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56
156. 그럼 연두 씨가 기획해 봐
* * *
MD(Merchandiser).
특정 상품과 서비스를 가장 효과적인 장소, 시기, 가격, 수량으로 시장에 공급하는 일을 계획과 관리하는 사람.
한마디로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고, 소비 패턴에 맞게 상품을 기획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2020 식품박람회.
작년까지만 해도 규모가 작았던 이 행사에 올해는 두 배 이상의 기업들이 참가했다.
내 옆에 바짝 붙어 박람회를 관람하던 마성근 팀장은 꽉 들어찬 부스를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규모가 훨씬 커졌네요.”
“그러게요. 일반 식당들에도 부스를 무상 지원해 줘서 그럴 겁니다.”
“하긴, 아까 보니까 신림동 순댓국집도 들어와 있더라고요. 하하하.”
우린 천천히 제조사들의 부스를 둘러봤다.
이번 박람회 메인 테마는 건강.
특히, 건강한 다이어트식을 선보이는 제조사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세상에 천립도 다이어트식을 들고 나왔네요.”
천립식품은 칼로리 폭탄 제품을 주로 제조하는 회사였다.
언론은 그런 그들의 제품에 비난을 쏟아 냈고, 굳건하던 그들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 소비자가 똑똑해져서 그렇겠죠.”
“하긴…….”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잠시 후.
앞장서 걷던 하연두가 나와 마성근 팀장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이미 시식을 마친 김대성은 눈을 크게 뜨며, 얼굴로 맛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사님! 팀장님! 이거 좀 드셔 보세요!”
나와 마성근 팀장이 다가가자, 하연두는 작은 종이컵에 담긴 파스타를 내게 건넸다.
마성근 팀장은 그런 하연두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이 초록 씨. 나는? 나는 왜 안 줘? 이사님만 챙기는 거야?”
“팀장님도 드리려 했어요.”
“그래도 섭섭한데. 날 먼저 줘야지. 초록 씨 팀의 팀장은 나잖아!”
“그냥 좀 드세요!”
하연두는 작은 종이컵을 마성근 팀장에게 쥐여 주고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장난에 미소를 지으며 작은 컵의 파스타를 떠먹었다.
밀가루 대신 두부로 만든 면.
크림의 맛이 짙어서 그런지 일반 밀가루 면과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끝 맛이 고소하고 달달한 것이 밀가루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
“이거 꽤 괜찮은데?”
“그렇죠?”
하연두는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때 작은 종이컵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기억.
1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열정만 가득한 그녀였는데.
많이 컸구나.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두 씨가 이거 풀 수 있겠어?”
“당연하죠!”
“그럼 연두 씨가 기획해 봐.”
“정말요?”
“응. 이제 할 때도 됐잖아.”
마성근 팀장은 파스타를 한입에 털어 넣고, 나와 하연두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맞아. 초록이 혼자도 다 할 수 있잖아. 이사님 말처럼 한 번 해 봐.”
“네!”
“우리 초록이 많이 컸네. 제품 기획을 다 해 보고.”
“감사합니다.”
하연두는 나와 마성근 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스에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고, 신이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렇게 좋을까요?”
김대성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씩 웃으며 내 옆으로 붙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 씨가 옆에서 좀 도와줘. 나랑 팀장님은 박람회 계속 돌아볼게.”
“네, 알겠습니다.”
나와 마성근 팀장은 둘을 남겨 두고 박람회장을 천천히 돌았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
“마켓 프레시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얼굴에 하얀 밀가루를 묻힌 한 남자가 부스 밖으로 달려 나왔다.
“아……. 네.”
“방송에서 봤습니다. 실제로 보니까 훨씬 더 미남이시네요.”
“고맙습니다.”
대충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 하자, 남자는 내 앞을 막아서며 손에 쥐고 있던 손바닥만 한 빵 조각을 내밀었다.
“이거 좀 드셔 보세요. 이번에 출시한 제품인데 냉정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붉은 그러데이션이 들어간 단풍잎 모양.
넓은 면에 눈과 코, 입을 그려 넣어서 웃는 것처럼 표현해 놨다.
고개를 돌려 남자가 나왔던 부스를 확인했다.
크림 단풍 빵.
이름도 모양처럼 단풍 빵이라고 지어 놓은 제품이었다.
나는 제품을 받아 들고 한입 베어 먹었다.
붉은색을 내던 것이 딸기 잼이었나?
안에 들어 있는 커스터드 크림과 딸기잼의 맛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커스터드 크림은 직접 제조하시는 건가요?”
“네. 저희 집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한 커스터드입니다.”
“맛있네요. 딸기잼이랑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밑 부분은 딸기잼이 없어서 순전히 커스터드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남자의 말처럼 빵의 밑부분은 커스터드 크림만 느껴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절로 눈을 감게 만들었다.
마성근 팀장은 내 표정을 보고 부스 앞에 있는 시식용 빵을 하나 들어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그의 입맛에도 잘 맞았는지, 손뼉을 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브라보! 완전 브라보!”
“……!”
“이 커스터드 어떻게 만드시는 겁니까?”
“입맛에 맞으세요?”
“네. 제 평생 이렇게 부드러운 커스터드는 처음이네요.”
“고맙습니다.”
마성근 팀장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 남자에게 건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켓 프레시 특판팀 팀장 마성근입니다. 시간 되시면 저랑 비지니스 한 번 해 보시겠습니까?”
남자는 재빨리 비닐장갑을 벗고, 앞치마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마성근 팀장에게 건넸다.
“주드 베이커리 김성종입니다.”
“대표님이셨군요.”
“네. 회……. 회사가 좀 작아서요, 하핫.”
흥분한 남자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마성근 팀장을 상대했다.
“회사가 작건 크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품만 좋으면 그만이죠.”
“감사합니다.”
“일단 포장 디자인 먼저 좀 바꿔야겠네요. 투명하게 해서 안에 제품이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마성근 팀장 또한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박람회에 나온 작은 기업들에게 우린 새로운 기회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도 유통할 수 없었기에, 우리와 같이 제품을 인정해 줄 유통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이 접하지 못한 새로운 상품.
뜨거운 반응이 예상되는 상품.
그런 상품을 찾았을 때, 지금처럼 희열을 느낀다.
나는 남자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마성근 팀장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가려는 순간.
“원 이사님!”
박람회장의 입구 쪽 위주로 돌던 이진성, 장선영 차장이 다가왔다.
“입구 쪽은 다 돌아보셨어요?”
“네. 이번 박람회 제품들 다 좋은데요? 당진에서 나온 비트 주스라고 있는데, 맛도 좋고 단가도 훌륭해요. 드셔 보실래요?”
장선영 차장은 손에 들고 있던 반쯤 마신 페트병 음료를 건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진성 차장이 미간을 구기며, 그녀의 손을 막았다.
“장 차장님. 이사님께 먹던 걸 주는 겁니까?”
“입 안 대고 마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사님이 괜찮다는데 이 차장님이 뭔 상관이에요?”
둘은 매번 이런 식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찰떡같이 잘 붙어 다닌다.
나는 피식 웃고, 그녀가 건넨 비트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주스에서는 단맛이 강한 비트가 그대로 느껴졌고, 생채소 특유의 풀 맛까지 났다.
“건강해지는 맛이네요.”
“네. 지차체에서 나온 제품이라 공급가도 문제없을 겁니다.”
“계약하셨어요?”
“당연히 했죠. 하하. 핫딜 애들이 두리번거리길래 후다닥 해 버렸습니다.”
“잘하셨네요.”
그때.
“저리 안 가!”
“왜 그러세요?”
“저리 꺼지라고! 내가 너희 상대하려고 여기 나온 줄 알아?”
구석에 있던 부스에서 60대 노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말끔한 슈트를 입은 젊은 남자 둘이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 보죠.”
이진성 차장은 내 팔 사이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고 그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
세상에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노파의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부스 주변을 에워쌌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도대체?”
“내가 너희 같은 놈들만 보면 이가 갈려!”
젊은 남자 둘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노파는 그들을 힘껏 밀어냈다.
“그냥 맛있어서, 맛있다고 한 거잖아요.”
“내가 또 그 말에 속을 줄 알아?”
“속긴 뭘 속아요?”
“이것들이 진짜……. 빨리 안 가?”
노파는 화가 났는지, 신고 있던 슬리퍼를 집어던졌다.
남자들은 고개를 비틀어 이를 피해 냈고 힘없이 날아가던 슬리퍼는 하필 내 앞에 툭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굽혀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낡은 슬리퍼에서 들려오는 노파의 기억.
에이는 에이마켓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작년에 빼먹었다는 것은 오픈마켓인 에이마켓에 제품을 판매하면서 광고비를 쓴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하긴, 광고비에 따라 노출이 달라지는 오픈마켓의 시스템을 잘 모르면 돈만 내고 안 팔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하다.
“어? 최성진?”
옆에 있던 이진성 차장이 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에요?”
“네. 체인마켓에 있을 때 제 밑에 있던 친구예요. 지금은 에이마켓에 있을 겁니다.”
짧은 머리에 강직한 표정.
이진성 차장이 가리킨 최성진이라는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내가 들고 있는 슬리퍼를 달라는 신호를 했다.
“주시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슬리퍼를 건네주자, 그는 정중하게 노파의 발밑에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어르신, 에이마켓은 오픈마켓입니다. 판매 수수료가 낮은 대신 광고비를 지불하고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곳입니다. 누가 어떻게 판매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차이가 나는 커머스라 어르신이 착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뭐? 커머스가 뭐?”
“이번에 저를 믿어 주시면, 광고비 없이 상위 구좌를 노출해 드리겠습니다.”
“뭘 상위에 한다는 말이야?”
노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최성진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노파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그림을 그리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진성 차장에게 물었다.
“저 친구, 체인에 있을 때는 어땠어요?”
“한번 마음먹은 것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차 부장님이 내쳤죠.”
“왜요?”
“고집이 세니까요. 한 번은 작은 제조사 레토르트 가져왔는데, 그거 꼭 팔겠다면서 맨날 기획서를 가져왔었어요.”
“그래서요?”
“아시다시피 차 부장도 고집 하나는 알아주는 사람이라 끝까지 안 된다고만 헸었어요. 사실, 명분도 없는 반대였죠. 하여간 그렇게 한 달 내내 씨름을 하다가, 차 부장이 업무 성과가 낮다면서 내쳐 버렸어요.”
차주영 부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마켓 프레시 초기에 내가 들고 온 상품에도 무수히 많은 반대를 했으니.
“흠……. 차장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왜요? 관심 있으세요?”
“네. 요즘 친구들이랑 다른 거 같아서요.”
“자리 한 번 마련해 볼까요?”
“네. 좋죠.”
모여 있던 사람들은 싸움이 끝났다 생각하고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꿋꿋이 서서 최성진을 바라봤다.
궁금했다.
그냥 돌아서면 그만인데, 머리끝까지 화가 난 노파를 살살 달래가며 설명하는 저 모습이 궁금증을 만들어 냈다.
제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오기일까?
그것도 아니면 에이마켓에 대한 애사심 때문일까?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