재배하는 농가는 많지 않아 수입이 대부분이다.
“네슬레도 넣었잖아.”
“그건 토끼 사료죠. 개 사료에는 절대 포함하지 않습니다.”
“왜? 알팔파가 면역 강화에 좋은 거 김 팀장도 알잖아.”
“그건 사람에 한해서죠. 개에게 알팔파가 좋다는 논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반대로 안 좋다는 논문도 없잖아.”
재료 하나하나를 두고 다툼을 하는 둘.
반려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다.
원재료의 영양소와 섭취 후 반응에 대해 꼼꼼히 따져 봐야 하기에 이들의 논쟁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턱을 괴고 그들을 번갈아 봤다.
“무엇보다 완두콩은 줄여야 합니다.”
“그럼 육류를 더 쓰자고?”
“당연히 그래야죠.”
“나야 그럼 좋지만, 단가는? 단가가 올라가 버리면 마프가 손해일 텐데?”
“좋은 제품 만들자고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김 팀장. MD 맞아? 결국, 잘 팔리는 게 좋은 제품인 거야!”
“요즘은 의사가 판매도 생각합니까?”
“그럼 꽃등심 한 조각씩 때려 넣고 킬로당 100만 원에 팔던가!”
“파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쟁들.
끝이 없구나.
나는 둘을 상담실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만, 그들은 내가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많이 시끄럽죠?”
밖으로 나온 나를 본 간호사가 조용히 속삭였다.
“매번 저래요?”
“네, 보통 두 분이 회의실에 들어가면 한 시간 동안 저렇게 싸우세요.”
“후…….”
나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다른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간호사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후다닥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팀장, 말이 맞아요! 육류를 더 써야 한다니까요!”
“콜레스테롤 수치도 생각해야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의사였나 보구나.
내가 씁쓸한 미소를 짓자, 간호사는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강동구에 계신 최치영 원장님이신데, 저분 목소리가 좀 커요.”
“지난 3개월 동안 이랬던 겁니까?”
“네. 3개월 내내 이러셨죠. 밤에 자주 술자리도 하시는데, 잘은 몰라도 그때도 이렇게 하실 겁니다.”
“저, 세 분이 제일 심하죠?”
“네. 맞아요. 다른 분들은 크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욕심인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결론이 없는 회의만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구나.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간의 입장에서 정리해 줄 사람.
다른 전문가들이 못했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하는 것이 낫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회의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하던 언쟁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딱 결정하고 끝내는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그럽니까?”
이미 긴 논쟁에 지친 김성유 원장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자료들 찾아보셨잖아요. 여기서 딱 중간을 잡아서 그대로 밀고 가는 겁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내 말에, 가장 먼저 김경일 팀장이 찬성의 뜻을 보냈다.
“좋습니다.”
“네, 저도 좋습니다.”
“그럼 뭐 그렇게 하시죠.”
가장 마지막으로 김성유 원장이 찬성의 뜻을 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전에 들었던 내용을 다시 화두로 올렸다.
“자, 가장 먼저 문제가 뭡니까?”
“알팔파입니다. 알팔파는 토기나 말 등의 건초로 쓰이는 사료입니다. 사람에게도 좋다고는 하나 아직 개에 대한 논문은 없었습니다.”
“아니! 개에 안 좋다는 논문도 없잖아!”
똑같은 회의의 반복이다.
나는 함께 공유하는 테이블을 오른손으로 훑어 그들의 지난 기억을 들었다.
김성유 원장의 기억.
알팔파는 대부분이 미국에서 건조한 상태로 수입되기에 조금의 의구심을 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간다면 포기하는 것이 맞다.
“이건 빼도록 하겠습니다.”
“왜요?”
김성유 원장이 따지듯이 물었다.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있다면 빼는 게 맞습니다. 알팔파를 대신해서 베타카로틴이 많은 당근이나 키위, 애호박 같은 건 어떨까요?”
“좋아요. 그럼 당근으로 갑시다. 당근은 국내 농가도 많으니까, 좋은 제품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
그렇게 나는 그들이 숨겨 둔 기억을 들으며 의견을 모았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6시.
한쪽에 믹스 커피를 마신 종이컵이 쌓여 있었고, 긴 회의에 지친 최치영 원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이제 몇 가지 남았죠?”
“단백질만 정하면 끝입니다.”
내 질문에, 초롱초롱한 눈의 김경일 팀장이 답했다.
그는 하나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하나둘, 결정되어가는 지금의 순간을 즐겼다.
오후 8시.
우린 그렇게 간단한 식사까지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약간의 술을 한 김경일 팀장은 기분이 좋았는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난 3개월간 답을 못 내던 것들을 오늘 하루 만에 끝냈네요. 고맙습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아니요. 중간을 잘 잡아 주셨잖아요. 그동안 푸른에는 중간이 없었어요. 다들 전문가라며 괜히 고집부리는 거 있잖아요.”
대충은 안다.
괜한 곳에 자존심을 세우는 그런 마음을.
나는 씩 웃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 거 있으면 언제든 날 불러. 딴 건 못해도 중간에서 정리는 잘해 줄 테니까.”
“네!”
나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랜만에 소주나 한잔할까?”
“좋죠. 그럼 특판팀 식구들도 부르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그 친구들 이사님이랑 자리한 지 오래됐다고 툴툴대던데.”
“누가?”
“대성이요. 걔 이사님 완전 팬인 거 아시잖아요.”
“그래. 시간 되면 부르지, 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