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96
196. 그게 더 뽀대나잖아요
회의 테이블 앞.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선녀 여사는 준비해 온 노란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로 올려놨고, 나는 봉투 안의 문서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김선녀 여사, 그녀의 자본금이 들어간 기업 명단.
바론, BO푸드, 명신홀딩스, 한창석유, 신풍셀론텍 등등.
30개가 넘는 기업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곳이다.
그리고 빳빳한 종이에서 들려오는 기억.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아마 김선녀 여사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인가 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서류를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왜 이걸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이제 이사님과는 한배를 탔으니까요. 먼저 가진 패를 까는 것이 맞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하는 김선녀 여사.
쏟아지는 안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자신만만한 그녀의 눈빛에 절로 경계심이 섰다.
“이렇게까지 하셔도 되겠습니까?”
“그 문서를 이사님께 보인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까?”
“…….”
“이사님께 디몰만 내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손을 잡으면 바론, BO, 명신, 한창, 신풍……. 원한다면 다른 기업들까지 내드리겠습니다.”
“……!”
“난 이사님 같은 사람을 잘 압니다. 젊고 유능한 사업가들을 수도 없이 봐 왔으니까요. 마켓 프레시처럼 작은 그릇은 절대 이사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좀 더 크고, 더 위험하지만 짜릿한 게임. 그걸 원하는 거 아닙니까? 평생 그 일을 해 온 이 늙은이처럼요.”
“…….”
“내 손을 잡아요. 그럼 내가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드리죠. 기업의 총수들이 당신께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이런 제안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과연 나도 기업사냥꾼이라 불리는 김선녀 여사와 같은 삶을 원했던 것일까?
그래서 더 높은 곳, 더 많은 부를 원했던 것일까?
분명 듣기엔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듣는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내가 돈이라는 무기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받아먹을 수 있을까?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의 기억.
배신을 당하고 분노하는 기억.
죄를 짓고 후회하는 사람의 기억.
그 수많은 기억을 듣고도 내가 과연 버텨 낼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그 기억을 들으며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저는 회장님이 생각하는 사업가가 아닌, 회사원입니다.”
“…….”
“아홉 시에 출근해서 저녁 여섯 시가 되면 퇴근하는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회장님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
“그것참 고통스럽습니다. 그 사람이 날 얼마나 원망하는지 알고, 그 사람이 날 얼마나 증오하는지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지옥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만 기억한다.
하지만 나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기억한다면?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는 짓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나를 원망하는 그 목소리를 평생 잊을 수 없을 테니까.
기억을 듣는다는 것.
이건 말 그대로,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남의 행복을 듣는 것에 나도 행복해지고, 남의 고통을 들은 나도 똑같은 고통을 느꼈다.
“어차피 모든 기억은 잊히기 마련입니다. 겨우, 알량한 도덕심 따위 때문에 못하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회장님은 지금까지 애써 남의 기억을 외면하셨습니다. 아마 그들의 기억을 듣는다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때, 공유한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김선녀 여사의 기억.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긴, 그들의 기억을 듣지 않고서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회장님의 제안은 받지 않겠습니다. 처음에는 이번 제안에 시간을 끌어, 최두영 이사의 팔을 모두 잘라 낼까 했는데, 오늘 회장님의 제안을 듣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
“가세요. 디몰을 살리려면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김선녀 여사가 내 등을 향해 소리쳤다.
“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디몰을 만든 것은 회장님이나 최두영 이사가 아닌, 직원들입니다. 사이트 곳곳에 그들의 생각과 노력이 들어가 있고, 판매하는 제품에는 그들의 가치관이 담겨 있습니다.”
“…….”
“이해 안 되세요? 더 쉽게 말씀드리죠. 저나 회장님이 이 작은 방에서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봐요! 원 이사!”
“그들의 노력을 훔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정당하게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가져가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김선녀 여사를 내 방에 남긴 채 밖으로 나왔다.
“이사님. 이사님!”
내 옆으로 붙어 속삭이는 정진택 차장.
문 앞에서 기다렸던 것인가?
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자, 그는 나와 속도를 맞추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미안합니다. 도저히 못하겠네요. 우리 플랜 B로 갑시다.”
“플랜 B요?”
“네. 직접 발로 뛰어 보자고요.”
“그게…….”
“디몰의 곽원호 본부장 아시죠?”
“네. 전에 박람회 때 본 적이 있습니다. 근데 곽 본은 왜요?”
“그냥 우리 방식대로 붙어봅시다. 디몰에서 이탈한 회원들이나 노리는 그런 거,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곽 본은 아닙니다.”
“왜요?”
“그 인간이 얼마나 엉뚱한데요. 그 인간 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더 재미있겠네요.”
“근데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쉬운 길을 두고 왜 돌아가려 하시는 겁니까?”
나는 씩 웃고 정진택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게 더 뽀대나잖아요.”
* * *
일주일 후 압구정 모던 바.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긴 바에 홀로 앉아 있었다.
몸에 꼭 달라붙는 슈트와 체크가 들어간 셔츠.
빨간 행거치프에 광이 나는 구두는 패션을 꽤 잘 아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푹 처져 있는 어깨.
심하게 헝클어진 머리는 조금 전 머리채를 잡고 싸운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적당히 드세요. 그러다 죽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보는 남자.
초점이 없는 동공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은 이미 그가 만취 상태임을 보여 줬다.
“누구시죠?”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워……. 원지훈? 아……. 그 마프 MD 맞죠? TV에도 나오고. 바른 먹거리 어쩌고저쩌고.”
“네, 맞아요.”
“하하하, 여기서 이렇게 적을 만나고……. 자자 한잔해요. 술자리에서는 다 친구니까.”
디몰의 패션 카테고리 총괄인 곽원호 본부장.
지난 10년간 디몰을 만들어 낸 MD다.
정진택 차장을 통해서 미팅을 요청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날 방법을 찾았고, 결국 이 모던 바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가 바텐더를 향해 손짓하자, 바텐더는 양주와 얼음이 담긴 글라스 잔을 내게 건네 줬다.
“마셔요.”
한 손을 올려 나에게 마시라는 손짓을 하는 곽원호 본부장.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근데 미팅은 왜 거절하신 겁니까?”
“내가 그 제안을 어떻게 받아요? 회사에서는 맨날 타도 마프 타령인데. 적장을 만나는 건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니죠.”
“신하라……. 참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다 그런 거 아닙니까? 까라면 까는 게 우리니까. 아, 맞다. 이사님은 마프 대주주니까 신하는 아니겠군요. 그렇다고 왕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하핫.”
입은 웃는데, 눈은 슬프다는 말.
지금이 딱 맞을 것이다.
나는 술잔의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미간을 살짝 구겼다.
“로열 21년산입니까?”
“오! 역시 식품 MD라 그런지, 단번에 맛을 아시네.”
“술은 안 팝니다. 그냥 좋아서 아는 겁니다.”
“그래요? 그럼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요. 아예 병째로 마시죠.”
나는 손짓을 해서 바텐더를 불러 술을 주문했다.
그러자 곽원호 본부장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사님 완전 내 스타일인데? 혹시 남자 좋아해요?”
“…….”
“나 같은 남자는 어때요? 맨날 술만 사 주면 충성을 다하는 놈인데? 지 간도 쓸개도 다 빼주는 그런 거지 근성이 끓어오르는 놈. 하하하.”
곽원호 본부장은 손바닥에 침을 뱉어 머리를 쓸어 넘기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엉뚱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
정진택 차장이 이래서 그를 이렇게 표현했구나.
나는 그에게 잡힌 내 손을 빼낸 후, 그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그리고 긴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그의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
“본부장님. 제가 왜 여기 왔는지 아세요?”
“뭐 뻔하죠. 디몰이 흔들리니까 어떻게든 집어 삼켜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어쩌죠? 쉽지 않을 것 같은데.”
“…….”
“이봐요. 내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넘기려고 그렇게 일했는지 아십니까? 처자식까지 등한시하면서 내가 왜……. 후……. 아니다. 됐습니다. 뭘 알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곽원호 본부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내 잔에 술을 가득 따라줬다. 그리고 난, 조금 전 그가 움켜쥔 술병에서 남은 말을 마저 들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접근했었나 보구나.
하긴 그렇겠지.
디몰의 가치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이니까.
나는 그의 잔에 얼음을 가득 넣고, 술을 반만 따라줬다.
그러자 그는 한입에 술을 털어 넣고 고개를 저었다.
“잘못 찾아오셨어요. 저는 지난 10년간 디몰에 근무했을 뿐이지, 단 1%의 지분도 없고, 회사 내에 어떤 영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10년 근무했다면 조금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디몰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성장했는데? 더군다나 큰 M&A(기업 매수 합병) 때는 더 챙겨 주잖아요.”
“아니요. 그건 당신 같은 갑들이나 받는 거죠. 우리 회사원들은 퇴직금 정산만 받아도 감지덕지한 겁니다.”
나는 술잔의 술을 마시고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곽원호 본부장은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웃겨요?”
“네. 많이 웃기네요.”
“그래.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나도 좀 웃어봅시다.”
“감지덕지라는 말이 웃기잖아요. 처자식까지 등한시했다면서, 겨우 퇴직금에 그러는 겁니까?”
“당신은 모르겠지. 갑의 입장이니까. 어떻게 우리 같은 사람을 이해하겠어?”
“…….”
“오늘 술은 잘 먹었습니다. 제가 사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병째로는 살 능력이 안 돼서 그냥 갑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곽원호 본부장.
나는 그의 등을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욕심 내볼래요?”
“뭐요?”
“난 디몰이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온 겁니다. 당신이 디몰의 지분이 있건 없건 상관없습니다.”
“…….”
“디몰에 회원이 얼마가 있건, 매출이 얼마건 관심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또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거니까.”
내가 원한 것은 디몰이 아니다.
디몰을 만들고 성장시킨 곽원호 본부장과 그의 동료들을 원하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