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62
162. 환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그런 사람
일주일 후, BO푸드의 식품 연구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 이사님. 이거 꽤 괜찮은데요?
“그래요?”
이해용 대표가 보내온 새로운 테트라팩.
큰 기대 없이 BO 푸드의 제품 연구팀에 보내본 것인데…….
– 네. 상온에서 4일째인데 멸균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냉장은요?”
– 당연히 문제없죠. 영하 30도 냉동고에서 팽창 후에도 끄떡없이 버티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네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작품을 가져오신 겁니까?
“다행이네요.”
– 이 업체랑은 언제쯤 계약할 생각이세요?
BO 푸드의 제품 연구실 김재성 팀장.
보냉팩 개발 때 함께해 봤던 사람으로, 이렇게 설레발을 칠 사람이 아니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일주일만 더 지켜보죠.”
– 왜요? 이거 바로 시판해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확인해야 하는 것이 좀 있습니다.”
– 흠……. 네. 아참, 그리고 이거 바로 특허랑 상표 등록부터 하라고 하세요. 이거 진짜 작품이니까.
“네, 그러죠.”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지켜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내가 시간을 벌려는 이유는 이 새로운 테트라팩에 얽힌 계약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프로젝트를 지시했다는 최두영 본부장을 만나야 하는데…….
그를 소개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부를 천천히 내리며 확인했다.
그리고.
“대표님. 마켓 프레시 원지훈입니다.”
– 이사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튜나월드 대표이사 김종환.
우리에게 풀 콜드체인 시스템의 기술을 이전해 준 인물이다.
콜드체인 업무는 전략 기획부가 맡아서 했기에, 그와 통화를 하는 건, 거의 8개월 만이었다.
“잘 지내셨죠?”
–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
“네. 저희도 다 잘 지냅니다.”
– 갑자기 전화를 다 주시고 무슨 일 있나요?
“혹시 핫딜에 최두영 본부장님 아세요?”
– 아! 두영 형님이요?
두영 형님이라.
제대로 전화를 했구나.
커머스에 콜드체인이 탑재된 차량을 납품하는 그라면 만나 봤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친하신가 보네요.”
– 네. 아주 친하죠. 어제도 와인 한잔했습니다. 하핫, 근데 그분은 왜요?
“만나 뵙고 싶어서요.”
– 통했네요. 안 그래도 두영이 형님도 원 이사님 한번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래요?”
– 네. 바로 확인하고 전화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김종환 대표가 급하게 나를 불렀다.
– 이사님!
“네?”
– 소스 좀 주세요.
“소스요?”
– 네. 이번에 BO 커머스 주식을 좀 살까 하는데……. 지금이 고점인 거 같아서요.
지금 우리의 주가는 한 주당 67,200원
52,600으로 상장한 후,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다 현재의 수치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 에이, BO 대주주시잖아요.
“일단 지금 상황으로는 딱히 변동은 없을 거 같은데…….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 그거면 됩니다. 하하하
김종환 대표는 크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10분이 지나, 처음 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최두영 본부장의 번호임을 직감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원지훈입니다.”
– 최두영입니다.
오랜 시간 술과 담배에 시달려야만 나올 수 있는 탁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그가 말한 겨우 여섯 글자에서 크게 팽창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좋죠. 안 그래도 한 번은 뵈어야 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언제가 좋을까요?”
– 이사님이 잡으세요. 제가 맞추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도 괜찮을까요?”
– 네. 그러죠. 마켓 프레시가 일산에 있으니까, 중간 위치인 마포에서 뵙죠.
“네.”
– 8시. 스탠리 호텔 1층 커피숍으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예나 씨. 부장님들 회의 준비하라고 전해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 * *
오후 7시 40분.
스탠리 호텔 1층으로 들어섰다.
창가의 자리를 조용히 훑어보다 혼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오전에 걸려 왔던 최두영 본부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최두영입니다.
남자가 전화를 받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원지훈입니다.”
밝은 회색 슈트에 검은 넥타이.
이마가 보이도록 부드럽게 넘긴 머리에 테가 얇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입술이 가늘고 코끝이 뭉툭했으며, 커다란 눈망울 덕분에 매우 선한 사람처럼 보였다. 또한, 유난히 큰 귀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일찍 오셨군요.”
최두영 본부장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정중하게 그와 악수를 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 괜찮으십니까?”
“네.”
최두영 본부장은 손을 들어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내 얼굴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혹시 투비인터렉티브의 이해용 대표를 아시나요?”
“음…….”
최두영 본부장은 잠시 미간을 구기며 생각을 하는 척했다. 그리고 생각이 안 났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글쎄요.”
“테트라팩을 개발하는 것 같던데…….”
“아……. 맞아요. 이제 기억나는군요. 그쪽에 재능이 있어서 그렇게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핫딜과 계약된 용역이 아니고요?”
“네. 제 기억에는 스타트업 박람회에서 잠깐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그 친구는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함께 마주한 테이블에서도 궁금해하는 그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다. 그럼 태도를 바꿔 제품을 탐낼 수도 있다.
“좋은 친구 같아서요.”
“하하하 네. 제 기억에는 좀 어리바리했던 친구 같았는데, 원 이사님과 잘 맞았나 보군요.”
“어리바리요?”
“네, 그 나이 청년들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객기를 부리는 그런 거요.”
씩 웃으며 답하는 최두영 본부장.
순간, 화가 났다.
그의 말 한 마디에 1년을 투자한 이해용을 기억도 못하는 그에게 말이다.
나는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말하던 이해용을 떠올렸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확신하게 하였을까?
1년이라는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나는 실소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네?”
“이해용 대표는 본부장님의 말 한마디에 1년을 투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슨 결과가 나왔답니까?”
“…….”
“원 이사님도 아시겠지만, 원래 스타트업이라는 것이 다 그렇잖아요. 그냥 환상만 꿈꾸다 뒤늦게 현실로 돌아가잖아요.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원 이사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BO에서 자본이 없었다면 마켓 프레시가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 듣고 싶진 않군요.”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만하죠. 그럼 이번엔 제가 이곳에 나온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원 이사님. 더 큰물에서 해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바론으로 오신다면 지금의 자리보다 더 큰 위치와 스톡옵션을 준비해 드리죠.”
이런 사람이었구나.
많은 스타트업의 젊은이들이 꿈꾸는 목표가 겨우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는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한 번 들어나 보죠.”
“결정만 하시면 17%의 스톡옵션을 이사님께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걸 더 원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17%는 분명 많은 수치다.
BO 커머스에 합류를 결정했던 최구열 이사도 아마 저 정도의 보장을 받았을 것이다.
“많군요.”
“네, 강 회장님이 특별히 배려해 드린 겁니다.”
“그런 것 같네요.”
“아! 참, 그리고 원 이사님. 아직 젊으시니 제가 충고 하나 해도 될까요?”
“…….”
“환상과 현실은 다른 법입니다. 이제 BO의 환상에서 벗어나세요.”
환상과 현실이 다르다고?
아니, 틀렸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환상이 없었다면 현실도 없었을 겁니다.”
“……!”
“전 앞으로도 쭉 이 환상 속에서 살아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두영 본부장은 그런 나를 무시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분이셨군요.”
“…….”
“환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그런 사람.”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으로 해 두죠.”
“하하, 그래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최두영 본부장은 테이블 위의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 서 있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 걸어갔다.
마치, 중요한 조언을 해 준 사람처럼.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당하게 걷는 그의 모습에 순간 짜증이 났지만 침착하자는 말을 되뇌며 최두영 본부장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온 첫 번째 목적은 이미 이뤘다.
이제 두 번째.
기억을 들어볼 차례다.
마주한 테이블에서는 별다른 기억을 못 느꼈다. 테이블에 손을 올리는 횟수도 적었고 뒤로 한참 떨어져 앉아 있었으니까.
나는 커피 잔과 그가 입을 닦았던 냅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때 들려오는 기억.
김선녀 여사.
최두영 본부장은 분명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녀를 만나겠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자본금.
커머스를 오픈할 자본금이 아니면 그녀를 만날 이유가 없다.
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불안감에 김재열 이사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응?
“혹시 김선녀 여사님 퇴원하셨나요?”
– 어떻게 알았어? 그 연세에 복귀하신다고 하던데?
“그래요?”
– 응. 아무래도 손녀딸 두고 믿음이 안 갔겠지. 그 손녀가 이제 막 스물이 넘었었나?
“이사님 그럼 그쪽 움직임 좀 확인해 주세요.”
김재열 이사는 하품을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 하아……. 거긴 또 왜?
“어쩌면, 이건 정말 최악의 상황인데요. 김선녀 여사가 BO 커머스의 주식을 모두 팔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 뭐?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김선녀 여사가 가진 지분은 대략 15%.
상장하고 주식을 추가로 발행했기에 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 주가는 김선녀 여사가 매입한 단가의 3배 이상 올랐다.
만약 그녀가 주식을 팔고 바론으로 간다면?
BO 커머스의 15%나 되는 주식이 한 번에 빠진다면?
주가는 요동치고, 소액 주주들의 이탈이 시작될 것이다.
– 확실한 거야? 확실한 거냐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진짜 내가 요즘 조용하다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김선녀 여사가 주식을 현금으로 만들어서 바론의 새로운 커머스로 갈 거라는 말이지?
“네.”
– 그럼 얼마야?
“뭐가요?”
– 김선녀 여사 지분이 얼마나 있었지?
“15% 정도요.”
– 그럼 4천억이라는 말이야?
“네. 그 정도 될 겁니다.”
– 알았어. 일단 끊어 봐.
“무슨 수가 있어요?”
– 일단 돈 먼저 구해야지. 다른 방법 있어?
김재열 이사의 말이 맞다.
막을 수 없다면 돈을 구해야 한다.
시장에 나오는 주식을 바로바로 사들일 돈을.
나는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