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48
48. 제가 좀 이래요
병원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와 내게 업힌 남자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응급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확인하고,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긴 벤치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후…….”
그때, 시계를 확인한 정진택 팀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부장님. 가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에 다 젖은 검은 셔츠.
그는 내 형편없는 상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 계세요. 제가 차 가져올 테니까. 그동안 세수라도 좀 하세요.”
“제가 운전한다고 했는데…….”
“거울 좀 보고 말씀하시죠. 차 앞으로 가져올 테니까, 전화하면 나오세요.”
정 팀장은 말을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고 화장실로 가려는 순간, 함께 병원까지 달려온 여자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의사세요?”
“아니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예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요.”
맑은 눈에 아담한 코.
유난히 붉은 입술의 그녀는 작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거 쓰세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쓰세요.”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울리는 전화.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여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손수건을 빈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아까와는 다른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통화를 하는지…….
나는 여자가 내려놓은 손수건을 움켜잡았다.
여자의 목소리인가?
이건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라는 OST다.
허밍 하듯이 부르는데,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벤치에 앉아 초조한 표정의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아시는 분이세요?”
내 질문에, 여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근데 왜…….”
“걱정돼서요.”
“보호자는 연락했어요?”
“네. 보호자 오실 때까지만 있으려고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걱정된다고 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남아 있겠다는 것이.
“아까 통화하는 거 살짝 들었는데요. 약속 있던 거 아니셨어요?”
“보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요. 제가 좀 이래요.”
수줍은 미소를 짓는 여자.
옆에 앉으려는 순간,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잉. 지이잉.
정진택 팀장.
여자와 더 대화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미팅에 늦을 수 있기에 그만 가야 했다.
“저기요. 제가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빨리 가보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연락처 주시면 손수건 돌려 드릴게요.”
“비싼 거 아니에요. 쓰시고 그냥 버리셔도 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바쁘신 거 같은데, 빨리 가보세요.”
“예. 그럼.”
병원을 나오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도 아닌데.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 * *
미팅은 별 내용이 없었다.
책임자를 봐야지만 계약하겠다는 농장 주인의 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자리였다.
왜인지 모르지만.
미팅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그 여자 생각뿐이었다.
남자가 쏟아 낸 거품 사이로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집어넣은 그녀.
하이힐을 벗어 들고 맨발로 뛰던 그녀.
약속까지 취소하며, 끝까지 남아서 모르는 사람을 지켜보겠다던 그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돌아오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정진택 팀장이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걱정되세요?”
“네?”
“아까 그 남자요. BO푸드 직원 같던데…….”
“그래요?”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 못 보셨어요?”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다.
내가 가만있자, 정진택 팀장이 다시 물었다.
“근데 그 여자는 누굴까요?”
“글쎄요. 모르죠.”
“걱정되시면, 병원에 잠깐 들렀다 갈까요?”
사실 이러면 안 되지만.
응급실에 실려 간 남자보다 여자가 걱정됐다.
“예. 잠깐만 들렸다 가보죠.”
“알겠습니다.”
30여 분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로 들어가자, 나를 알아보는 의사가 있었다.
“저. 선생님!”
“아……. 걱정돼서 다시 오셨나 보네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환자분은 방금 의식을 찾으셨고, 회복 중에 계십니다.”
“다행이네요.”
“저 그리고 다음에도 혹시 일 생기시면, 절대 업고 뛰시면 안 됩니다. 꼭 구급차가 올 때까지 꼭 기다리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 마음이 좀 급했습니다. 보호자는 왔나요?”
“글쎄요.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요?”
나는 응급실을 가로질러, 복도로 향하는 문으로 나갔다.
여자가 앉아 있던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 다시 오셨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로 돌아, 한 손에 400mL 생수병을 들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안 가셨어요?”
“네. 보호자가 좀 늦는다고 해서요.”
“연락됐으면 그냥 가시지.”
“물만 좀 챙겨드리고 가려고 했어요. 그리고 저기…….”
“네?”
“죄송했어요. 구급차 오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깨어났으면 됐죠.”
“저희 아버지도 5분만 빨랐더라면……. 후……. 아닙니다.”
여자는 생수병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서둘렀구나.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부장님. 그 남자 괜찮답니다. 그만 가시죠.”
눈치 없는 정진택 팀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여자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 *
MD 사업부의 17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화장을 짙게 한 이은지와 김태하 팀장이 서 있었다.
“신부 화장을 했네? 오늘 결혼해?”
“야!”
김태하는 다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보조 출연자 한 명이 펑크가 나서, 우리 자기가 대신하려고.”
나는 김태하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려 이은지를 바라봤다.
“은지 씨, 그럼 오늘 데뷔하는 건가?”
“헤헷. 그런가요?”
이은지는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웃어 보였다.
“잘하고, 이따 내려갈게.”
“옙!”
나는 자리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고 등을 기댔다.
잠시 쉬고 싶었지만.
마성근 팀장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부장님. 청년고기에서 연락 왔는데요. 이번 특판 물량 구했답니다.”
“벌써요?”
“네. 안심, 등심, 살치, 부챗살까지 종류별로 싹 가져왔어요.”
“단가는요?”
“최고입니다. 정진보다 더 낮아요.”
마 팀장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마진을 정말 포기한 것인가?
청년고기에서 제시한 단가는 기존의 정진푸드보다 10% 이상 낮았다.
“통화는 해 보셨어요?”
“아직요.”
“그럼 제가 할게요.”
“알겠습니다. 저는 일정이랑 판매 수량 정리해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마 팀장이 자리로 돌아간 것을 보고, 휴대폰을 꺼냈다.
“원지훈입니다.”
– 예 부장님.
“1차 특판 물량을 좋은 단가로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진은 붙이신 거죠?”
– 네. 마진은 충분히 붙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총알이 많이 생겨서, 경매장 가서 몽땅 질러 버렸습니다.
마진 없이 납품했다고 생색을 낼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마진을 충분히 붙였다는 거짓말을 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저희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 아닙니다. 이미 많이 도와주셨는데요. 이제는 저희가 싸워야죠.
“저희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 말씀만으로도 든든하네요. 아 참, 부장님.
“네?”
– 날인된 계약서로 대출을 좀 받으려고 하는데요. 혹시나 확인 전화가 갈 수 있습니다.
신용보증기금에서는 계약서를 담보로 대출을 내준다.
이를 받겠다는 말 같은데…….
“신보를 받으시려고요?”
– 네. 충북 음성에 축사를 좀 크게 지으려고요. 아버지의 꿈이셨거든요.
고재익.
생각보다 크고 멀리까지 보고 있었구나.
그래서 마진 없이 납품까지 하면서, 계약을 이어 가려고 했구나.
그의 말에.
내 마음속에 있던 작은 걱정들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알겠습니다. 저 대표님. 혹시 정진에서는 연락이 왔나요?”
– 아니요.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거 아직은 모를 겁니다.
“알겠습니다. 정진에서 연락 오면 말씀해 주세요.”
– 네. 그러겠습니다.
정진푸드 성진환의 팔다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청년고기에서 최대한 많은 업체와 계약을 맺는 것이 우선이다.
판매량이 적은 부위들을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어야, 그들도 이 계약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시간 싸움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6층 제품 전시실.
정이나는 자신의 분량 촬영을 마치고 돌아갔고.
십여 명의 뮤지컬 배우들이 라라랜드의 한 장면처럼 춤과 노래를 하고 있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배우들.
그리고 가장 구석에 혼자 동작을 틀리는 이은지가 보였다.
“컷!”
이정우 이사가 소리치자, 음악이 꺼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은지는 이 이사와 다른 출연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정우 이사의 뒤에 서 있는 김태하의 옆으로 걸어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아직 멀었어?”
“지금 씬만 찍으면 끝나. 근데 우리 은지 씨 힘들어서 큰일이네.”
“왜?”
“당연하지. 연습도 없이 곧바로 투입됐는데, 당연히 힘들지.”
“몇 번이나 틀렸는데?”
“한 일곱 번?”
많이도 틀렸구나.
화를 내는 이정우 이사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허리를 굽히며,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
응급실에서 마지막까지 있던 그녀였다.
“진아 씨! 여기야! 여기!”
출연진 중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이정우 이사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이봐요! 지금이 몇 시입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 하나를 기다려야겠어요?”
“죄송합니다.”
연신 허리를 숙이는 그녀.
나는 이정우 이사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간을 구기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님. 어차피 은지 씨로는 힘든 것 같은데, 빨리 마무리하시죠.”
여자는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아까 그…….”
“다른 분들 기다리십니다. 빨리 준비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아라 불렸던 여자는 허리를 두어 번 더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이정우 이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원지훈.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원래 손발을 맞추던 분이 하시면 금방 끝날 겁니다.”
“흠……. 이번만이다. 다시 껴들면 가만 안 둔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이정우 이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총괄 책임이 자신이기에 화를 냈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기 힘든 말을 내가 해 준 것임을.
의상을 갈아입은 여자가 밖으로 나와 자신의 자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은지는 입을 삐쭉 내밀고, 나와 김태하의 사이로 들어왔다.
“은지 씨 데뷔 기회가 날아갔네?”
“그러게요.”
“근데, 춤은 어디서 배웠어? 처음 하는 사람이 아니던데?”
“그래요?”
내 농담에 기분이 좋았는지, 이은지가 배시시 웃었다.
돌고, 점프하며 격렬하게 촬영하는 장면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물론.
내 눈에는 진아.
성도 모르는 그 여자의 모습만 들어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