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211
211. 누가 옳은지 한번 해 볼까요?
“석경 씨! 나 커피…… 아니…… 그게…… 뭐 마시면 좋을까?”
내가 노려보자, 커피 심부름을 시키던 김중신 부장이 말을 바꿨다.
이곳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사소한 것부터 바꿔갔다.
먼저 커피나 복사와 같은 잔심부름을 없앴고, 점심은 원하는 사람끼리 자유롭게 하도록 했다. 또한, 업무 전화를 대신 받아 주거나, 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는 일들을 모두 금지했다.
이에 직급이 낮은 직원들의 표정이 좋아졌지만, 직급이 높은 직원들에게선 조금씩 불만의 기억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사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차가운 표정을 하고 내게 다가온 서인수 부장.
전략기획부의 실세로, 지금의 분위기를 만든 인물이다. 나는 올 것이 왔다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서 부장님 요청이신데, 없어도 만들어야죠.”
서인수 부장은 별다른 말 없이 등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가장 구석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이사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인제 그만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뜻을 아는데, 그만해 달라?
참 이기적인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예전의 최구열 이사도 그랬었다. 매번 자신의 주장을 우선으로 했고, 반대하는 사람은 적으로 매도했었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못 하시죠.”
“아니요. 무슨 생각이신지 충분히 압니다. 하지만 전략기획부는 이사님의 방식대로 일을 진행할 수 없는 부서입니다. 어느 사업부나 자신들만의 룰이 있는 겁니다.”
“룰이라……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며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기획은 경험입니다. 이미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경험한 사람들이 사업의 타당성을 가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직원들은 당연히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하나씩 경험을 익혀가는 것이 정상적인 회사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고 바로 전해져 오는 기억.
나는 그의 기억을 계속 듣기 위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린 채로 답을 했다.
“커피 타고, 복사하고, 식사 메뉴를 대신 주문하는 것들이 상급자의 경험을 배우는 겁니까?”
“네. 그게 다 업무를 배워 가는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해 왔습니다.”
역시 똑같구나.
매사에 당당한 서인수 부장은 뭐가 좀 다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도 부장님과 같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네. 그래야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좀 다르네요.”
“…….”
“기획은 상상입니다. 그래서 아직 경험이 없는 직원들이 더 기발한 것들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상급자들은 이를 다듬어 주고 현실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을 하는 겁니다. 누가 누구한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협업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급자들과 협업을 하라고요? 말도 안 되는 기획서를 들고 오는 그들과 협업을요?”
나는 씩 웃으며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왜 미친 소리 같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럼 좋아요. 우리 누가 옳은지 한번 해 볼까요?”
“뭘 해 보겠다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지금 가장 급한 큐레이션 서비스 기획을 두 팀에서 하는 겁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직원들을 데리고 TF를 꾸려 볼게요. 부장님은 부장님의 팀으로 해 보세요.”
서인수 부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해 보죠. 대신 제가 이긴다면 이사님은 MD 사업부로 돌아가 주십시오.”
“네. 그러죠. 그리고 만약 제가 이기면 부장님은 제 방식에 따르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기획서 평가는 누가 합니까?”
“최구열 이사님이 하는 건 어떨까요?”
“좋습니다.”
나는 서인수 부장의 답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점심시간.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혼자 휴대 전화의 영상을 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김소정 씨.”
매일 컵라면에 삼각김밥만 먹는 그녀.
입사한 지 3개월이 막 지난 사원으로, 이 휴게실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남겨 둔 사람이기도 하다.
“네?”
그녀는 휴대 전화를 재빨리 뒤로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컵라면과 도시락을 하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말을 이었다.
“같이 먹어도 될까요?”
“아…… 네…… 네?”
내 말에 대충 답을 하다, 갑자기 놀라 되묻는 김소영.
나는 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그녀의 앞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앞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맨날 이렇게 혼자 먹어요?`
“그게 좀 편해서…….”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불편하게 해야겠네요. 괜찮죠?”
“괘…… 괜찮습니다.”
나는 씩 웃고, 전자레인지에서 도시락을 꺼내왔다.
“영화? 아니면 드라마?”
“네?”
“그거요.”
내가 휴대 전화를 가리키며 묻자, 그녀는 재빨리 주머니에 휴대 전화를 집어넣었다.
“아닙니다.”
“인트라넷에 올려 둔 회원가입 프로세스 변경 기획서 봤어요.”
“아…… 그거 제가 깜빡하고 지우지 못해서…… 지금 바로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 관리자에 올라온 기획서들을 여럿 살펴봤다.
그리고 조회 수가 1이던 기획서 하나를 보고 잘만 다듬으면 좋은 기획이 될 거로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그걸 왜 지워요?”
“네?”
“불필요한 가입 절차를 줄이는 것은 회원이나 우리 모두 도움이 되는 건데.”
“그걸 보셨어요?”
“네.”
“아직 과장님이나 팀장님도 안 보신 기획서인데요?”
“올린 지 한 달이 지났던데, 아직도 안 본 겁니까?”
“네 두 분이 워낙 바쁘셔서…….”
바쁜 것이 아니다.
신입의 기획서라 아예 열어 보지도 않은 것이다.
“흠…… 그렇게 바쁜가? 하여간 이번에 큐레이션 서비스 기획하는 거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김소정은 UX 팀 소속.
이곳에 온 첫날, 내 지시로 UX 팀 모두가 큐레이션 서비스 기획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럼, 소정 씨도 바쁘겠네.”
“아니요. 저는…….”
말끝을 흐리는 김소정.
안 봐도 뻔하다. 그녀는 요즘 잔심부름하기에만 바쁠 것이다.
“저랑 해 볼래요?”
“네?”
“이번 큐레이션 서비스 기획을 담당하는 별도 TF를 만들어 볼 생각인데, 어때요?”
“저를 TF에요?”
“네. 소정 씨가 딱 맞는 거 같아서. 싫으면 말고.”
내가 고개를 틀자, 그녀는 재빨리 답을 했다.
“아닙니다! 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먹어요. 앞으로 좀 힘들 거니까.”
* * *
늦은 오후.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한 남자가 복사기를 내리치며 미간을 구겼다.
예산 지원팀의 장주식 대리.
전략기획부 최고의 돌아이.
사람들은 직급이 높은 사람들과 계속 트러블을 만들면서, 잘리지 않고 다니는 그를 신기해할 정도였다.
“왜요? 뭐 안 돼요?”
내가 옆으로 다가가자, 그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답했다.
“이놈은 꼭 제가 할 때만 이러더라고요. 이사님. 돈도 많으시니, 복사기 한 대 사 주십시오.”
대리 직급의 사원이 어떻게 이사에게 저런 말을 할까?
저 말투와 표정.
역시 보통은 아닌 인물이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 주면 뭐 해 줄 건데요?”
“뭘 하긴요. 높으신 분들 보실 회의 자료 열심히 복사해서 준비해야죠.”
“서비스 기획자였잖아요?”
“그건 이전 회사 때 얘기입니다. 여기 마프에서는 복사쟁이로 더 유명합니다.”
서비스 기획팀으로 입사했던 장주식.
그는 얼마 전 본인이 직접 요청해서 예산 지원팀으로 이동했다.
“복사쟁이가 좋아요?”
“아주 좋죠. 힘들게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복사 기다리면서 딴생각도 좀 하고…….”
“그건 좀 부럽네요.”
“이사님이 저를 부러워하시면 어떡합니까? 열심히 일하셔서 저 같은 월급 루팡에게도 월급을 주셔야죠. 하하하.”
“그래도 본인이 루팡인 건 아시나 보네.”
“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 하나는 확실히 합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전략기획부 내의 복사기에는 그의 기억이 가장 많았으니까.
“TF를 해 볼 생각인데, 이번에 한번 루팡 딱지 떼어 보는 건 어때요?”
“복사 콘테스트 같은 거 하나 보죠?”
“아니요. 큐레이션 서비스를 기획할 겁니다.”
“……그걸 제가 왜 합니까? 저는 지금이 편합니다. 부디 멋진 기획으로 저 같은 놈이 편하게 루팡짓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 주십시오.”
장주식 대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UX 팀이랑은 별개로 기획할 예정입니다.”
내 말에, 장주식 대리는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별개로 하실 생각입니까?”
“네. TF라고 말했잖아요.”
“TF장은 이사님이시고요?”
“네.”
“서인수 부장은 관여하지 않는 겁니까?”
“네.”
“왜 저입니까?”
“하고 싶어 하니까요.”
나는 서인수 부장과 장주식 대리의 관계를 잘 안다.
서비스 기획팀에 있을 당시, 그가 낸 기획서에 서인수 부장이 이름만 바꿔서 올렸다는 것도 말이다.
“기획안이 통과되면 실제 서비스에 반영하는 겁니까?”
“물론이죠.”
“개발팀 일정이 안 된다던가, 시안을 보니 마음에 안 든다는 등의 핑계는 없는 겁니까?”
“거참, 말 많네. 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마요.”
내가 등을 돌리자, 장주식은 재빨리 내 어깨를 잡았다.
“하고 싶습니다. 복사만 시키셔도 군말 없이 하겠습니다.”
* * *
퇴근 시간,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자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퇴근 시간을 알리는 알람과도 같은 인물.
김현중 대리.
요즘 전략기획부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벌써 상의를 걸치고 가방까지 어깨에 멘 그를 불렀다.
“현중 대리!”
“네?”
“MD 사업부에서 올라온 특판 기획안 확인했어?”
“벌써 올라왔나요?”
마성근 차장은 김현중 대리의 일 처리가 요즘 들어 많이 늦어졌다고 투덜거렸다.
“아까 오후 3시쯤 올라온 것 같은데?”
“아…… 빨리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방을 멘 채로 컴퓨터를 다시 켜는 김현중 대리.
나는 왜 그가 퇴근을 서두르는지 잘 안다.
바로, 투잡족이기 때문이다.
그는 6시 퇴근을 하고 곧바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 부모님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돈벌이가 더 필요했고, 그런 그가 선택한 아르바이트는 배달이었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나와 일할 당시에는 특판팀의 기획서에 추가 기획을 내놓으며 열정적으로 일했었다. 그때는 참 기획력 좋은 직원이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기획서를 건성으로 살피는 그의 뒤로 다가가 의자에 손을 올렸다.
이러니 일에 집중을 못 하지.
역시 그의 생각은 오후 아르바이트에 대한 것뿐이었다.
“현중 대리. 요즘 마 차장님 불만이 많던데?”
“아…… 네. 저도 압니다. 저번에 차장님께 크게 한 소리 들었습니다.”
“오늘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어?”
“그게…….”
“힘들면 말고.”
“내일 꼭 시간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