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54
54. 굉장한 워크숍이 될 겁니다
“부장님.”
오전 11시.
이진성 팀장이 다가와 나를 불렀다.
설마……. 또?
맛집 마니아인 그는 점심시간에는 최대한 피해야 한다.
“오늘 점심 약속 있습니다.”
내 단호한 답에, 이진성 팀장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점심 먹자는 거 아닙니다. 워크숍 계획서 방금 인트라넷에 올려놨습니다.”
“다행이네요.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따 식사 후 회의를 좀 했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얼마나 대단한 계획이시길래…….”
“네. 이번엔 굉장한 워크숍이 될 겁니다.”
부서원 72명이 한 번에 움직일 수 없어서, 워크숍은 이번 주 목, 금과 다음 주 목, 금에 두 개조로 나눠서 가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 계획은 여행과 맛집을 좋아하는 이진성 팀장에게 맡겼었다.
나는 그가 돌아간 후, 인트라넷에 올라온 문서를 확인했다.
“후…….”
역시 이진성 팀장답다.
특별한 워크숍을 계획해 보겠다고 나서더니…….
그냥 먹고 노는 워크숍이 아니라.
힐링과 업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왔다.
입가에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며, 멀리 앉아 있는 이진성 팀장을 바라봤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이진성 팀장은 곧바로 각 팀의 팀장들과 박대영 차장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내가 들어오자, 그는 화이트보드에 그려 둔 전국 지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번 워크숍은 크게 가공식품과 신선식품으로 나눠 봤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신선식품팀에 맞는 워크숍을 준비했습니다.”
이진성 팀장은 미리 프린트한 종이를 우리에게 나눠 주고 말을 이었다.
“요즘은 프리미엄 과일이 대세죠. 샤인 머스켓, 비싼 가격임에도 없어서 못 사는 제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요?”
퉁명스럽게 묻는 정진택 팀장.
이진성 팀장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 팀장님. 지금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프리미엄 과일이 뭐가 있을까요?”
“엔비?”
정 팀장의 답에, 이진성 팀장은 양팔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며 감동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답! 바로 엔비 사과! 지구상 10개국에서만 재배되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재배하는 귀한 품종! 보통 사과의 당도가 12에서 15브릭스인데, 엔비 사과는 무려 17브릭스나 된다는 거 모두 아실 겁니다.”
정진택 팀장이 한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엔비는 안 그래도 우리가 여름부터 접촉했었습니다. 근데 대형 마트 벤더들이 사과 상자에 돈 담아가서 계약해 버렸답니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볼까 했는데, 기존 벤더들이 워낙 관리를 잘해 놔서 들어갈 구멍이 없어요.”
뉴질랜드 정부 산하기관에서 20년 연구 끝에 개발한 엔비 사과.
엔비 사과는 아무나 심을 수 없다.
스타 아시아라는 에이전트에서 묘목을 판매하며, 수확된 사과 전량을 에이전트가 판매를 대행한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각 농가에 판매 권한을 주면서 벤더들 간의 경쟁이 심해져 있는 상태였다.
“아니요. 며칠 전에 벤더와 계약을 파기한 농가가 하나 있습니다.”
“정말요?”
정진택 팀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예. 정말입니다. 그리고 우린 목요일 금요일에 농가의 수확을 도우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럼? 워크숍에 가서 사과나 따자는 겁니까?”
“우리 신조가 뭡니까? 먹어 본 것만 팔자. 이거 아닙니까? 가서 직접 먹어 보고 계약하고! 이 얼마나 훌륭한 플랜입니까?”
감동에 찬 표정의 이진성 팀장.
멍한 표정의 정진택 팀장.
다른 팀장들은 둘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나섰다.
“전 좋은데요? 다른 팀장님들은 어떠십니까?”
“저도 좋습니다. 이진성 팀장님. 다음 주에 가공식품팀은 어디로 갑니까?”
김태하 팀장의 질문에.
이진성 팀장이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 열 끼! 감동의 맛집 투어! 제가 전국의 맛집들을 다 표시해 놨습니다. 다음 주에 워크숍을 가는 부서원들은 맛집들을 돌아다니면서, 판매가 가능한 제품을 찾는 겁니다.”
“하…….”
“왜요? 벌써 설렙니까?”
“아주 빡빡하고 배 터지는 워크숍이 되겠군요. 열 끼라…….”
“그 정도는 해야 식품 MD 아닙니까?”
김태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씩 웃어 보였다.
“이것도 좋네요.”
“자, 그럼 부장님은 이번 주에, 차장님이 다음 주에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진성 팀장의 질문에, 나와 박대성 차장이 동시에 답했다.
“네. 그렇게 하죠.”
* * *
목요일.
30여 명의 직원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그들은 모처럼 평일에 떠나는 여행에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처럼 들떠 있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춰 서고.
“잠시 쉬고 가겠습니다.”
“기사님. 딱 한 시간만 쉬었다 가죠!”
마성근 팀장의 말에 버스 기사가 놀라서 되물었다.
“한 시간이요?”
“저희가 하는 일이 이런 거라서요. 꼼꼼히 다 먹어 봐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부장님?”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이진성 팀장뿐이 아니다.
먹어 본 음식만 판다는 회사의 슬로건처럼, MD 부서원 대부분이 음식을 좋아한다.
“한 시간으로 될까요?”
“하하하, 거봐요. 기사님 편하게 쉬세요.”
버스가 멈추고.
부서원들은 휴게소의 스낵 코너들을 하나씩 습격하기 시작했다.
핫바, 통감자, 어묵, 떡볶이 등등.
모두가 전문가의 포스를 풍기며, 음식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부장님! 핫바 하나만 사 주세요.”
김대성이 내 옆에 달라붙어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렸다.
나는 미간을 구기고, 고개를 저었다.
“그 덩치에 핫바 하나로 되겠어?”
“사실 하나가 아니긴 하죠. 하하하.”
“대성 씨, 그럼 먹고 싶은 거 싹 털어 와 봐.”
나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그에게 건네고, 빈자리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러자 정진택 팀장과 장선영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앉아도 되죠?”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는 장선영 팀장이 털썩 앉으며 말했다.
“이미 앉았잖아요.”
“그런가요? 하하.”
나름 독특한 제품들을 골라 온 장선영 팀장.
그녀는 허브 통살 닭꼬치, 버터 알감자, 감자 핫도그, 문어 채소 어묵바를 하나씩 먹어 보며 맛을 음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터 알감자를 한 입 베어 먹고는 미간을 구겼다.
“흠……. 땡초를 넣었나?”
“에이, 무슨 휴게소 감자에 땡초를 넣어요?”
정진택 팀장이 되묻자.
장선영 팀장은 화를 내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땡초 맞다니까요!”
“무슨……. 그냥 버터 둘러서 굽더만?”
“먹어 봐요! 끝 맛에 알싸함이 있어요. 이건 땡초를 쓴 겁니다!”
정진택 팀장은 작은 감자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땡초는 무슨……. 그냥 버터 향만 나는구만!”
“아니라니까요. 얼마 내기할래요?”
“오호, 내기면 내가 안 지지. 십만 원?”
“부잣집 도련님이 좀 더 쓰시죠?”
“그럼 삼십!”
“콜. 갑시다. 바로 현금 주는 겁니다!”
장 팀장은 정 팀장의 손을 잡고, 알감자를 팔던 상점 앞으로 갔다.
그 사이, 김대성과 하연두가 커다란 쟁반을 양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카드와 영수증들을 건넸다.
15만 2천 원.
도대체 얼마나 사야 이 금액이 나오는 거지?
“부장님 카드라 심하게 무리해 봤습니다.”
김대성이 자랑스러운 듯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는 가득한 음식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어?”
“물론이죠. 우리는 휴게소에서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습니다. 그지 연두 씨?”
“네.”
하연두는 벌써 젓가락을 뜯어,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한참을 먹던 그녀가 배가 불렀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내게 물었다.
“부장님. 휴게소 음식은 왜 이렇게 비싸요? 허접한 콘도그가 4천 원이나 하고…….”
“도로공사 임대 휴게소라서 그래.”
“임대 휴게소요?”
“응. 도로공사가 31%에서 51%까지 수수료를 떼어가. 입점해 있는 저 업체들이 제품 원가에 인건비 뽑으려면 이 가격이 될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알감자 진짜 맛있네요. 이거……. 땡초 물에 삶은 거 같은데요?”
알감자 밑에 생긴 국물까지 쭉쭉 빨아 먹던 김대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때.
장선영 팀장이 두툼한 만 원짜리 돈뭉치를 탁탁 털며 김대성의 옆으로 다가왔다.
“맞아. 감자를 삶을 때 땡초를 같이 넣었다네.”
“헛! 팀장님 그 돈은 뭐예요?”
“재벌 집 도련님 주머니 좀 털었다. 왜?”
내기에서 이긴 그녀는 씩 웃고, 버스로 돌아갔다.
과수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
“오징어 들어간 핫바는 참립식품 제품입니다. 이번에 올라가면 바로 미팅해 볼 생각입니다.”
“맥반석 기기가 너무 작아서 물어봤는데, 가정용으로 나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거 우리도 판매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누구는 제품의 공장을 알아 왔고.
누구는 특별한 조리 기구에 대해 알아 왔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휴게소.
우리에게 그곳은 새로운 제품을 접하고 트렌드를 알 수 있는 곳이었다.
* * *
사과 농장 앞.
입구에서부터 진한 사과 향이 풍겨 왔다.
빨갛고 노랗게 영근 사과들.
우린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넓은 농장을 바라봤다.
4,500평의 규모에 1,500주의 웅장한 사과나무를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예쁘네요.”
“그죠?”
워크숍을 기획한 이진성 팀장과 마성근 팀장이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이 팀장님. 정말 계약 파기된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사실은 여기가 우리 팀 장소형 씨 집이거든요.”
“장소형 씨요?”
이진성 팀장은 농장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전팀의 장소형이 그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모셔 왔다.
“아이고 고맙구먼유. 이렇게 서울서 오시고.”
“아닙니다. 아버님. 당연히 도와야죠. 뭐부터 하면 될까요?”
“에이. 멀미도 나는데 좀 쉬었다 하죠.”
마성근 팀장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리고 장소형의 부모님을 보고는 히죽거리며 물었다.
“저 아버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장소형 씨 큰형은 장대형, 둘째 형은 장중형입니까? 하하하.”
마 팀장의 이런 농담을 처음 듣는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소형의 아버지는 달랐다.
“대형이는 작년에 사업이 쫄딱 망혔고, 중형이는 이혼허고, 사과는 잘 키웠는디 자식 농사는 엉망이네유.”
“네? 아……. 저…….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마성근 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장소형의 아버지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놀란겨? 농담이여! 농담! 하하하 소형이는 외아들이여!”
“아……. 휴. 아버님 깜짝 놀랐잖아요.”
“자, 부장 양반! 해 떨어지기 전에 싸게싸게 시작해 볼텨?”
장소형의 아버지는 마성근 팀장을 보고 말했다.
마 팀장을 부장으로 생각했던 것인가?
하긴 그럴 수 있다.
내가 마 팀장을 힐끔 보자, 옆에 있던 장소형이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하이고 기여? 하도 젊어서 몰랐구먼. 우리 소형이랑 나이가 비슷할 것 같은디…….”
“아닙니다. 뭐든 어떻습니까? 뭐부터 하면 될까요?”
장소형 아버지의 앞으로 직원들이 둥그렇게 모였다.
그는 낮게 걸린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직원들을 둘러봤다.
“사과를 엄지랑 검지로 잡고 위로 돌려부러! 꼭지에 찔리면 사과가 상허니까 조심혀서 살살하시고. 알았쥬?”
우린 세 명씩 조를 짜서 노란 바구니에 사과를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사과를 담은 바구니들을 창고로 옮겼다.
늦은 밤.
우리는 과수원에서 떨어진 캠핑장으로 갔다.
워크숍의 꽃은 역시 고기.
여기저기 고기를 굽는 연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하는 중.
“부장님! 부장님!”
이진성 팀장과 장소형이 허겁지겁 내 앞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 있어요?”
“하아……. 하아……. 사과가……. 아까 딴 사과들을 다…….”
“다 뭐요?”
“도둑맞았습니다. 분명 창고 문을 잠그고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