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80
180. 우리의 새로운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식품공장.
각종 장비 위로 뽀얀 먼지만이 가득했다.
“한때는 이 작은 공장에서 50명이 넘는 인원이 일했습니다.”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남자.
쑥개떡, 찹쌀떡 등을 메인으로 하는 오양 식품의 민용식 대표다.
씨앤코리아의 최무진 대표는 바론에게 레시피를 뺏긴 회사가 많다며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지금은 생산을 중단한 겁니까?”
“네. 저희 브랜드로 유통을 할 수 없으니까요.”
작은 제조사가 바론의 생산과 유통을 이길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오양 식품의 민용식 대표도 명확한 근거를 들지 못했다.
나는 공장의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그리고 멈춘 설비들 위의 먼지를 오른손으로 조용히 쓸어내렸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했던 기억.
최무진 대표의 말이 맞는다면, 바론이 이들의 행복을 훔쳐 간 것이다.
고개를 떨궜다.
들려오는 기억들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그때,
“김진준. 그놈입니다. 그놈이 이 공장에도 찾아왔었습니다.”
내 옆으로 다가온 씨앤코리아의 최무진 대표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김진준에 대한 의심만 연거푸 했다.
확실한 근거도 없으면서.
“그래요?”
“네. 그놈입니다. 민 대표님! 그놈 얘기 좀 해 주세요!”
최무진 대표의 외침에, 민용식 대표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 철을 내게 건넸다.
“1년 전, 저희 호두 찹쌀떡을 유통해 보겠다면서, 공장을 증설하자고 했습니다. 물론 설비와 공장 부지에 대한 것은 바론에서 전부 투자하겠다고 했고요. 그때, 저희 회사로 온 책임자가 김진준 차장입니다.”
“이건 뭡니까?”
내가 얇은 파일 철을 가리키자, 그는 한 페이지를 펼치며 말했다.
“앞에는 바론과 메일로 주고받은 내용이고, 뒤에는 김진준 차장이 메모한 내용입니다.”
“메모요?”
“네. 수첩을 안 가져왔다면서 공장장에게 이면지를 빌려 갔었습니다. 당연히 가져갈 줄 알았는데, 한 장은 휴지통에 버리고 갔더라고요.”
“이걸 지금까지 보관하신 겁니까?”
“네. 바론이 무슨 이유로 유통 계약만 맺고 투자 계약을 거절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김진준 차장이라는 그 사람, 혼자 온 겁니까?”
“네. 첫날만 하동영 이사와 함께 왔고, 이후로는 김진준 차장만 왔습니다.”
고개를 숙여 문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공장 설비의 간략한 그림과 설명.
담당하는 직원의 이름과 공정에 들어가는 시간 등.
종이에 쓰인 내용으로만 유추하면, 공장에 투자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안에 담겨 있는 기억은 달랐다.
정말 레시피를 훔치러 온 것일까?
이 기억만으로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단 한 명이, 그것도 일주일 만에 제조사의 비밀 레시피를 훔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어쩌면 남의 기억을 듣는 나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고개를 들고 최무진 대표를 불렀다.
“최 대표님! 근처에 다른 제조사도 있다고 하셨죠?”
“네. 기린 어묵이요.”
“그쪽도 가보죠.”
고개를 돌려 민용식 대표를 바라봤다.
“민 대표님. 혹시 제품 샘플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야……. 가능하지만. 저희 공장이 멈춰 서…….”
“오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샘플을 확인하고 제품만 괜찮다면 계약을 해 보고 싶습니다.”
“후……. 그건 힘들 겁니다. 바론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2년 후라면 몰라도…….”
3년짜리 유통 독점 계약서.
이 때문에 자신들의 브랜드로 출시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
“대표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브랜드는 저희 마켓 프레시로 갈 겁니다.”
“PB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민용식 대표는 두 손을 뻗어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김진준이라는 사람이 남긴 종이에서 들려온 기억.
그 기억만 놓고 본다면, 오양 식품의 찹쌀떡은 분명 다른 곳과 차별화되어 있다. 또한, 대한민국 식품 제조사 1위 바론이 접근할 정도면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침착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저희는 냉정하게 평가할 겁니다.”
“네. 그러셔야죠. 공정하게 평가해 주십시오. 분명 저희 제품에 만족하실 겁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대하죠.”
* * *
두 번째로 찾은 기린 어묵의 사무실.
3대째 이어 온 비법으로 잡내를 잡고, 어묵의 두께가 얇아 인기가 많았던 곳이다.
다행히 그들은 바론과 유통계약을 하지 않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론에서 출시한 얇은 어묵 때문에 70% 이상 매출이 빠진 상태였다.
“3개월 전에 대법원까지 가서 결론이 났습니다. 무혐의로요.”
“…….”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어묵을 얇게 펴는 것은 우리만 가진 기술입니다. 특별한 설비가 없이는 절대로 이렇게 대량 가공할 수는 없습니다.”
기린 어묵의 김해일 대표는 고개를 떨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테이블 끝에 수북이 쌓인 파일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때 증거로 냈던 자료들입니다.”
“이렇게 많이요?”
“변호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해서요.”
나는 소파에 앉아 그가 내밀었던 자료들을 살폈다.
일단, 김진준이라는 사람이 투자 담당자로 나왔다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레시피를 훔쳤다는 확실한 근거는 보이지 않았다.
“김진준. 그놈입니다. 그놈!”
내가 자료를 살피는 사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는 김해일 대표.
그도 김진준이라는 사람의 짓이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증거가 있나요?”
“투자가 철회되고 저희 식품개발팀의 최 과장이 퇴사했습니다. 좀 더 알아보니까 최 과장 그놈, 바론 식품개발팀에 다니고 있더라고요.”
“그럼 최 과장이라는 사람의 짓 아닌가요?”
“아니요. 김진준의 짓이 분명합니다. 최 과장은 김진준과 형 동생을 하고 지냈습니다.”
김진준이라는 사람이 최 과장을 꾀어 낸 것일까?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 천천히 질문을 이었다.
“최 과장이라는 분이 기린의 레시피를 전부 알고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놈이 저희 회사에 다닌 것은 겨우 3개월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진준이라는 겁니까?”
“네. 그놈이 확실합니다. 여기, 여기 좀 보세요.”
김해일 대표는 수북이 쌓인 자료들 속에서 노란 파일 철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안에 내용을 넘겨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건 김진준이가 최 과장에게 보내려던 메일인데, 실수로 저희 담당자 하나를 참조했었나 봅니다.”
—
탈유를 마친 제품의 냉각 온도가 필요합니다.
기린은 영하 30도 이하로 급랭하는 것 같은데, 확인 부탁합니다.
성형과정에서 반죽기에 들어가는…….
—
투자를 위한 질문인지, 레시피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인지…….
이거 참 아리송하다.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내용이다.
나는 유리 벽 뒤로 비어 있는 책상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직원을 많이 줄이셨나 봅니다.”
“김진준 그놈이 바론에 복귀하고 일주일 만에 투자를 못하겠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바론에서 얇은 어묵을 출시했습니다.”
“…….”
“직원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100명 남짓한 작은 회사가 똑같은 제품을 들고 대한민국 1위 회사를 상대해야 하는데…….”
“네. 이해합니다.”
“제가 오죽했으면 그놈이 쓰던 책상과 의자는 창고에 버렸겠습니까? 재수 없는 놈. 아직도 그놈 얼굴이 밤마다 꿈에 나옵니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파견을 나왔다면 자리를 배정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상과 의자, 사무집기에는 김진준이라는 사람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김해일 대표에게 물었다.
“창고에 좀 가 볼 수 있을까요?”
“왜요?”
“김진준이라는 사람이 썼던 책상과 의자를 좀 보고 싶어서요.”
“그건 왜요?”
“잠깐이면 됩니다.”
내 말에, 김해일 대표는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나는 씩 웃고 그의 뒤를 따라 지하 창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과 의자의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사무집기들을 오른손으로 훑었다.
책상과 의자에서 들려오는 추악한 기억들.
이로써 나는 확실할 수 있었다.
바론은 처음부터 레시피를 훔치기 위해 접근했고, 김진준이라는 그 사람이 이를 지휘했다는 것을.
나는 고개를 돌려, 팔짱을 끼고 있는 김해일 대표에게 물었다.
“아까 얘기했던 최 과장이라는 사람이요. 혹시 이름이 상엽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김해일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나는 서랍 안에 있던 최상엽이라 적힌 명함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여기 명함이 있어서요.”
“아……. 맞습니다. 최상엽. 바론 창원공장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최무진 대표를 불렀다.
“최 대표님. 김진준이라는 사람 연락처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네. 네.”
최무진 대표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번호부를 검색하고 번호를 불러줬다.
나는 그 번호를 그대로 휴대전화에 받아적은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김진준 차장님이십니까?”
– 네 맞습니다. 어디시죠?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에 따뜻한 음성.
영업하기에 가장 좋은 톤의 목소리였다.
“저는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 아! 원지훈 이사님. 압니다. TV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로…….
“혹시 잠깐 나와서 통화 가능하실까요?”
–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1분여 지나, 김진준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 네. 말씀하세요.
“시간 되시면 뵙고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 제가 바론에 근무하는 건 아시죠?
“네. 그래서 연락을 드린 겁니다. 좋은 재능을 잘 못 쓰시는 것 같아서요.”
– 흠…….
“전화로 길게 말씀드리긴 어렵고, 얼굴 보면서 얘기하시죠.”
경쟁사의 이사 직함을 단 사람이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온다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스카우트하려 하는 것은 아니겠냐고.
– 논현역 3번 출구 쪽에 큰 커피숍이 있습니다. 내일 저녁 8시에 뵙죠.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김해일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혹시 저희가 PB를 제안 드려도 될까요?”
“마켓 프레시의 PB를요? 그래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하죠.”
“샘플을 보내 주시면, 저희 MD들과 테스트를 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특별한 레시피로 성공을 목전에 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론이라는 공룡에게 자신들만의 레시피를 뺏겼다.
투자라는 달콤한 말에 속아, 자신들의 무기를 내준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아야겠다.
그리고 이들의 제품은 이제 우리의 새로운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