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20
20. 좋은 일 있으셨나 보네
CS 사업부 최진숙 부장.
이 여자의 명성은 MD 사업부 팀장들에게 들어 알고 있다. 특히, 건강식품 팀의 최충연 팀장은 아예 상종하지 말라고도 말했었다.
“그래서 특판 팀 CS에만 더 많은 사람을 배정해 달라는 겁니까?”
최진숙 부장이 양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차가운 태도와 냉소적인 말투.
왜 최충연 팀장이 상종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콜이 많이 들어오잖아요.”
“이럴 거면 매뉴얼이 왜 필요합니까? 우린 철저하게 매뉴얼대로만 움직입니다. 매번 시스템이 변하면 직원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누가 짠 매뉴얼인지 모르지만.
CS팀은 카테고리별로 콜을 받는 인원을 지정해놨다. 그리고 그건 지금처럼 사고가 터졌을 때, 다른 CS 직원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 팀이 사고를 수습하려면, 최소한 콜은 안 받도록 해 주셔야죠.”
“다른 팀은 잘만 하던데, 왜 특판 팀만 그럽니까?”
“다른 팀은 수량이 일정하잖아요! 우리 팀은 이벤트 걸리면 확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른 팀이랑 비교하십니까?”
“그건 팀장님 사정이죠!”
하아……. 꽉 막혔다.
뭐가 이렇게 막혔는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때.
“부장님. 지희 잘 있죠?”
마성근 과장이 느닷없이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꺼냈다.
“지희는 왜요?”
“상준이한테 들었어요. 얼마 전에 영재학원 시험 봤다면서요?”
“상준이가 말해요?”
“네. 하긴 지희 정도면 당연히 시험 잘 쳤겠죠.”
“뭐……. 그런 건 지가 알아서 하겠죠.”
“하하하, 좋으시겠습니다. 지희가 엄마 닮아서 참 똑똑한가 보네요.”
최진숙 부장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마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설마?”
“이 기지배가 하도 떨어서…….”
마 과장은 테이블을 탁 치고, 언성을 높였다.
“지희가요? 와 요즘 학원들은 융통성이 없어. 융통성이……. 지희 정도 성적이면 어서 옵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라 이거 봐라?
방금까지 쌀쌀맞던 최 부장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마 과장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그러니까요. 어디 학원이 거기밖에 없나?”
“제가 전화 좀 넣어 볼까요?”
“네?”
“영재학원 원장 놈이 제 친구예요. 그래서 우리 상준이도 다음 주부터 들어가기로 했거든요.”
“……정말요?”
이 급한 상황에 뭐 하는 거지?
내가 대화에 끼어들려는 순간, 마 과장이 내 허벅지를 꽉 움켜잡았다.
“당장 전화할게요. 그리고 학원비 30% DC도 똑같이 적용해 달라고 할게요.”
“어머! 상준이는 DC도 받아요?”
“물론이죠.”
“호호홍. 역시 마 과장님이야. 지희가 엄청 좋아하겠네요.”
마 과장은 앞에 놓인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며, 최 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저, 부장님.”
“알았어요.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가요. 제가 특별히 이번만 더 붙여 드릴게요. 그리고 다른 팀에는 절대 비밀입니다.”
“당연하죠!”
마 과장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방긋 웃었다.
“힘들 때 돕고 살아야죠. 호호홍.”
“스크립트는 저희 팀 대리가 보냈을 겁니다. 그대로 좀…….”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장사 하루 이틀 하나.”
그렇게 너무도 쉽게 마무리가 됐다.
차가운 태도와 냉소적인 말투로만 일관하던 최진숙 부장은 아이 학원 얘기에 모든 것을 수락했다.
밖으로 나와, 어깨를 활짝 펴고 걷는 마 과장에게 물었다.
“원래 두 분이 아는 사이셨어요?”
“네. 애들이 같은 반이에요.”
“그럼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저 아니면 또 들이받으려 하셨죠? 팀장님은 이제 다른 부서와 트러블을 만들면 안 돼요.”
“왜요?”
“부장 진급하셔야죠. 앞으로 진상 짓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말이라도 고맙네요. 근데 중 2가 벌써 입학시험을 봐요? 그것도 학원을요?”
“어이구! 요새 그래야지, 안 그러면 뒤처집니다.”
* * *
차에 시동을 걸자.
마성근 과장이 안전벨트를 메며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이제 남양주 창고로 가시나요? 거기도 제가 그냥…….”
“아니요. 엠로지스로 갑니다.”
엠로지스.
이곳은 3PL(Third Party Logistics, 물류 부문의 전부 혹은 일부를 아웃소싱하는 것) 업체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우리 마켓 프레시는 오후 3시까지 주문이 완료된 제품을 남양주 창고에서 이곳으로 전달하고, 개별 포장과 배송은 여기서 책임진다.
“팀장님은 혹시 엠로지스가 실수한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네. 그거 말고는 경우의 수가 없습니다.”
냉동식품이 녹아서 배송됐다는 클레임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새 제품을 보내 주긴 했는데, 이번엔 무려 8천여 건이다. 그리고 그런 클레임이 꾸준했다는 건 개별 배송을 하는 3PL 업체의 잘못일 확률이 높다.
“에이 설마요. 엠로지스가 얼마나 큰 회사인데요. 에이몰이나 씨마켓도 게네랑 10년 이상 거래했어요.”
“일단 근처니까 가 보죠. 들러서 나쁠 것 없잖아요.”
차로 10분 정도를 달려 가산디지털단지에 도착했다.
사무실 건물 앞.
다급한 표정의 한 남자가 서성대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나와 마성근 과장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켓 프레시에서 오셨죠?”
“네.”
“반갑습니다. 물류 팀의 안정수입니다. 가시죠. 이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린 그를 따라 5층의 이사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정갈하게 8대 2의 가르마를 탄 중년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엠로지스의 김청연이라고 합니다.”
“원지훈입니다.”
“앉으시죠.”
건물 입구에서 본 다급한 남자와 달리, 김청연 이사라는 사람은 여유로웠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비서가 차를 가져오길 기다렸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고.
나는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일 있으셨나 보네.”
비꼬는 듯한 내 말투에, 김청연 이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클라이언트는 급해서 달려왔는데, 여긴 매우 평화로와 보여서요.”
“팀장님. 설마 이번 사고가 우리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단호한 내 대답에, 김청연 이사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엠로지스입니다. 국내 3PL 1위 엠로지스라고요. 우리가 실수했다는 말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사고가 터졌으면, 여기가 아니라 남양주 창고로 가셨어야죠.”
이상할 만큼 너무도 태연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남양주 창고에서 사고가 터진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사님 말씀은 남양주 창고에서부터 녹아서 나왔다는 뜻인가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저희는 제시간에 정확히 배송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다.
운송장에 표기된 배송 완료 시간은 평소와 다름이 없다.
“저희 물건은 어디 있습니까?”
“냉동은 일산 창고에 있습니다.”
“가 봐도 되겠습니까?”
“뭐 그러시든가요.”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마 과장이 툴툴대기 시작했다.
“거봐요. 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일단 가 보죠.”
강변북로가 공사로 막혀, 도로에서 2시간을 허비했다.
오후 5시.
우린 일산의 엠로지스 물류창고에 도착하여 관리자를 찾았다.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입니다. 저희 물건은 어디 있죠?”
“아, 마켓 프레시요? 방금 개별 포장이 다 끝나서, 배송 준비 중입니다. 곧 나올 텐데…….”
그는 손을 펼쳐 냉동 창고 쪽을 가리켰다.
지게차가 나오고, 포장된 박스들이 택배 차량에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고 앞으로 걸어가, 포장이 완료된 하얀 스티로폼 박스들에 손을 가져갔다.
포장하던 직원들의 수많은 생각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이다.
“이봐요! 비켜요! 비켜!”
지게차를 몰던 남자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 과장은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고 내 옆으로 달려왔다.
“팀장님! 뭐 하세요?”
“잠깐만요.”
나는 계속해서 하얀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생각들을 들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들렸다.
분명 작은 아이스팩을 넣었다는 생각이 들렸다.
나는 생각이 들린 스티로폼 박스를 꺼내,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이봐요!”
“팀장님? 뭐 하세요?”
사람들이 나를 말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뜯긴 박스에는 냉동만두 8팩과 두 개의 아이스팩을 확인했다. 마 과장은 냉동만두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데요? 이건 남양주 창고에서 제대로 나왔다는 거잖아요.”
나는 스티로폼 박스를 가리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챙겨요. 빨리 가산으로 갑시다.”
“네?”
“드라이아이스 팩. 작은 거 두 개만 들어갔네요. 이 정도 제품이면 20cm 이상을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 과장은 그제야 스티로폼 박스 안에 유난히도 작은 드라이 아이스팩을 확인했다.
“뭐죠? 왜 코딱지만 한 게 들어가 있죠?”
“이제 확실해 졌네요. 이래서 종종 클레임이 있었던 겁니다.”
제품의 냉동을 유지해 주는 드라이 아이스팩.
이는 냉동식품의 부피에 맞게 넣어야 한다. 그래야 제품이 배송되는 시간까지 녹지 않게 배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넣은 드라이 아이스팩은 제품의 부피에 비해 유난히도 작았다.
나는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사무실의 김경일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리! 엠로지스 저번 달 정산서 이메일로 보내요.”
– 예 알겠습니다.
“포장이랑 드라이아이스, 기타 잡비들까지 빠진 거 없이 보내요.”
– 뭔가 잡으셨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30분 내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마 과장은 아이스박스 세 개를 뒷좌석에 던져놓고,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
“마 과장님, 사무실로 전화해서 배송 빠진 세 건 퀵으로 보내라고 하세요.”
“예?”
“지금 가져온 배송 물건들이요.”
“아, 네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고.
우리는 6시 이전에 가산디지털단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성근 과장이 뒷좌석에 있는 스티로폼 박스를 챙겨 드는 사이, 나는 김경일 대리에게 온 이메일을 확인했다.
21cm x 27cm, 단가는 개당 276원.
명세서에는 분명 대형으로 들어가 있다고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스티로폼 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10cm 정도.
100원 이하의 물건이다.
스티로폼 박스에 2개씩 들어간다고 하면 300원 정도의 비용을 절감했을 것이고, 냉동식품 배송이 일일 5만 건 이상이라고 치면 무려 1,500만 원 이상을 벌어들였을 것이다.
그것도 하루에…….
개새끼들.
이런 식으로 해 왔구나.
낮은 단가로 계약을 맺고, 이런 식으로 눈속임을 해 왔구나.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엠로지스의 이사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마 과장이 들고 있는 스티로폼 박스 안의 아이스팩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