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9
19. 그냥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
일주일 후, 그리고 또 일주일 후.
서보미 실장은 홈페이지에 접수하고 남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경쟁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보였지만, 오랜 기간 연구를 한 다른 식품 회사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맛이 좋으면 제품의 단가가 올라갔고, 제품의 단가를 낮추면 맛이 형편없어졌다.
일부러 심한 말도 해 봤고, 보는 자리에서 음식을 뱉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제품을 보완해 왔다.
“고래식품의 서보미 실장이요.”
함께 미팅한 하연두가 회의실에서 나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언제까지 저럴까요? 솔직히 경쟁력 떨어지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나라고 별수 있어? 홈페이지에 접수하고 시간 배정받아서 오는 거잖아. 내가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딱해서요. 저번 주에 화장실에서 봤는데, 울었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
“네. 저랑 눈 마주치고 급하게 웃는데, 눈이 퉁퉁 부어 있었어요.”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연두 씨 먼저 들어가. 난 옥상에 좀 갔다가 갈게.”
옥상에 올라와 곧바로 김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언제까지 서 실장 보낼 건데?”
– 응? 서 실장이 아직도 그러고 있어?
“몰랐어?”
– 몰랐어. 지훈아 내가 1시간만 있다가 전화할게! 나 라운딩 중이야.
“야!”
뚜우. 뚜우.
끊어진 전화.
어이가 없었다.
부하 직원의 손은 상처투성인데.
사장이라는 사람은 손에 골프채나 쥐고 있고.
“커피 한잔할래?”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옆으로, 김태하가 다가왔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옆에 앉았다.
“아니, 아까 마셨어.”
“하늘 참 좋다. 무슨 고민 있어? 왜 똥 씹은 표정이야?”
“김민우 기억나지?”
“김민우? 그게 누구야?”
“고등학교 때, 일진 애들 뒤에서 수발들던 애. 내가 기미 상궁이라고 불렀던 애 기억 안 나?”
“아! 기미 상궁? 걔가 왜?”
“얼마 전에 만났어.”
나는 김민우와 서보미 실장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했다. 김태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다가 씩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예뻐?”
“야! 그게 아니잖아!”
“예쁜가 본데? 이렇게 네가 신경 쓰는 거 보니까.”
“아니라고 했다.”
김태하는 웃음을 빼고, 진지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넌 꼭 사람 관계에 선을 긋더라. 그거 MD라는 특별한 사명감이냐? 그리고 마켓 프레시에 입점시키는 게 꼭 답이야? 그거 말고도 네가 해 줄 수 있는 거 있잖아. 안 그래?”
태하의 말이 맞다.
난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동정인지.
좋아하는 감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매주 찾아오는 게 귀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태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원지훈. 그냥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 그걸 받고 안 받는 건, 서 실장이라는 사람이 판단하는 거야.”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서보미 실장은 어김없이 보완한 제품을 들고 왔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 마음을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서 실장님.”
“어떠세요? 저번에 미나리가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해서, 이번엔 좀 뺏어요. 고수를 넣은 건 괜찮죠? 제가 리서치를 보니까 고수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끊어 냈다.
“실장님. 다른 식품 회사들은 전문 연구진들이 레토르트(간단 조리가 가능한 식품)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근데 실장님은 전문가가 아니고, 경험도 없어요.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들어 보니 고래식품은 건조가 메인이라던데, 신제품 개발보다는 납품처를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뺏었죠?”
“왜 그렇게 신제품에 목을 매는 겁니까? 도대체 왜요?”
“하고 싶으니까요.”
서보미 실장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가져온 제품들을 가방에 담았다. 옆에 있던 하연두는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회의실을 나가려는 그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양지푸드 함중식 사장님입니다. 냉동 라인이 괜찮다는 건 서 실장님도 아실 겁니다. 이번에 레토르트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데, 제품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면 이직하는 것도 생각해 보세요.”
“……!”
“전화는 해 놨습니다. 이제 선택은 서 실장님이 하시면 됩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김태하의 말처럼 이제 그녀가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등을 돌려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한참 후, 가방을 어깨에 멘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떠났다.
* * *
그 이후, 고래식품의 서보미 실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나는 김대성과 함께 양지푸드를 찾았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공장 구석에 있는 컨테이너의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사장님! 수량 또 빵꾸 났잖아! 이번 달에 12만 개 찍어달라고 말한 거 또 까먹었죠?”
식사하던 함중식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아이씨! 원 팀장! 맨날 등장이 왜 이래?”
“왜요?”
“놀랐잖아! 내가 너 때문에 제명이 못산다.”
“만두! 만두! 만두 달라고요!”
내가 소리치자 함 사장은 귀를 틀어막으며 미간을 구겼다.
“아우, 귀 따가워. 진짜 원 팀장은 내 동생이었으면 나한테 맞아 죽었어.”
“어이쿠? 난 사장님 같은 형 둔 적 없거든요? 당장 이번 주에 1만 개 더 들어와야 해요. 빨리빨리 내놓으라고요!”
“알았어. 알았어. 이따 밤에 보낼게.”
1만 박스를 하루 만에 찍어 낸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진짜? 하루에 1만 박스가 가능해요?”
“당연히 불가능하지. 저번 주에 생산한 거 창고에 있어. 내가 요새 제품 개발하느라 맨날 밤을 새운다. 그래서 보내는 걸 깜빡했네?”
“레토르트요?”
사실 그녀가 이직했는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결과는 어떤지 등이 궁금했다.
함 사장은 숟가락을 들어 찌개를 떠먹었다.
그리고 남은 밥을 삼키며 답했다.
“응. 국, 찌개 상온 제품들. 요거 때문에 아주 머리가 터진다. 아 참, 네가 소개해 준 서 실장, 잘하더라. 재능 있더라.”
“서보미 실장이요?”
“응. 얼마나 열심히 하던지, 우리 다음 주에 찌개 라인 출시할 수 있을 거 같아.”
“테스트는 끝났나요?”
“물론이지.”
“어디 있어요?”
“왜? 맛보고 싶어서?”
“당연하죠!”
“이건데?”
함중식 사장은 양은 냄비에 담긴 찌개를 가리켰다. 나는 재빨리 그가 먹던 숟가락을 뺏어 들고 국물을 떠먹었다.
그리고
“와…….”
찌개는 식어 있었지만, 그 맛은 훌륭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먹어 본 레토르트 제품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당분간 레시피가 새어 나가기 전까지, 그 어떤 대기업도 이런 치명적인 맛을 따라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옆에 있는 김대성의 입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어때?”
눈을 크게 뜨고 엄지를 세우는 김대성.
그 또한 이런 맛을 느껴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함중식 사장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 팀장, 여기 만두도 먹어 봐.”
“만두요?”
“응. 우리 기존에 나가던 제품을 조금 작게 만들었거든, 그래서 넣어 보니까 완전 궁합이 예술이야.”
나는 숟가락으로 하나 남은 만두를 떠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것이, 뭐라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함 사장은 내 표정을 살피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죽이지? 이 정도면 마프에서 1등 먹겠지?”
“사장님.”
“응?”
“내가 존경하는 거 알죠?”
내가 팔짱을 끼자, 함 사장은 재빨리 팔을 빼내며 미간을 구겼다.
“징그럽게 왜 이래?”
“이거 1년 독점입니다. 딴 데 풀면 사장님 죽고 나 죽는 겁니다.”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진짜요?”
“그래! 서 실장이 마프에만 푼다고 하더라. 솔직히 이번 상온 라인은 서 실장이 거의 다 했거든. 난 그냥 양념이랑 재료들만 골라준 게 다야.”
그때, 컨테이너의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의 서보미 실장.
얼마나 고생했는지.
입술은 터져 있었고, 눈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희 제품 이번 주에 새로 나와요. 다음 주에 마프로 미팅 가도 되겠죠?”
“네.”
“물론 정식으로 홈페이지에 등록하고, 찾아뵐 겁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마음에 드실 거예요.”
“저 이미…… 읍!”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 김대성.
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목요일에 뵙죠.”
일주일 후, 양지푸드의 레토르트 제품들을 사이트에 등록했다.
부대찌개, 청국장, 김치찌개 3개의 제품은 생각보다 판매되지 않았다.
나는 처음 보는 브랜드이기에 소비자들이 꺼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제품에 10% 쿠폰을 껴서 판매했고, 2주일 만에 첫 번째 수량이 완판됐다.
“팀장님! 양지 레토르트 언제 올라와요?”
고객 센터 쪽을 모니터링하던 이우진이 물었다.
“왜?”
“반응 완전 좋아요. 빨리 올려 달라는 문의만 2천 건을 넘었어요.”
“그래?”
그때, 옆에 있던 마성근 과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디? 어디? 양지 햄 치즈 청국장?”
“네. 양지 쪽 레토르트 이번에 대박이에요. 대박.”
“오호 나도 샘플 좀 달라고 해 봐야겠네. 그렇게 맛있어?”
“완전 죽여요. 존맛탱이에요.”
“존 뭐?”
“존나 맛있다고요.”
“요즘 애들은 말을 다 줄여. 왜, 나도 그냥 마 씨라고 부르지?”
“그럴까요?”
“이게? 죽을래?”
나는 사무실의 전화기를 들어, 양지푸드의 함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함 사장님! 레토르트 추가 물량 언제 들어와요?”
– 벌써 다 팔렸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제가 쿠폰 붙여서 빨리 땡쳐 버렸어요.”
– 알았어. 빨리 생산하라고 할게.
“그래서 언제냐고요? 몇 월 며칠 몇 시냐고요! 딱 말해요 빨리!”
– 아, 진짜 성질머리만 급해서! 알았어. 서 실장한테 물어보고 말해 줄게!
“10분 기다립니다.”
–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특판 사업 팀에는 새로운 아이템이 생겨났다.
마케팅 전공이던 서보미 실장은 자신의 꿈을 이뤘고, 덕분에 나는 1년 독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맑게 갠 하늘이 높게 보였다.
* * *
“여긴 배송 센터가 아니고, MD 사업부입니다. CS 쪽으로 전화 돌려 드릴게요.”
“배송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전화기가 불이 났다.
방금 출근한 나는 팀원들을 보다, 마 과장이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번에 해정식품 냉동 나간 거요. 그거 제품이 다 녹아서 도착했답니다.”
“그게 말이 돼? 몇 건인데?”
“8천 건이 넘습니다.”
“CS는?”
“전화 터져서 이쪽으로도 몇 통 올라오는 거 같아요.”
“김경일 대리! 스크립트 정해서 CS에 넘겨! 마 과장님은 저랑 같이 넘어갑시다.”
“예!”
나는 마성근 과장과 함께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CS 사업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