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77
177. 사람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눈
* * *
목요일.
조리기구와 각종 식재료를 들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제조사들이 많은 날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깔끔한 종이 가방 하나만 든 사람들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의 공기 또한 이전과 달랐다.
오늘은 음식이 아닌, 진한 화장품들의 향이 가득했다.
“에취!”
벌써 몇 번째 재채기인지.
이런 냄새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성근 팀장이 힘들어했다.
“괜찮아요?”
“아……. 죽겠네요. 차라리 청국장 냄새가 더 좋겠어……. 에취! 헤에에에 에취! ……요.”
나는 티슈를 한 뭉치 뽑아 그에게 건넸다.
“오늘 외근 없어요?”
“있죠.”
“그럼 시간 좀 당겨서 만나고 와요. 오전에 다 끝날 거 같으니까.”
“네. 그래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화장품입니까?”
식품 카테고리만으로 국내 커머스 1위를 하기는 어렵다.
이건 나와 김지영 대표.
그리고 모든 이사들이 공감하는 바였다.
그래서 우리가 결정한 두 번째 카테고리는 코스메틱.
매주 열리는 명품 기획전이 꾸준한 성과를 보여 패션으로 도전해 볼까도 했지만 새로 오픈한 디몰이 더 많은 패션 카테고리들을 입점시키면서 우리의 의지를 꺾어 놨다.
식품 카테고리에서 디몰을 압도했지만, 오랫동안 패션몰의 강자로 있던 그들의 점유율을 가져오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번에 브랜드 70여 종이 더 들어갔던데, 디몰을 이길 수 있겠어요?”
“흠……. 힘들겠죠. 그리고 패션 MD들, 디몰이 싹 데려갔잖아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디몰이 코스메틱 사업을 먼저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작하려고요.”
“하긴, 코스메틱 MD는 패션보다 구하기 쉽겠네요. 근데 오늘 제조사들은 왜 부른 건가요?”
“트렌드를 좀 보려고요.”
“트렌드요?”
“네. 민정 팀장님의 아이디어입니다. 먼저 트렌드를 알아야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 민정 팀장님이 원래 코스메틱 MD였죠?”
김민정 팀장.
그녀는 그룹폰에서 코스메틱을 주로 했다.
하지만 이는 3년 전의 이야기.
우리에게는 코스메틱의 트렌드를 읽는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마성근 팀장과 대화를 하는 사이, 검은 파일 철을 끌어안은 이예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사님. 도착하셨습니다.”
“아, 그래. 가자.”
나는 마성근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 * *
“여성들의 니즈(Needs)가 뭔지 아세요?”
긴 다리를 꼬고 앉은 거만한 표정의 30대의 여성.
김연지 이사.
전문 코스메틱 커머스의 총괄 MD로 트렌드를 읽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풍기는 진한 향기가 예사롭지 않았고,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글쎄요. 제가 잘 몰라서 이렇게 모신 겁니다.”
“더마코스메틱, 이게 트렌드입니다. 더마톨로지(Dermatology)와 화장품(Cosmetic)의 합성어로 이제 코스메틱은 과학이라는 말입니다. 바르는 유산균, 프로바이오틱스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아……. 아뇨.”
“피부에 자극이 없는 성분은 당연하고, 이제는 아예 면역력까지 키워 줘야 하는 세상이 된 겁니다.”
“피부에 면역력이라……. 참 심오하네요.”
그녀와의 대화는 어려웠다.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와 수많은 얘기를 나누며, 이 의문점을 지우지 못했다.
“그럼 결정되시면 연락 주세요.”
김연지 이사는 말을 마치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와 악수를 하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텀블러를 든 김민정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김연지 이사님이시네요.”
“아세요?”
“잘 알죠. 이 바닥에서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우리 새 카테고리는 코스메틱으로 굳어진 건가요?”
“네.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흠……. 그렇군요.”
뭔가 걱정스러운 표정의 김민정 팀장.
나는 기지개를 크게 켜고, 허리를 좌우로 틀며 물었다.
“왜요? 무슨 걱정 있어요?”
“아니요. 그냥……. 영 불안해서요. 우린 식품만 해 왔잖아요.”
“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찾아야죠. 트렌드를 잘 읽는 사람을요.”
“이사님은 잘 찾으실 겁니다. 특별한 눈이 있으시잖아요.”
“특별한 눈이요?”
“네. 사람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눈이요.”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이 사람 좀 잘 찾아줬으면 좋겠네요. 오늘 미팅 온 제품들은 좀 어때요?”
“글쎄요. 죄다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 이러고 있네요. 예전에 한참 달팽이 크림 유행했던 것처럼요.”
“그게 트렌드 아닌가요?”
“아니요. 제가 생각하는 코스메틱은 식품이랑 좀 많이 달라요. 유행이 빨라서 트렌드를 따라가면 겨우 몇 달 판매하고 끝이에요.”
“그러면?”
“트렌드를 만들어 낼 사람이 필요하죠.”
“트렌드를 만든 다라…….”
트렌드를 만들어 낼 사람.
김민정 팀장의 맞다.
코스메틱 후발 주자인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남이 만든 트렌드를 따라갈 사람이 아닌, 만들어 낼 사람이.
나는 씩 웃으며, 내 방으로 향했다.
* * *
며칠 후.
내 방을 찾아온 코스메틱 전문 MD들의 수는 열을 넘었다.
모두가 트렌트를 빠르게 맞춰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맞춰 갈 사람이 아닌 트렌드를 선도할 사람이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까?
나는 책상에 앉아 코스메틱 관련 자료들을 확인했다.
그때, 이예나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원지훈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여성.
20대인지 30대인지 가늠을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요. 원지훈 이사님.”
누구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명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내 명함을 먼저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샛노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
(주)제이스킨
대표이사 유이나
—
이름을 봤는데도 모르겠다.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데…….
나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저 기억 못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예전 원스몰 때 저희 제품 판매했었잖아요. 제이 에멀젼이요.”
제이 에멀젼이라는 말에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스쳐 갔다.
원스몰 당시,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기 위해 여러 제품을 판매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제이 에멀젼을 판매했었고, 매출은 정말 최악이었다.
또한,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반품과 클레임.
제이 에멀젼은 내 MD 인생 최악의 제품이었다.
“아……. 기억납니다.”
“네. 기억하시죠? 저희 제품이 역대 최악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솔직했구나.
덕분에 기억이 더 선명해졌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하하……. 제가 그렇게 솔직했나요?”
“네. 아주 솔직하셨죠. 막 사업을 시작하는 저에게 팍팍 상처를 줄 만큼.”
미간을 좁히며 답하는 유이나 대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덕분에 오기가 생겨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으니까요.”
“아……. 그러셨나요?”
“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들고온 파일 철을 내게 건넸다.
“이거 기억나세요? 그 당시 이사님께서 저희에게 정리해 주신 파일인데.”
“제가요?”
나는 파일을 확인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파일 철을 펼쳐주며 직접 확인하라는 손짓을 했다.
—
1. 발림성이 좋지 못함. 좀 더 끈끈한 성분이 들어갔으면 좋겠음.
2. 보습력이 나쁘며, 성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짐.
3. 가격이 합리적이긴 하나, 용기의 디자인이 좋지 못함.
……
76. 허브향이 너무 강해 거부감이 생김.
—
번호와 함께 빼곡히 적힌 문제점들.
기억난다.
구매한 고객들과 직접 통화하면서 장단점을 받아 적었던 것이.
“누군지 참 열심히 했네요.”
“네. 맞아요. 참 열심히 하셨죠. 저희는 이사님 덕분에 제품을 보완했고,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제품이 나왔습니다. 요즘 제이 에멀젼 모르는 여성분이 없을걸요?”
“그런가요? 잘되셨다니 다행이네요.”
“네. 그때 깨달았죠. 유행을 앞서 가려고 억지로 제품의 유분기를 줄이고, 끈적임도 없앴는데 그런 변화가 오히려 독이 됐다는 것을요.”
“…….”
“누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코스메틱도 식품과 똑같아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처럼 꾸준한 점이 필요하다고요.”
“그쪽도 참 어렵네요.”
“네. 어렵죠.”
나는 그녀를 자리에 앉도록 하고, 구석으로 가서 차를 타며 물었다.
“녹차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근데 제이 스킨은 어쩌고 오늘 오신건가요? 저희 판매할 제품이 아니라, 코스메틱 총괄 MD를 뽑는 건 아시죠?”
“네. 잘 알아요. 이사님이랑 다시 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저랑요?”
“네. 이사님. 코스메틱도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와 같다는 말. 누가 한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내가 머뭇거라자, 그녀는 재빨리 답을 했다.
“바로 원지훈 이사님이 해 줬던 말입니다.”
“제가 그런 명언을 했다고요? 와. 꽤 멋진 놈이었네요.”
“네. 멋있는 분이셨죠.”
내 장난에 유이나 대표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찻잔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고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만 하세요. 부끄러우니까.”
“부끄럽긴요. 사실인데요 뭐.”
“그럼 지금 회사는 어떻게 하고요?”
“마켓 프레시에서 값을 잘 쳐 주면 여기에 팔고, 아니면 뭐 다른 곳에 팔아 봐야죠.”
나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 공유한 테이블에서 그녀의 기억을 들었다.
그냥 회사를 매각하러 온 것인가?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직설적인 질문을 했다.
“저희에게 회사를 매각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요. MD가 되고 싶어서 온 겁니다. MD는 상품을 기획하고 포장하는 사람이잖아요. 이사님이 저에게 해 준 것처럼 저도 남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결국 트렌드를 만드는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처럼 변하지 않고 꾸준하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이사님들과 상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민정 팀장이 놀란 눈을 하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유이나 대표도 온 건가요?”
“알아요?”
“물론 잘 알죠. 제이 스킨 연매출이 300억 넘을 걸요? 에멀젼 하나만 가지고.”
“다른 라인은 없어요?”
“네. 다른 라인들 생산할 법도 한데, 에멀젼 하나만 3년 이상을 가져갔어요. 물론 제품은 분기마다 업그레이드되긴 했지만.”
“이건 만약인데. 우리가 제이 스킨을 인수하면 어떻게 될까요?”
“에멀젼 하나의 라인으로는 부족해요. 다른 라인들 연구와 개발 비용이 꽤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지원을 해 준다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건 특별한 눈을 가진 이사님이 판단하셔야죠.”
“민정 팀장님. 내일 점심 약속 없죠?”
“네.”
“그럼 약속 잡지 마요.”
한 번의 만남으로 결정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그녀에 대해 들었던 기억도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꺼내 유이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혹시 내일 점심 괜찮으세요?”
– 네. 약속은 없어요.
“그럼 내일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저희 쪽 직원이랑 같이요.”
–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