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5
5. 줄을 서시오
김지영 이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회사는 어때? 팀원들은 만나 봤고?”
“네. 모두 좋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 근데 왜 BO로 온 거야?”
처음에는 돈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는 돈이 아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BO푸드라는 대기업에서 지원도 해 주겠다, 대한민국 1등 커머스……. 그거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내 답에 만족했는지, 김지영 이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남자라면 그 정도 꿈은 있어야지.”
“이사님은요?”
“나도 비슷해. 처음에는 회장님 지시로 왔지만, 이제는 제대로 해 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말인데, 지훈아. 아니 원 팀장.”
“네?”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물잔을 들어 올리며, 김지영 이사의 눈을 바라봤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 할 말이 많음이 느껴졌다.
“이제 한배를 탔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커머스의 생명은 MD 사업부야. 근데 MD 사업부의 절반은 체인마켓 출신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최구열 이사가 데려온 사람들이야.”
“이사님은 태하가 있잖아요.”
“태하? 너 몰랐어? 걔도 최 이사가 데려온 사람이야. 가라는 대학은 안 가고 커머스를 해 보고 싶다면서, 바로 미국으로 가 버렸거든.”
김태하가 최구열 이사의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김지영 이사를 누나라고 부르지 못한다고 했던 것인가?
“태하가 그룹폰에서 근무했어요?”
“맞아. 한국에 오자마자 얼마나 최 이사 얘기만 하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그랬군요.”
“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김지영 이사.
가족의 일에 더는 끼어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체인마켓 사람들은요?”
“그 박쥐 새끼들은 말도 마. 차기영 부장부터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 난 인수를 반대했는데, 정 대표님이 억지로 밀어붙인 거야. 아무래도 자기 사람이 필요했겠지.”
“박쥐라……. 적절한 표현 같네요.”
“체인마켓에서 넘어온 애들만 오십이 넘잖아. MD 사업부에도 스물이 넘을걸?”
원스몰을 할 때도 체인마켓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놈들은 우리가 구성한 상품이나 이벤트를 그대로 베꼈고, 심지어 우리와 거래 중인 공장의 물건을 몰래 뒤로 빼내기도 했다.
“…….”
“보통의 회사에서 팀장이 차장이 되고, 차장이 부장이 되고, 다시 부장이 이사가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글쎄요. 한 10년?”
“맞아. 그렇겠지. 근데 여긴 좀 달라. 많은 조직이 합쳐졌고, 덕분에 서로 잘났다고 매일 같이 싸우고 있어. 그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빠르게 올라설 수 있을 거야. 너나 태하처럼 머리 팽팽 돌아가는 애들도 이 점을 알고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일 테고. 내 말이 틀려?”
솔직히 맞다.
300억이 투자된 새로운 커머스.
여러 세력이 모인 이곳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원 팀장은 똑똑하니까 내 말 이해했을 거야. 우리 조만간 다시 보자.”
* * *
다시 돌아온 사무실.
나는 책상 위의 비품들을 정리했고, 팀원들은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때.
“여! 원 팀장! 오랜만이야!”
차기영 부장과 그의 오른팔 박대영 차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체인마켓의 창업 멤버들.
나이와 경력은 나보다 10년은 많다.
“네. 차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자리는 어때? 내가 특별히 원 팀장 자리는 신경 좀 쓰라고 했어. 하하하.”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앞에서는 사람 좋은 척 껄껄대며, 뒤에서 별별 작업을 다 하던 인간들이다.
“근데 부장님.”
“응?”
“우리가 이 정도로 친했나요? 이렇게 반말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아……. 그랬나?”
차기영 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파티션 너머에 앉아 있는 김태하의 어깨가 흔들렸다.
“석 달 전에 기억 안 나세요? 원스랑 독점 계약한 할랄 푸드 몰래 수입하려다가 걸리셨을 때요. 그때 미팅 자리에서 법정까지는 가지 말자고 하셨잖아요.”
“그…… 그랬나? 하하하, 원 팀장은 젊어서 기억력도 좋네. 별걸 다 기억하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내일 오전 팀장 회의 때 보자고!”
이제 이를 갈겠구나.
하지만 괜찮다. 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내 손바닥 안이니까.
차기영 부장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떠나자, 파티션 너머에 있던 김태하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잽이 아니라 어퍼컷인데? 역시 원지훈이야.”
“꺼져.”
“하하하.”
나는 김태하의 얼굴을 밀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는 마성근 과장을 불렀다.
“마 과장님!”
“네. 팀장님!”
마우스를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오는 마성근.
나보다 15살이나 많은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마성근은 차려 자세를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MD 사업부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목소리도 좀 낮추세요. 누가 보면 군대인 줄 알겠어요.”
“아……. 네. 뭐 하실 말씀이라도.”
“현재 팀원들이 진행 중인 업무들을 정리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10분 내로…….”
“아니요. 10분이 아니라, 내일 오전까지 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빠진 것 있나, 꼼꼼히 살피라고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아셨죠?”
“네!”
“그리고 오늘 약속 없으신 분들은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가시죠.”
“알겠습니다. 팀원들 모두 참석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전부 안 오셔도 됩니다. 그냥 인사나 하려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팀장님이 부르시는 데 당연히 참석해야죠!”
정말 부담스럽다.
마성근 과장은 수직적인 구조의 BO푸드 출신이라 그런지, 무슨 말만 해도 고개를 숙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인 마성근 과장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강제로 돌려 자리로 돌아가도록 했다.
“원 팀장님은 오자마자 군기를 잡으시네?”
파티션 너머에 있는 김태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다시 말했다.
“너 기억나?”
“뭐?”
“고3 때 여고 축제 가서 말이야.…….”
김태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 그걸 왜?”
“직원들 사내 게시판에 잘 나온 사진 몇 장 추려서 올려줄까?”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어?”
“당연하지. 뭐 못 믿겠다면 내일 아침에 사내 게시판을 보든가.”
“알았어. 알았다고!”
* * *
오후 6시.
팀원들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큰 와규 집으로 향했다. 마성근 과장의 강요 때문인지,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다섯 명 모두가 따라왔다.
“여기 비싼 데 아닌가요?”
가게 입구로 들어서던 마성근 과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비싼 거 사드려야죠.”
강남에 나오면 종종 오는 와규집으로 1인분에 3만 원이나 하는 곳이다.
하얀 눈꽃 마블링이 가득한 꽃살.
다들 구워지지 않은 고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기가 불판에 올라가고.
마성근 과장은 익지도 않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제가 팀장님 덕분에 이런 고급 고기를 다 먹어 보네요. 하하하.”
씹지도 않고, 극찬한다.
역시 아부라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인물이다.
“천천히 드세요. 대성 씨는 어때요?”
“전 바짝 익혀 먹습니다.”
그의 말에 고기를 굽던 와규집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드세요.”
“큼……. 그래요?”
“네. 더 익으면 질겨져요. 그리고 드실 때 와사비 조금 올려서 드셔 보시겠어요?”
김대성은 직원이 권유한 대로 고기를 입 안에 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죠?”
그리고 직원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끝자리에서 말없이 잔에 술을 따르는 김경일 대리를 불렀다.
“경일 대리님은 최 이사님이랑 미국에서 일하셨다고요? 그럼 영어 잘하시겠네요?”
“아니요, 잘 못 합니다.”
“아 참, 김태하 팀장도 그룹폰에 있었죠?”
“네. 그룹폰 창업 멤버셨습니다.”
“근데 왜 우리 팀으로 오셨어요? 김태하 팀장 팀으로 가시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사님이 생각이 있으셨겠죠.”
김경일 대리.
그는 말수도 적고,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나는 속이 보이지 않는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술기운을 빌려 떠보겠지만, 나는 다르다.
오른손을 뻗어 의자 위의 가방을 살짝 건드렸다.
가방에는 아무런 생각이 담겨 있지 않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
입고 있는 셔츠 상의를 살짝 건드려도 봤다.
오로지 가족, 지인에 대한 기억들뿐.
회사나 일에 대한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나.
마성근 과장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원 팀장님! 우리 원 팀장님!”
“네?”
“제가 원 팀장님이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하하핫.”
벌써 혀가 꼬부라졌다.
소주 한 병 마신 것이 전부였는데…….
“왜요?”
“아까 김지영 이사님 보고 오셨죠?”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누굽니까? BO푸드에만 15년입니다. 김 이사님 비서실장이 제 동기거든요. 하하하.”
마성근 과장은 크게 웃다가, 고개를 획 돌려 옆에 앉은 이우진을 노려봤다.
“저리 가 이 첩자 새끼야.”
“또 왜요? 왜 그러세요?”
“빨리 너희 체인월드로 꺼지라고!”
이우진은 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과장님은 술만 드시면 저래요. 제가 체인에서 왔다고 무조건 첩자라면서요. 실제로 체인에서 근무한 지 1개월밖에 안 됐는데…….”
김지영 이사의 말처럼, 많은 조직이 합쳐졌다.
그래서 지금처럼 한 팀 내에서도 서로 파벌을 놓고 싸우고 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술잔을 올린 마성근 과장의 옷깃을 잡았다.
그 순간 들려온 그의 생각들.
40대의 만년 과장 마성근.
그의 어깨에 실려 있는 무게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왜 이렇게 라인이라는 것에 집착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BO푸드라는 대기업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승진할 수 없는 구조였을 테니까.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그만 드세요.”
“와……. 우리 팀장님이 저 챙겨 주시는 겁니까? 하하하하, 아까 차 부장 한 방 먹이실 때 완전히 시원했습니다. 아마 저 첩자 새끼 말고는 다 그랬을걸요? 그지?”
마성근 과장은 입을 삐쭉 내밀며 팀원들을 살폈다.
이우진은 고기를 굽던 집게를 내려놓고, 급하게 소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성근 과장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팀장님은 회장님 라인인가요?”
“회장님이요?”
“네. BO푸드 김상민 회장님이요. 그래서 김지영 이사님 만나신 거 아니에요?”
“라인이라……. BO에 오래 계셨다니까 여쭤볼게요. 저는 어디에 줄을 서야 할까요?”
장난으로 물었다.
누구의 뒤에 줄을 설 생각 따위는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마성근 과장은 아니었다.
그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다소 진지해진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