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30
30. 이사님 남편 될 사람은 좋겠네
띠리리링!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대충 세수를 하고, 허물처럼 벗어 놨던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는 김경일 대리.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요?”
“저…….”
김 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수석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친 정진택 팀장이 밖으로 나왔다. 잔뜩 멋을 낸 그는 나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환하게 웃었다.
“정 팀장님?”
“토요일 오전에 수원 거기, 가 보자고 하셨잖아요.”
어제,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토요일 오전 일찍 갈비탕집을 가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건, 김 대리에게만 말한 것이었는데…….
“그건 김 대리만…….”
“알아요.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요.”
“재미요?”
“네. 원 팀장님이 어떻게 왕 갈비탕을 가져오는지 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상외의 반응이다.
그냥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요 함께 갑시다.”
1시간을 달려, 수원에 도착했다.
오전 7시.
식당의 문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수원 도심과 떨어진 이곳은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건너편에 작은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빨까요?”
정 팀장이 먼저 말했다.
나와 김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김 대리에게 내밀었다.
“김 대리, 난 하겐다즈 작은 컵으로.”
눈을 껌뻑이며, 카드를 내려다보는 김경일 대리.
꽤 기분이 나빴나 보다.
나는 팀원 누구에게도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킨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심부름을 할 김 대리도 아니다.
나는 정 팀장의 카드를 가로채, 그의 상의 주머니에 넣어 줬다.
“먼저 말 꺼낸 사람이 사 오는 겁니다.”
정 팀장은 말없이 나를 보다,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다.
“어휴 다리가 좀 저렸는데, 차가 좀 좁았나 봐요.”
“…….”
“김 대리 빨리 성공해서 차 큰 거로 바꿔야겠어? 하핫.”
“…….”
“안 되겠다. 좀 걸어 봐야지.”
그는 발목을 돌리고, 목을 빙빙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길 건너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무렵.
검은색 벤츠 S클래스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미간을 구긴 젊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리고, 조수석에서 심미옥 사장이 내렸다.
그녀는 우리를 보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10시에 오픈합니다.”
“아줌마, 나 기억 안 나요? 어제 여기 갈비탕 20개나 사 갔잖아.”
정 팀장이 한 발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
아마 차가운 말투와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것이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심미옥 사장은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제품 가져와도 환불은 안 돼요.”
“누가 환불한대? 그냥 갈비탕이나 한 그릇…….”
심미옥 사장은 정 팀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이따 10시에 오세요.”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정 팀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뛰어서 심미옥 사장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남자가 작게 뭔가를 얘기하더니, 심미옥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또? 안 해! 안 한다고!”
나는 그들이 분위기를 보고, 옆에 있는 김 대리에게 물었다.
“아들인가?”
“그런 거 같네요.”
정 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돌아와 양팔을 벌렸다.
“맛집이면 저래도 됩니까?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닙니까?”
“뭘 기대했는데요?”
“멀리서 왔는데, 거기다 20팩이나 사간 손님인데. 그냥 한 그릇씩 빨리 끓여 줄 수 있잖아요.”
“우린 오늘 먹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요?”
“정찰하러 온 겁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식당의 문을 여는 심 사장과 젊은 남자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사장님!”
“네?”
“맛있어서 아침 일찍 달려왔습니다. 어제 사간 포장 제품 더 사 갈 수 있을까요?”
“…….”
“식구들 나눠 주니까 다 떨어져서요. 아시잖아요. 인터넷에서 금방 매진돼서 못 사는 거.”
심 사장의 옆에 있던 남자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셨어요? 거봐 엄마, 더 찍어야 한다니까.”
“안 한다고!”
내게 답도 하지 않고 둘이 티격태격을 한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더 만드셔야죠. 전 한 달간 여기 갈비탕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근데 아드님이에요?”
“왜요?”
심 사장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동생인 줄 알았는데.”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런 게 이상하게 잘 먹힌다. 특히 금장식을 주렁주렁하고 진하게 화장한 심미옥 사장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그녀는 식당에 불을 켜고, 옆에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재열아. 창고 가서 남은 거 가져와.”
“잠시만 기다리세요.”
재열이라 불린 남자는 상냥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고, 창고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심미옥 사장은 말도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몇 개 드릴까요?”
남자는 금세 창고에 있던 제품 상자를 들고 왔다.
“몇 개씩 들어가나요?”
“스물다섯 개씩 들어갑니다. 오늘 정말 잘 오신 겁니다. 1차분은 이제 거의 다 나갔어요.”
“운이 좋군요. 그럼 또 생산은 안 하세요?”
“좀 늦었지만, 빨리해야죠. 2차분에는 채소들이 이제 과립으로 들어가 더 조리하시기 쉬울 겁니다.”
“이쪽 일 하시나 봐요. 잘 아시네요.”
“아, 네…….”
나는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남자는 내 명함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마켓 프레시에 계세요?”
“네.”
“잠시만요.”
남자는 계산대 서랍에 있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
플래딧 마케팅
김재열 이사
—
처음 듣는 회사다.
대충 명함을 보니, 벤더 같은데…….
“유통 일 하세요?”
“네. 얼마 전에 친구랑 시작했습니다.”
이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식당의 아들이 유통회사를 차렸고, 첫 제품으로 엄마의 갈비탕을 판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포장과 조리법 등이 엉성했던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원지훈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김재열은 자신의 옷에 손을 대충 닦고 곧바로 잡았다.
나는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고, 갈비탕 한 상자를 차에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정 팀장이 툴툴대며 말했다.
“어제 집에 가서 해 먹어 봤더니 이 맛이 전혀 안 나던데. 이걸 왜 또 사요?”
“2차분 생산한다잖아요.”
운전대를 잡은 김 대리는 대충 내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산부터 참여하시려고요?”
“네. 그래야 똑바로 만들죠.”
“알겠습니다. 다음은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 *
오전 11시.
김지영 이사가 알려 준 주소에 도착했다.
아직 이삿짐 차도 없었고,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오피스텔 로비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10분 정도 인터넷 검색을 했을까?
“팀장님?”
나를 부르는 거 같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짧은 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하연두.
그녀는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렸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을 안 해서 그런지, 고등학생같이 보였다.
“연두 씨?”
“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누가 이리로 이사를 와서 도와주러 왔어요. 연두 씨는?”
“저 여기 살아요.”
인턴사원이 강남 오피스텔에?
원래 돈이 좀 있는 집의 딸인가?
“여기요?”
“네. 회사랑 가까워서 이쪽으로 이사했어요.”
“축하해. 연두 씨 부자였구나?”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친구 집에 얹혀살아요.”
“내가 아픈 데를 찌른 건가?”
“네. 엄청요. 막 후벼 파셨어요.”
“쏘리!”
“헤헷, 근데 누가 이사하세요?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응. 아는 사람일걸.”
“누군데요?”
그때, 로비의 회전문이 돌아가고, 김지영 이사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새하얀 티셔츠에 검은색 레깅스.
화장기 없는 얼굴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젊고 청순해 보였다.
그녀는 손목에 있던 머리끈을 입에 물고, 머리를 뒤로 묶으며 물었다.
“일찍 왔네?”
하연두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이사님이 늦으신 거죠.”
“미안. 좀 걸렸네. 근데 너 옷이 그게 뭐야?”
“옷이 왜요?”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복장을 훑어봤다.
회색 집업에 회색 바지.
평소에 자주 입는 옷이고,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한 적 없었는데?
“무슨 스님이야? 무릎은 왜 또 그렇게 늘어나 있어?”
“그래요?”
“짐 지금 올리고 있거든, 일단 올라가 보자.”
김 이사는 내 옆에 있는 하연두를 힐끔 보고 나에게 속삭였다.
“누구? 여자 친구?”
그녀는 하연두를 모른다.
300명이 넘는 회사에서 인턴의 얼굴까지 알기는 힘들 것이다.
“저희 팀원입니다.”
“그래? 우리 회사에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가 있었나? 반가워요. 김지영입니다.”
김지영 이사가 하연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다.
배경과 재산,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으니 그럴 것이다.
하연두는 김지영 이사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특판 사업팀의 하연두입니다.”
“여기 살아요?”
“예. 친구랑 같이 삽니다.”
“잘됐네. 여기 25층이니까, 다음에 한번 놀러 와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고맙습니다.”
“올 때 원 팀장도 좀 데려와요. 얘가 잘 못 먹어서 비실비실해.”
“네…….”
“우리 나중에 또 봐요.”
하연두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김지영 이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기 많이 비싸죠?”
“응. 많이 비싸더라. 이제 내 월급의 삼 분의 일이 월세로 나가게 생겼어.”
“월세예요?”
“내가 이 비싼 데를 어떻게 사겠어?”
“꼭 있는 분들이 이러시더라?”
“아빠 돈이지 내 돈은 아니잖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25층에는 이삿짐 직원들이 분주하게 짐을 나르고 있었다.
오피스텔 꼭대기의 펜트하우스.
대충 70평은 넘는 것 같았다. 고급스러운 자재와 통유리로 된 거실에서는 강남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천천히 집을 둘러보다가, 김지영 이사를 따라 주방의 식탁에 걸터앉았다.
“좋네요. 너무 큰 거 아니에요?”
“그래? 일단 보고 있어. 나 음료수 좀 사 올게.”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삿짐 직원들이 물건을 어디로 옮길지를 물어봤다.
마치 집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후.
김지영 이사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음료수들 드시고 하세요!”
“드레스 룸 정리 끝났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땀이 범벅된, 이삿짐 직원이 음료수를 받아 들며 말했다. 김 이사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 팔을 확 움켜잡았다.
“가자.”
“어딜요?”
“옷 갈아입으러.”
“옷을 갈아입어요? 왜요? 이게 어디가 어때서요?”
그녀에게 이끌려 들어간 드레스 룸.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분하고 깔끔한 여자 정장이 3분의 1.
파티나 드레스 복이 3분의 1.
나머지는 와이셔츠와 슈트 등의 남자 옷이었다.
남자가 있나?
그럼 이사를 하는데 왜 나를 불렀지?
김지영 이사는 자연스럽게 남자 옷이 걸려 있는 칸으로 걸어가,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 어때?”
빨간 골프 웨어를 꺼내, 내게 보였다.
“남자 옷이 뭐 이렇게 많아요?”
“왜, 많으면 안 돼?”
나는 옷걸이에 걸린 남자 옷들을 하나씩 오른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없다. 아무런 생각이 들어 있지 않다.
이는 이 옷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왜 입지도 않는 옷을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두는 것일까?
나는 그녀가 조금 전 만졌던 골프 웨어를 받아 들었다.
이건 김 이사의 조금 전 생각이다.
“전 빨간색은 좀…….”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옷장에 다시 걸어 놨다.
그리고 다른 남자 옷들을 만지작거렸다.
옷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남자 구두 몇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구두를 손으로 만지자.
“구두는 또 뭐예요?”
내가 묻자, 김 이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요즘 무섭잖아. 인터넷 보니까 다들 이렇게 한다던데?”
“제가 신던 거, 냄새 안 나는 거로 몇 개 가져다드릴게요.”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이 남자 옷들도 그래서 산 거예요?”
“뭐 비슷하긴 한데, 사다 보니까 재미있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내 남편 입힐 생각 하면서 사다 보니까 많아지더라고.”
“후……. 누군지 이사님 남편 될 사람은 좋겠네.”
“응?”
“몸만 들어와도 되니까요.”
김지영 이사는 말없이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