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222
222. 이이제이(以夷制夷)
강남 한복판의 대형 빌딩.
로비에서부터 경비가 삼엄한 이 건물이 바로 바론의 사옥이다.
식품회사에 뭐 그렇게 많은 보안 직원이 필요한지…….
회사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네?”
“BO의 원지훈 이사님 맞죠?”
“아……. 네.”
내가 조심스럽게 답을 하자, 그는 재빨리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아, 맞군요. 태룡건설의 심형규라고 합니다.”
태룡건설 대표이사 심형규.
처음 들어 본 회사의 처음 들어 본 이름이다. 나는 그냥 바론의 평범한 주주일 것으로 생각하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네. 반갑습니다.”
“바론 주주셨어요?”
“뭐, 비슷합니다.”
“하하, 오늘 이사님을 만나다니 제가 운이 좋군요.”
“네?”
“우리 동네였나요? 그 TV 프로그램.”
“아……. 네…….”
“그거 정말 잘 봤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저처럼 식품에 대한 가치관이 뚜렷하신 분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저희 집 가훈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좋다는 겁니다. 먹는 거 하나는 진짜 신경 써서 먹거든요. 사실, 아내 때문에 마켓 프레시 달빛 배송도 알게 됐어요. 얼마나 편하던지, 아침에 일어나서 복도에 놓인 음식 딱 조리하는 데 맛도 좋고, 건강도 좋아지는 거 같더라고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하하하. 아 맞다. 아내 아이디가 koewod17인데, 혹시 아세요? 작년에만 천만 원 이상 썼을 겁니다.”
“제가 그거까지는 잘…….”
“하긴 마켓 프레시 회원이 하도 많으니 잘 모르겠죠. 하하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정말 간만이다.
심형규라는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주주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는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글쎄요.”
“그냥 처먹으라고 했습니다. 모범 음식점이라는 칭호는 아무나 주는 게 아니거든요. 이사님도 잘 아시죠? 저희 할머니가 60년째 순댓국집을 운영하시는데…….”
제발 그만!
사돈에 팔촌까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얘기들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또한, 가끔 옷깃을 스칠 때, 들려오는 기억은 정말 역대급이었다.
뭐 이렇게 잡생각들이 많은지.
그의 기억이 담긴 물건에는 절대 손대지 말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도착한 주주총회 연회장.
멋들어진 슈트에 머리를 뒤로 넘긴 한 남자가 입구에 서서 주주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연회장으로 들어가려 하자, 옆에서 조잘대던 심홍규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 남자를 끌어안았다.
“강 전무! 오랜만이야!”
스티븐 강.
한국 이름으로 강석민.
바론의 2대 주주이자, 전 회장이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강석호 회장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얼마 전에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바론의 젊은 피라 불리며, 미국 시민권을 보유한 놈이라 군대도 가지 않았다.
“형님! 오셨습니까!”
“완전히 들어온 건가?”
“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가 할 일을 해야죠.”
“그래. 잘 생각했어.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아주 좋네. 아, 맞다. 가방은 찾았어? 공항에서 잃어버린 가방.”
“아니요. 아직이요.”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괜찮습니다. 옷만 들어 있던 가방이었습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옷이야 새로 사면 되니까.”
할 일을 해야 한다라…….
뭘까? 뭘 하겠다는 걸까?
내가 그들을 지나쳐 연회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심형규가 소리치며 나를 잡았다.
“이사님! 이사님!”
“네?”
“어디 가세요? 제가 소개 좀 해 드릴게요.”
“아……. 네.”
“여긴 바론의 전무이사 스티븐 강. 한국 이름은 강석민입니다. 앞으로 바론을 끌어 갈 젊은 인재죠.”
굳이 내게 강석민을 소개하는 심형규.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강석민의 앞에 섰다. 그러자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BO커머스의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네, 원지훈입니다.”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주총에도 와 주시고 영광인데요?”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는 강석민.
공부하라고 보낸 미국에서 공부는 안 하고 운동만 했나?
뭐 이렇게 힘이 센지, 손이 얼얼한 지경이었다.
잡힌 손을 빼내려는 순간, 내 소매 끝의 단추와 강석민의 소매에 달린 단추가 걸려 버렸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그의 검은 단추가 내 손바닥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듣게 된 기억들.
그랬구나.
강석호 회장의 경쟁자라고 하더니, 둘 사이의 감정이 그리 좋지 않구나.
어쩌면 이 단추가 더 많은 기억을 들려주겠는데?
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단추를 주머니에 넣었다.
“제가 영광이죠.”
“요즘 BO는 좀 어떻습니까? 제가 듣기론 회장님이 부동산에 푹 빠졌다고 하시던데요?”
역시 이런 소문은 빠르구나.
김지욱 회장을 살짝 비꼬는 말투도 영 거슬렸다.
“전 커머스 직원이라 잘 모릅니다.”
“아……. 하긴 그러시겠군요. 마켓 뭐더라? 아…….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요. 하하.”
또 살짝 틀어서 공격한다.
이런 성격, 강석호 회장을 똑 닮았다.
나는 씩 웃으며,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국내 시총 39위 회사를 모르시다니……. 한국 경제 공부는 앞으로 많이 하셔야겠네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크게 웃는 강석민.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하하하 네. 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나저나 원 이사님께서 저희 주총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주주의 자격으로 왔겠죠.”
“저희 주주셨어요? 역시 한국 경제를 잘 아시는 분이라, 바론의 가치를 정확히 아시나 보군요.”
“제가 좀 많이 알긴 하죠. 그래서 뒤로 호박씨 까는 기업들도 꽤 많이 잡아냈었죠.”
“그거 재미있군요. 다음에 만나면 그 얘기들도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하하. 이거 기대되는군요.”
가시가 많은 대화가 이어지자, 심홍규는 난처해진 표정을 하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자자. 그만하시고. 강 전무 우리 먼저 가 있을게!”
* * *
30여 분 후.
연회장에 들어온 강석호 회장과 그의 비서들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주총이 시작되고 단상 위에 선 강석민은 안건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3안은 특별 배당에 대한 것입니다. 원안대로 승인하고자 하는데, 이의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주주총회의 안건은 총 4가지.
사외이사의 선임, 정관 일부 변경의 건, 특별 배당 지급 건.
그리고 마지막, 50주년 기념행사 건.
내가 나설 사항은 바로 마지막 5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4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5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자세한 프로모션 내용은 별도로 첨부한 문서를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의 있으십니까?”
있지. 당연히 이의가 있지.
조용한 연회장의 한가운데 앉은 내가 살포시 손을 들어 올렸다.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아요.”
강석민 전무는 무섭게 나를 노려보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네. 말씀하시죠.”
“말이 좀 길 것 같은데, 마이크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목이 아파서.”
내가 미간을 구기며 말하자, 강석민이 손짓했다. 그리고 그의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마이크를 내게 가져다줬다.
“50주년 행사 축하합니다. 근데 조금 이상한 부분들이 많네요. 먼저, 갈릭 베이컨 스낵. 출시 15주년을 맞아서 꽤 많은 양을 생산하시는군요.”
“그런데요?”
“여기 계신 분 중에 갈릭 베이컨을 마트나 편의점에서 보신 분 있으십니까? 이 스낵은 15년 전에 반짝했던 스낵입니다. 왜 굳이 이걸 지금 이 시점에서 찍어 내는 겁니까?”
“갈릭 베이컨은 우리 바론에게 큰 의미가 있는 제품입니다. 그리고 레트로 열풍에 예전 스낵들이 다시 주목을 받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 판단했습니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술술 답하는 강석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렇다고 하죠. 칼국수, 등뼈 해장국, 2분 카레, 쭈꾸미 볶음……. 와, 많네요. 이 레토르트들이 국내에서 1년 안에 소진될 거라 보십니까?”
“물론 국내용으로는 힘들죠. 이번 행사 제품들은 미국 수출용으로 생각해 둔 겁니다. 이사님이 속하신 BO커머스의 아마존 기획전 덕분에 K푸드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판단했습니다.”
“꿈이 크시군요. 지금 여기 적힌 생산 물량만 해도 아마존에서 판매되는 K푸드의 1년치 물량입니다.”
“그게 뭐 잘못됐습니까? 그 말은 BO는 가능한데, 바론은 못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는 내가 제시하는 모든 의혹에 차분히 맞섰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 바론이 알바오 기획전을 열기 위해 별도의 페이퍼 컴퍼니를 세웠다는 내용을 발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강석민의 단추에서 들려온 지난 기억들이 더 확실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 계획을 만들어 줬다.
나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하- 정말, 강 전무님은 못 따라가겠네요. 전 회장님이 왜 강 전무님을 그렇게 아꼈는지, 잘 알겠네요.”
“……그럼 이의가 없는 거로 알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빨리 넘기려는 강석민.
하지만 멀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잠깐만요. 이거 말도 안 끝났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또 뭐죠?”
“심형규 대표님!”
“네?”
내가 부르자, 심형규가 놀란 눈을 하며 답했다.
“이정민 대표님, 최용현 대표님, 이필재 이사님, 김석용 대표님, 김면식 대표님, 이종직 대표님. 끝으로 국민연금의 김명법 담당자님.”
이들은 모두 바론의 대주주들.
강석민이 저 슈트를 입은 채로 한국에서 급하게 만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내 주머니에 있는 단추는 그들과의 기억을 고스란히 들려줬다.
“뭐 하시는 겁니까?”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린 법.
강석민은 마이크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마이크를 뺏기 위해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파일을 허공에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강석호 회장의 해임안을 건의합니다. 횡령에 관한 증거는 모두 여기 있으며, 바론 대주주들의 위임장 또한 여기 있습니다.”
“……!”
“……!”
이것이 새롭게 바꾼 계획.
강석호의 죄를 단죄하고, 그를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대항마를 세우는 것이다.
강석민.
잠깐 대화를 한 것이 전부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강석호와 강석민의 치열한 싸움뿐이니까.
서로의 치부를 모두 드러내는 그런 치열한 싸움.
“한국에 오신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우호 지분을 꾸준히 모으셨더군요. 안 그렇습니까, 심형규 대표님?”
“……!”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심형규.
단상 위에 서 있는 강석민의 얼굴도 가관이었다.
심형규는 미국에 있는 강석민을 대신해 우호 지분을 모았다. 아마, 말이 많고 친화력이 좋은 저 성격 때문에 강석민이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강석민.
그는 한국으로 들어와 심형규가 준비한 자신의 우호 세력을 만났다.
옷 가방을 잃어버린 덕분인지.
그는 지난 3일간 저 슈트만 입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듣게 된 기억들은 강석민의 삐뚤어진 야망과 현재 12.73%나 우호 지분을 확보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
“이봐요! 원 이사!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석호 회장.
하지만 단상 위에 서 있는 강석민은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내가 해임안을 발표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음흉한 미소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원지훈 이사님. 위임장은 얼마나 가지고 오셨습니까?”
“총 9.62%입니다.”
이현아 대표, 김지욱 회장, 김재열 이사가 내게 모아준 귀한 위임장들은 무려 9.62%
이를 모두 합치면 22.35%로 강석호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이다.
“훌륭하군요.”
“왜? 가슴이 막 벅차오르고 그럽니까?”
“좋습니다. 원지훈 주주님의 특별 안건을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석민!”
그의 말이 끝나자 버럭 소리치는 강석호 회장.
강석민은 그를 무시한 채로 마이크에 대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해임안에 대한 결의는 긴급 주총을 열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총의 일정은 주주님들께 별도로 공지를…….”
“강석민! 지금 뭐하는 거야! 마이크 내려! 당장 마이크 내려!”
결국, 강석호 회장이 단상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기에도 흉측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비서들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달려들었고, 나는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둘러봤다.
“이제 좀 어울리네.”
이제 바론의 싸움은 시작이다.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이들은 알아서 서로의 약점을 공격할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제압할 때 다른 오랑캐를 부린다는 말.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승자와 패자, 모두가 크게 다칠 테니까.
나는 한참 동안 움켜쥐고 있던 단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연회장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그곳의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