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49
49. 부장님은 왜 MD를 하세요?
오후 6시.
부서원들이 하나둘 퇴근을 준비했다.
나는 이정우 이사에게 받은 사진과 편집되지 않은 영상들을 차례대로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
진아라고 불리던 그녀가 나오는 장면을 재생했다.
돌리고, 또 돌리고…….
그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넣고 싶었다.
“늦으십니까?”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마성근 팀장이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동영상 플레이어 구석의 닫기 버튼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잘못 눌러서 오히려 커져 버린 동영상 플레이어.
큰 모니터에 영상이 가득 차 버렸다.
“오오!”
마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니터에 가까이 다가왔다.
눈치챈 건가?
모든 얘기에 MSG를 치는 그가 눈치채면 귀찮아지는데…….
“왜요?”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마 팀장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이거 TV CF 장면인가요?”
“네.”
“아주 좋네요. 느낌이 확 오네요. 역시 이정우 이사님이십니다. 보라색 배경에 이런 화려한 의상들을 조합해서 아주 눈에 확 들어와요.”
“그죠?”
“네. 근데 정이나는 어디 나오나요? 그것도 좀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다행이다.
역시 마 팀장은 눈치가 빠르지는 않다.
나는 정이나가 나온 장면을 재생하고,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퇴근 안 하세요?”
“아 맞다. 부장님. 청년고기 고 대표가 메일 보냈다네요.”
“무슨 메일이요?”
“저야 모르죠. 중요한 메일이라서, 부장님 개인 메일로 보냈대요. 그나저나 저희 팀 회식인데, 간만에 함께 하실래요?”
얼마 전 개인 메일을 알려 달라는 전화를 받았었는데…….
뭘 보낸 것일까?
나는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아뇨. 메일 좀 확인하고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가요. 자자 빨리 가자고요.”
마성근 팀장이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대충 컴퓨터를 끄고,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인근 실내 포장마차로 갔다.
* * *
이른 시간.
장사를 방금 시작한 실내 포차는 우리가 첫 손님인 것 같았다.
회사 얘기, 거래처 얘기, TV 드라마 얘기 등.
우린 한참을 깔깔대며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하연두가 뜬금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부장님은 왜 MD를 하세요?”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다.
“결과를 바로 볼 수 있으니까.”
“결과요?”
“상품을 구해 오고, 상품을 보기 좋게 포장하고, 마지막으로 등록하면 소비자가 바로 답을 주잖아. MD보다 결과를 빨리 볼 수 있는 직업이 있을까? 내가 성질이 좀 급해서 말이야.”
“그렇군요.”
“그럼 연두 씨는?”
“처음에는 BO푸드라는 명함을 받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그럼 지금은?”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눈치 없는 마성근 팀장이 고개를 들이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우리 영진이, 경일이, 대성이, 우진이, 초록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잠룡, 부장님 때문에 회사에 다니는 거야.”
얘기를 들은 다른 팀원들이 마 팀장을 일제히 바라봤다.
“저는 좀 빼 주시죠.”
한 손을 올린 김경일 대리.
“이거 감동인데요?”
“하하하 팀장님 취했어요? 왜 갑자기 진지 모드입니까?”
“팀장님 저도 감동입니다요.”
특판팀에 새로 온 유영진 과장과 김대성, 이우진이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근심이 가득한 표정의 하연두.
대충은 예상했지만.
그날의 일을 쉽게 지우긴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하연두가 화장실을 간 사이, 그녀가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던 휴짓조각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역시 그랬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떠들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일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실내 포차를 나와.
나는 하연두의 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연두 씨.”
“네, 부장님.”
“갑자기 내가 속이 안 좋아서 말이야. 뜨끈한 국물이 땡기는데 연두 씨는 어때?”
“저요?”
“응. 집도 같은 방향이잖아. 같이 가자.”
하연두는 내 의도를 모르고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나는 2차를 가겠다는 다른 팀원들에게 말을 하고, 반강제로 하연두를 택시에 태웠다.
“차 안 가져가세요?”
“응. 대리 오면 늦잖아. 거기 곧 문 닫는단 말이야.”
“어디요?”
나는 씩 웃고, 택시 기사에 목적지를 말했다.
“신원 시장이요.”
내 말을 들은 하연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는 그녀도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양지푸드의 서보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서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퇴근하셨어요?”
– 아……. 부장님! 아니요. 아직 회사입니다.
“요새도 늦게까지 하세요? 함 사장님이 좀 진상이죠?”
– 아니요. 아주 좋은 분이세요. 근데 늦게 무슨 일이세요?
“요새 우리 특판팀 연두 씨랑 새로운 레트로트 개발하신다면서요?”
– 네. 연두 씨 덕분에 한 달은 빨리 출시할 것 같아요.”
“그래요?”
– 다른 회사 실적, 리뷰, 반품률, 유사 제품들까지 싹 찾아 줬거든요.
“오호 그래요?”
나는 말을 하면서 하연두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봤지만, 미세하게 입꼬리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네. 부장님 연두 씨한테 좀 잘해 주세요. 요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정합니다. 제가 좀 소홀했네요.”
– 꼭이요. 그리고 연두 씨한테 미리 전화는 해 놨는데요. 내일 테스트 상품 가져간다고 전해 주세요.”
“예. 내일 오시면 잠깐 차나 한잔해요.”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하연두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뭘 이런 걸 스피커 폰으로 하세요?”
“왜 듣기 싫었어?”
“그리고 부장님. 저한테 소홀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렇게 우린 30여 분을 달려 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내가 앞장서서 걷자, 하연두가 달려와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할머니 국밥집 가는 거죠? 안 그래도 할머니가 부장님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진짜?”
“네.”
“와……. 그 깐깐한 김옥순 여사님이?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허름한 국밥집 앞.
김옥순 할머니는 밖으로 나와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연두는 나보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양팔을 크게 벌리며 걸어갔다.
“할무이! 내 왔다.”
“욘두! 우리 손녀 왔나? 별일 없제?”
자연스러운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하연두.
그리고 저런 할머니가 아닌데…….
나한테는 분명 퉁명스럽고 까칠하게 대하는데…….
둘은 환하게 웃으며 가볍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할머니는 뒤에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문디, 밥 묵나?”
여전히 나에게는 퉁명스럽고 까칠하다.
“아니. 안 무웃다!”
어색한 내 사투리에 할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3년 넘게 알던 할머니였는데, 이렇게 웃는 것은 처음 본 것 같았다.
하연두 때문인가?
“엄마? 지금 웃었지? 웃은 거 맞지?”
“내가 와 니 어무이가?”
“그것보다 방금 웃었잖아. 그지? 맞지?”
“아이다.”
“에이. 맞는 거 같은데? 어무이는 연두 씨만 좋아하는 기가?”
“문디. 니랑 욘두랑 같나? 햇소리 말고 퍼뜩 들어온나!”
국밥집 안으로 들어가.
하연두는 주방으로 들어가 국밥을 담았다. 그리고 할머니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대충은 알았지만.
그녀가 이 정도로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는지는 몰랐다.
하연두는 커다란 쟁반에 국밥을 들고 왔다. 그리고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국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깍두기 국물을 그녀의 국밥 그릇 안에 따라 줬다.
“이건 아직 몰랐나 보네. 여긴 이렇게 안 하면 싱거워.”
내 말을 들었는지.
주방에 있던 할머니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소리를 질렀다.
“이 문디! 싱거우면 딴데 가서 쳐 묵으라!”
하연두는 피식 웃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부장님, 요즘 그렇게 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뭐가?”
“다른 사람 음식에 깍두기 국물 부으면요.”
“뭐라고 하는데?”
“꼰…….”
“설마 꼰대?”
“하하하 괜찮아요, 저도 꼰대 입맛이거든요. 부장님이 그러셨죠? MD들은 누구나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요.”
“응.”
“저 해 볼게요. 제가 만들어 둔 무기가 아까워서 해 보려고요.”
하연두는 다시 국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고 환하게 웃었다.
* * *
며칠 후 1층 로비.
출근하는 내게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원지훈! 원지훈 나오라고!”
정진푸드의 성진환 대표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보안팀 직원들이 끌어내고 있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뭐 하는 겁니까?”
“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놔! 놓으라고!”
내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보안팀 직원들이 그를 놓아 줬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왜? 여기서는 쪽팔려? 네가 얼마나 잔인하고 나쁜 놈인지 다 알려야지, 안 그래? 안 그러냐고?”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하긴, 고재익 대표가 거래처 50% 이상을 가져갔고, 정진푸드는 이에 부도 위기라는 말까지 들었다.
언젠간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생각은 했는데…….
그리고 나에겐 지금을 위해 준비한 무기가 있다.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닐 것 같은데? 나가죠. 내가 아주 큰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들려오는 수많은 생각들.
얼마나 혼란스럽고 어려운지 대충은 감이 왔다.
성진환은 내 팔을 힘껏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또 치시게? 그때처럼 또 들이받으려고?”
그의 힘에 내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끌어안았다.
“부장님. 상대하지 마세요.”
하연두.
출근하던 하연두였다.
그녀는 나를 놓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한 표정으로 성진환의 앞에 섰다.
“대표님. 자꾸 이러시면 고소하겠습니다.”
“뭐?”
“경찰을 부르겠다고요.”
“그래 불러! 부르라고!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당장 부르라고!”
하연두는 당당했다.
한 치의 겁도 없이 괴물 같은 성진환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가 이 정도의 용기를 보였다면.
이젠 내 무기를 꺼내 보일 차례다.
나는 하연두의 옆으로 걸어가, 성진환 대표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성진환. 너 그동안 참 많이도 해 먹었던데?”
“뭐?”
“군납 제품은 등급 속여서 들어가고, 애들 급식에도 장난질을 치고. 아주 짭짤하셨겠어.”
이는 며칠 전 고재익 대표가 보내온 개인 메일로 보내온 내용.
처음에는 나도 놀랐다.
성진환이 이렇게 많은 비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왜 이런 자료들을 경찰에 넘기지 않았냐는 내 질문에, 고 대표는 아버지의 직원이었던 그를 고발할 수 없었다고만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먼저 배신과 불법을 저지른 것은 성진환이고 이때부터 모든 관계는 깨진 것이다.
“너 참, 아주 일관성 있는 개새끼더라.”
“……!”
눈을 크게 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성진환 대표.
나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내가 어떻게 했는지 조금만 말해 줄게. 조만간, 아니 어쩌면 지금쯤 너희 사무실에 경찰이 들이닥쳤을 거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지금 가보는 게 좋을 거야. 하나라도 더 숨겨야 하잖아. 안 그래?”
“너……. 이 새끼.”
“아 참, 가기 전에 메이크업도 좀 받어. 기자들에게도 쫙 돌렸으니까.”
성진환이 다시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곳은 내 구역.
우리를 지켜보던 보안팀 직원들이 달려와 그를 강제로 끌어냈다.
긴 한숨을 내쉬는 하연두.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잘했어. 가자. 늦겠다.”
“예. 부장님.”
하연두는 씩 웃으며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