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6
16. 일이 아닌 사람에 매달린 사람
“이사님 안 계십니다.”
김지영 이사의 비서가 나를 보며 말했다.
“멀리 가셨나요?”
“대표님 호출받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팀장님 오시면 꼭 기다려 달라는 말씀 남기셨습니다.”
내가 올 줄 알았던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고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매번 앉던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나, 다소 지친 표정의 그녀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요. 뭐 적당히.”
“그래. 차 한 잔 줄까?”
“그것보다 이사님. 어떻게 됐습니까?”
“숨넘어가겠다.”
김지영 이사는 씩 웃으며,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차를 가져오라는 말을 하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남양주 창고 센터장은 해고. 차기영 부장은 권고사직. 정진택 팀장은 6개월 감봉으로 마무리 지었어.”
정 팀장이 수입한 고구마 큐브는 4억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고, 폐기해야 하는 우리 팀 제품들은 2억을 조금 넘었다.
모두 합쳐서 6억의 손실.
회사의 피해가 크기에 책임자의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표이사의 아들인 정진택 팀장은 몇 달 감봉이라니…….
그것도 이번 일의 시작인 그가.
나는 공정하지 못한 징계라 생각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번 일의 시작은…….”
김지영 이사는 한 손을 올려 내 말을 끊어 냈다.
“정 팀장은 대표님의 하나뿐인 아들이야.”
“…….”
“대표님이 간곡히 부탁하셨어. 그리고 조만간 너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기로 했고.”
“그래서 그걸 수락하셨다는 겁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에는 이대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쨌든 차 부장이 MD 사업부의 최고 관리자잖아. 그러니까 그에게 징계를 내리는 게 맞는 거지.”
김지영 이사의 말이 맞다.
문제가 생기면, 담당 부서장이 책임을 지는 것이…….
하지만 이번 일은 정진택 팀장의 무리한 사입 건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이사님. 이번 일의 시작은 정진택 팀장입니다.”
김지영 이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고구마 큐브의 수입을 컨펌한 것은 차 부장이야. 그리고 그걸 숨기고, 피자 프랜차이즈에 넘기도록 알선한 것도 차 부장이고.”
“이사님은 정진택 팀장을 왜 감싸는 겁니까? 원래 그하고 아는 사이였나요?”
“왜? 내 사심이라도 들어갔을까 봐?”
“네.”
김상민 회장과 정근영 대표는 오랜 친구 사이로 그들의 아이들도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심이 이번 징계를 결정지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김지영 이사는 등을 기대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후……. 솔직히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네. 너도 알지? 정 대표님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시거든. 진택이는 매주 정 대표님의 손을 잡고 우리 집에 놀러 왔었어. 아버지도 붙임성 있는 진택이를 귀여워하셨지.”
“…….”
“원 팀장, 이번엔 이 정도로 마무리 짓자. 정 팀장의 징계까지 만들려면 대표님과 아예 등을 져야 해. 그리고 책임자들에게는 가장 높은 징계를 결정했잖아. 응?”
내 두 손을 꽉 잡는 김지영 이사.
정 대표와 더 싸워야 한다는 그녀의 상황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두 번이 아니면 세 번, 그것도 안 되면 끝이 날 때까지 매달릴 것이다.
그게 바로 나 원지훈이니까.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마워. 이해해 줘서.”
“고구마 큐브는 전량 폐기하고, 저희는 새로 사입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진행해. 손실이 있지만, 그래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우리 분위기 좋잖아.”
“알겠습니다.”
“아 참! 부장 자리는 당분간 공석으로 가기로 했어. 이번 분기 실적이 가장 높은 팀장을 부장으로 올릴 거야. 우리 회사 팀장들 맨파워가 좋잖아.”
마켓 프레시 오픈 후.
가장 높은 매출을 찍은 것은 우리 특판 팀과 김태하의 가공식품 팀.
그리고 가장 많은 수량을 판매한 팀은 장선영 팀장의 음료팀이다. 음료의 경우 단가는 낮아도 마진이 워낙 좋았기에,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박대영 차장은요?”
“너도 알다시피 박 차장은 그럴 깜냥이 되지 않아.”
박대영 차장이 능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박 차장의 일은 차 부장의 말에 맞장구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태하도 정 팀장과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요?”
“태하? 걔는 회사 이전에 정 팀장을 본 적이 없을걸? 그리고 정 팀장도 태하가 내 동생이란 걸 모를 거야.”
정진택 팀장은 태하와 나보다 5살이 많다.
충분히 봤을 법도 한데…….
“그게 무슨 말이죠?”
“너 몰랐구나?”
“뭐를요?”
“태하가 집에 처음 온 게 10년 전인가? 아마 걔가 고등학교 막 들어갔을 때였을 거야. 태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집으로 데려오셨거든. 그리고 대학을 갈 무렵에는 바로 집을 나가 버려서, 솔직히 태하랑은 깊은 대화도 나눠 본 적이 없어.”
“……!”
몰랐다.
밝고 유쾌한 그에게 이런 그늘이 있는지를…….
그저 집에서 귀여움을 받을 늦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김태하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물건을 수없이 더듬은 나도 전혀 읽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김지영 이사는 놀란 내 표정을 살피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더 친해져 보려고 했는데, 태하가 벽을 치더라고.”
“그랬군요.”
“난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는데.”
“몰랐네요. 그래도 그놈 참 밝게 잘 컸네요.”
“그래. 그러니까 네가 좀 잘해 줘.”
“예……. 그래야겠어요.”
* * *
자리로 돌아온 나는 김태하가 준 안마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그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파티션 너머를 내려다봤다.
자리에 없는 김태하.
나는 안마기를 목에 걸치고, 그가 자주 가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어? 팀장님!”
믹스 커피를 타고 있던 이은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불렀다.
“은지 씨 여기 있었어?”
“네. 믹스 커피가 땡겨서요. 팀장님도 한 잔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태하는?”
“오빠요?”
태연한 표정으로 오빠라고 부르는 이은지.
그녀에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오빠? 이제 걸렸다고 내 앞에서 편하게 부르시겠다 이건가?”
“아…… 아뇨.”
“둘이 언제부터 그런 거야? 태하가 먼저 고백한 건가?”
“네…….”
“은지 씨는 언제부터 태하가 좋았어?”
“그게…….”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양 볼이 빨개진 이은지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부터요.”
“처음부터? 그래 태하가 좀 생기긴 했지. 나만큼은 아니긴 해도, 그 정도면 봐 줄 만한 수준이긴 하지.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성격 지랄 맞은 거 빼면 뭐…….”
이은지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많이 친하신가 봐요.”
“왜?”
“오빠도 똑같이 말했거든요. 원 팀장님 성격 빼고는 봐 줄 만하다고요.”
“오호라, 그래?”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나는 주머니를 뒤지는 척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 휴대폰 두고 왔나 보네. 은지 씨 휴대폰 가져왔어? 태하 좀 불러줄 수 있을까?”
“네?”
“이거 안마기 빌린 건데 돌려주려고 말이야.”
“아……. 네.”
“아 참, 내가 아니라 은지 씨가 부르는 것처럼 해 봐.”
“왜요?”
“얼마나 빨리 오는지 좀 보려고. 은지 씨도 궁금하잖아. 그지?”
이은지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잠시 후.
“자기양!”
김태하가 짧은 혓소리를 내며,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깅 왜 이렇게 늦었엉? 내가 대따 보고 시퍼능데! 무려 3분 27초나 걸렸떵!”
이은지가 아닌.
내 혀짧은 대답에 김태하가 인상을 쓰고 걸어왔다.
“뭐야? 그 더러운 말투는?”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은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댔다.
나는 김태하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더 심한 콧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야 자기양. 나 믹뜨 커피 하나 타 주랑.”
“너 믹스 커피로 맞아서 죽은 사람 얘기 들어 봤어?”
“아닝.”
“그럼 곧 보게 될 거야. 은지 씨 문 잠가. 내가 이놈 오늘 죽여 버릴 테니까.”
* * *
이틀 후 오후 9시.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하연두.
그리고 건강식품 팀의 몇몇 직원들이 전부였다.
“연두 씨! 아직 멀었어?”
“아뇨, 금방 끝납니다.”
“그래. 다 끝나면 말해. 집에 바래다줄 테니까.”
“정말요?”
“응. 밖에 어둡잖아.”
그때.
차기영 부장이 위가 뻥 뚫린 노란 상자를 들고 조용히 걸어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가다니…….
모두 퇴근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차 부장은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고, 정확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말없이 씩 웃는 차기영 부장.
이러면 안 되는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걸쳐 입고,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하연두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미안. 나 볼일이 좀 생겨서. 오늘은 이걸로 택시 타고 가.”
“아뇨! 괜찮아요.”
“아니 꼭 타고 가. 그리고 택시 타기 전에 번호판 사진 찍어서 나한테 보내고. 안 그러면 나 진짜 화낸다!”
“예. 그럴게요.”
나는 사무실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차 부장에게로 달려갔다.
“부장님. 소주 한잔하시겠습니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차기영 부장.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좋지. 그래도 마지막에 날 배웅해 주는 건 자네밖에 없군.”
“박 차장은 어디 갔나요?”
“아까 오후부터 부리나케 이사님들 방을 찾아다니더군. 뭐,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차 부장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박대영 차장.
그는 자신만의 생존법으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것이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면 양주나 와인도 사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왕 얻어먹는 거 비싼 술 좀 얻어먹어 볼까?”
청담동 인근의 고급 바.
이곳은 편의점에서 4~5만 원대의 앱솔루트 보드카 700mL를 무려 50만 원에 파는 곳이다.
우린 자리에 앉아 말없이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술만 마시던 차 부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원 팀장.”
“네, 부장님.”
“난 말이지, 자네가 참 부러워. 요즘 자네를 보면서 나도 젊었을 때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
“근데 가만 생각해 봤더니, 난 아니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기 싫어서 일이 아닌 사람에 매달렸더라고.”
“후회하십니까?”
“물론 후회하지. 하지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걸 어쩌겠나.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뭐.”
차 부장은 자신의 스트레이트 잔에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 한입에 털어 넣고 미간을 구겼다.
“내가 가기 전에 충고 하나 해도 될까? 이건 술값 대신 주는 거야.”
“네, 말씀하세요.”
“김지영 이사, 너무 믿지 마.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야망이 큰 여자야. 아주 무서울 정도로 말이야.”
“예. 새겨듣겠습니다.”
차 부장은 다시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술을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참 재미있는 회사야. 웃대가리 셋이 이빨을 감추고, 죽일 것처럼 싸우잖아. 오늘도 얼마나 셋이 으르렁댔을까? 하하하.”
“그들이 싸우건 말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린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이라……. 흠……. 그래서 너랑 내가 다르다는 거야. 대표이사가 이겨 봐. 다음 MD 사업부 부장은 누구겠어? 정진택이 아닐까?”
“…….”
“회사는 말이지, 실력이 20% 줄이 80%야.”
안주도 없이 쓴 술을 연거푸 마시던 차 부장은 결국 그렇게 떠나갔다.
비틀거리며 걷던 그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일이 아닌 사람에 매달린 사람.
실력이 아닌 관계에 기댔던 사람.
그가 무너진 지금을 난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