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208
208.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시간은 참 유수와 같다.
무더웠던 여름과 유난히 짧았던 가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곳에 온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엊그제 온 것 같은데…….
코스메틱과 패션 카테고리는 매월 최고 매출을 올렸고, 내가…….
아니, 우리가 목표했던 매출에도 점점 가까워졌다.
언론은 2년 만에 정상에 다가간 우리를 연일 치켜세웠고, 회원들 또한 우리가 판매하는 상품을 크게 신뢰했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일에 치여 살았지만, 최고의 커머스를 2년 만에 만들었다는 자긍심에 몸이 힘든 줄도 몰랐다.
늦은 밤.
동료들과 회사 인근의 삼겹살집에 모였다.
똑같은 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들은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자자자! 마 차장이 한 잔 쫙 말아서 올리겠습니다!”
금세 취해 버린 마성근 팀장.
아니, 이제는 중국 알바오의 특판까지 총괄하는 차장이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그는 벽을 보고 서서 계속 히죽거렸다.
“누가 마 차장님 술 먹였어? 그냥 들여보내라니까!”
크게 소리치는 정진택 차장.
진급 심사 때 부장을 달지 못했다고 매일 불평만 하는 그이다.
로열패밀리라며 어깨에 힘주고 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회사원 냄새가 팍팍 난다.
“지훈아.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내게 말하고 밖으로 부랴부랴 나가는 김태하 부장.
아마존과 알바오 쪽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가공 식품을 총괄하던 태하는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또 연애를 시작했다.
그것도 MD 사업부의 직원이랑.
기억을 들은 나는 누군지 아는데, 모르는 척하느라 요새 아주 죽을 맛이다.
“태하 부장. 너 연애하지?”
눈치 빠른 이진성 차장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아니거든.”
“이거……. 수상한데? 아니면 전화기 줘 봐.”
“내가 왜?
“어쭈? 부장 달았다 이건가?”
“그럼 부장 대우라도 좀 해 주던가?”
“그러는 넌 밖에서는 형 대우 좀 해 주면 안 되냐?”
둘이 티격태격하자, 옆에 있던 최충연 팀장은 이진성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냥 좀 둬라. 태하 부장도 장가가야지.”
최충연 팀장.
그는 내가 요즘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김태하 부장, 이진성 차장보다 나이와 경력이 많았지만, 유일하게 차장 진급을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유는, 그가 맡은 건강식품 카테고리 때문이었다.
매출은 꾸준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현재 기준으로 크게 매출이 상승할 여력도 없었고 사업 분야의 확장성도 매우 적었다.
“이사님!”
삼겹살집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김경일 차장.
요새 오프라인 사업 때문에 가장 바쁘다.
그의 노력에 TF는 정식 팀으로 변경됐고, 차장 진급에도 성공했다.
“왜? 무슨 일 있어?”
“냉동 설비요. 오늘 현장 실측하고 견적가보다 10%를 높인다고 생지랄입니다.”
“그래?
“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바꿔 버릴까요?”
“명진 부장은 뭐래?”
“내일 박 부장님이랑 같이 가서 엎어 버린다고 했어요.”
미친개 박대영 부장은 여전히 회사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 그럼 되겠지 뭐. 대영 부장님 스타일 알잖아.”
“흠…….”
“밥 안 먹었지? 밥이나 먹어. 여기요! 공깃밥 하나 하고 찌개 좀 다시 끓여 주세요.”
내가 손을 들어 주문하자, 씩씩대던 김경일 차장이 내 옆에 앉았다. 그러자 술에 취해 있던 마성근 팀장이 재빨리 그 옆으로 다가왔다.
“경일아. 내가 한잔 말아 줄까?”
“내일 일찍 미팅 있습니다. 그리고 마 차장님 술 먹었어요?”
“응. 기분이 너무 좋아서. 너무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무슨 일 있어요?”
“그냥 다. 가족도 좋고, 회사도 좋고, 이 술도 너무 좋고……. 너도 좋고, 우리 원 이사님도 좋고, 저기 나 째려보는 정 차장님도 좋고…….”
“…….”
“초록이는? 초록 대리는 어디 가고 혼자 왔어?”
김경일 차장은 대리로 진급한 하연두와 공개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두고 가장 많이 놀리는 것이 바로 마성근 차장이었다.
“여길 왜 와요? 그리고 초록이가 아니고 연두거든요.”
“연두나 초록이나. 하여간 내년 봄에 국수 먹여 줄 거라면서?”
“국수는 무슨…….”
“네가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잘 모르나 본데, 결혼할 때 하객들이 국수를 많이 먹어 줘야, 아들딸이 국·영·수를 잘하는 거야!”
취했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김경일 차장도 이를 느꼈는지, 재빨리 마성근 차장 앞의 잔을 치웠다.
“인제 그만 드세요.”
“아……. 왜? 왜? 나 하나도 안 취했거든? 신혼여행은 절대 베를린으로 가지 마.”
“네?”
“신혼부부가 베를린에서 뭐 먹으면 안 되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베를린! 독일 수도잖아. 푸하하하! 몰랐지? 몰랐지?”
“…….”
“독! 독 말이야. 푸하하하“
아재 개그를 남발하는 마성근 차장.
정말 술이 끝까지 올라온 상태다.
김경일 차장은 고기를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내게 말했다.
“안 되겠네요. 이사님. 저 마 차장님 집에 모셔다드리고 들어갈게요.”
“괜찮겠어?”
“네. 어디 한두 번입니까? 이제 저희 집 가는 길보다 마 차장님 집 가는 길이 더 익숙하네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네.”
김경일 차장은 말을 마치고, 마성근 차장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최구열 이사.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발그레한 그는 우리들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최 이사님!”
“이사님!”
다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재빨리 다가가 비틀대는 그를 부축했다.
“술은 어디서 드셨어요?”
“아……. 전략기획팀 식구들이랑 술을 좀 마시다가, 이쪽에 MD 사업부 식구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식구라는 말.
그의 입에서 처음 들어 보는 단어다.
최구열 이사도 많이 변했다.
그렇게 권위적이던 사람이 가끔이지만, MD 사업부에 와서 직원들과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쪽은 다 들어갔나요?”
“네. 재미있게 놀라고 늙은이는 빠져 줬죠. 근데 원 이사님은 안 빠져 주세요?”
“전 아직 늙은이가 아닌데요?”
“알죠. 암, 잘 알죠. 원 이사님 아주 젊고 쌩쌩한 걸요.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윗사람이 없어야 이 친구들이 좀 편하게들 놀 거라는 말입니다.”
“…….”
갑작스러운 최구열 이사의 말에 모두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있는 신용카드를 내려놓았다.
“자. 이걸로 2차들 가시고, 원 이사는 저한테 양보 좀 해 주세요.”
무슨 일일까?
뭐가 그리도 좋아서, 자신의 개인 카드까지 내놓는 걸까?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정진택 차장이 재빨리 최구열 이사의 카드를 움켜잡았다.
“와……. 이거 영광이네요. 최 이사님의 개인 카드로 먹고. 하하하. 저희 엄청 먹는 거 모르시죠?”
“알아요.”
“내일 명세서 보고 놀라지 마세요.”
“네, 꼭 비싸고 맛있는 거 드세요.”
최구열 이사는 환하게 웃어 보이고,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원 이사님은 저랑 한잔 더 하시죠.”
“괜찮으시겠어요?”
“네. 끄떡없습니다. 하핫.”
* * *
인근의 조용한 바.
최구열 이사는 잔잔한 재즈 음악을 따라 부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요. 원 이사님과 한잔 꼭 하고 싶었습니다.”
“술 잘 안 드시잖아요.”
“기분이 좋아서요. 딸아이도 학교 잘 다니고, 회사도 자리를 잡은 거 같고…….”
나는 조금 전까지 그가 움켜잡았던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들려온 기억.
전략기획부 직원들에 대한 기억들이다.
직원의 경조사나 상태를 따로 챙기던 그가 아니었는데…….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요새 많이 좋아 보이십니다.”
“네. 많이 좋아요.”
“전략기획부는 별문제 없죠?”
“네. 다들 좋아요.”
그럼 왜 나를 따로 보자고 한 것일까?
그것도 술까지 마시면서.
내가 아무런 말없이 술을 마시자, 최구열 이사는 자신의 술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원 이사님.”
“네.”
“아마존이나 알바오랑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이제 문제없죠?”
“네.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김태하 부장과 마성근 차장이 잘해서요.”
“얼마 전에 잠깐 봤는데, 태하……. 그 친구 참 열심이더라고요.”
“네, 잘난 놈이긴 하죠.”
“아니요. 원 이사님 때문입니다. 저랑 일할 때는 그런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친구였습니다.”
태하가?
평소 장난도 많고, 유쾌한 태하가 그랬다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요?”
“네. 저랑 함께 일할 때는 그랬죠. 밥도 매일 혼자 먹고,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 갑자기 생떼를 부리기도 하고…….”
“태하가요? 하……. 상상이 안 가는군요.”
“장선영, 김민정, 김경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친구들도 협력사들을 상대로 아주 공격적이었죠.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알겠더라고요. 내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외부 협력사들에게 풀며, 갑질을 했었다는 것을요.”
“…….”
“전에 왜 그룹폰이 실패했는지 물으셨죠?”
“네.”
“다 제가 그 친구들을 그렇게 만들어서 실패했던 거였습니다. 협력사를 상대하는 MD가 갑질만 해 대는데, 어떤 협력사가 좋아하겠어요?”
“…….”
“어디 그뿐입니까? BO푸드에서 쫓겨난 마성근은 이제 제대로 사람 구실하고, 망나니 정진택이는 생산자들과 계약하기 위해 온종일 과일을 따기도 합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변한 지 아세요?”
“…….”
“다……. 원 이사님 덕분입니다. 원 이사님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나를 지그시 보던 최구열 이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 이사님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략기획부 식구들에게도 좀 쏟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설마…….”
“네. 더 늦기 전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
“요즘 김재열 이사님과 라운딩 다니면서, 가족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참 부럽더라고요. 난 왜 저렇게 살지 못했는지……. 많이 후회했습니다.”
최구열 이사의 나이는 51세.
아직 은퇴하기에는 이른 나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저한테 떠넘기고 은퇴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원 이사님께는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습니다. 원 이사님만 허락해 주신다면요.”
“안 됩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어딜 가시려고요?”
“대표님께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원 이사님과 잘 상의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
“제 생각에는 김태하, 정진택, 김명진 중 한 명을 MD 사업부 이사로 올리면 원 이사님의 업무도 줄어들 것 같은데……. 어떨까요?”
이미 대안까지 마련해 뒀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후……. 안 됩니다.”
“…….”
“은퇴하신다고 해도 지금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전략 기획부 일을 합니까?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걱정 마세요. 필요하다면 제가 언제든 외부에서 도울 테니까.”
평생 일에만 몰두했던 최구열 이사.
그는 지난 세월을 후회했다.
자신의 높은 목표 때문에 힘들었던 직원들에게 미안해했고, 희생당한 가족들에게 미안해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부탁합니다.”
그 짧은 말에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