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77
77. 삼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
강남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삼겹살집.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싸구려 원형 테이블.
오래된 휴대용 버너와 여기저기 그을린 흔적이 많은 앞접시까지.
현대인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곳이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는 계량도 하지 않은 고기를 대충 한주먹 담아서 줬고, 이진성 팀장이 그렇게 칭찬하던 수제 고추냉이는 다 떨어졌다는 말만 했다.
이진성 팀장은 미안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구웠다.
최충연 팀장은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미안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부장님. 죄송했습니다.”
“뭐가요?”
“미리 말씀 안 드리고 고동수 부장을 만난 거요.”
“그 얘기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적도 아니고 같은 회사 사람인데 뭐가 어때서요?”
“그래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잘하셨어요.”
내가 손을 휘휘 젓자, 최충연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뻔하겠죠. 뭐.”
“네?”
“두 분 다 차장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했겠죠.”
내 무심한 듯한 말에, 둘은 서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먼저 실토를 한 것은 이진성 팀장이었다.
“맞습니다.”
그러자 최충연 팀장은 이진성 팀장을 바라보며 허탈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너도? 근데 너 나한테는 말 안 하고 부장한테만 말해 그걸?”
“미안해요.”
“우린 체인에서부터 함께 했잖아! 이진성, 이거 너무 섭섭한데?”
“뭐 까놓고 말하면, 형도 저한테 말 안 했잖아요!”
“그건 뭐…….”
“그게 뭐요? 뭔데요?”
“난 나이가 있잖아. 집에 애들도 그렇고.”
“그게 뭔 상관인데요?”
핑계 없는 무덤이 있을까?
나는 둘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자자. 그 얘기는 그만들 하시고 이 팀장님이 자랑하는 삼합이나 먹어 봅시다.”
이진성 팀장은 머리를 긁적이고, 내려놓았던 집게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잘 구워진 고기 한 점과 전복, 관자를 내 앞접시에 올려놓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명이에 싸서, 삼합으로 드셔 보세요.”
나는 앞접시를 내려다보다, 입을 삐쭉 내밀었다.
“고추냉이가 없잖아요. 냉삼은 무조건 고추냉이 아닙니까? 직접 수제로 만든 거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하……. 그건 그렇지만. 명이 양념도 훌륭합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 셋이서 이런 초라한 삼겹살집에서 어휴.”
내 말에, 최충연 팀장은 허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저희에게 뭘 기대하신 겁니까?”
“수제 고추냉이면 됩니다.”
내가 계속해서 고추냉이를 말하자, 서빙을 하던 노파가 미안했나 보다.
그녀는 작은 접시에 고추장을 가득 담아서, 별다른 말 없이 테이블 위에 툭 던져놓고 갔다.
“고추냉이 대신 고추장이라는 건가?”
“여기 어머님이 좀 시크하십니다. 하하하.”
이진성 팀장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를 변호했다.
나는 조금의 기대도 없이.
명이에 삼합을 포개어 넣고 고추장을 찍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와…….”
알싸한 고추장과 새콤한 명이의 양념.
쫀득한 전복, 탱글한 관자, 그리고 얇고 야들한 냉동 삼겹살까지.
미쳐버릴 것 같은 맛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죽이죠?”
“이런 맛집이면 진작 좀 소개해 주시지.”
“아……. 저도 고 부장님이 처음 데려온 거라서요.”
“그래요? 고 부장님 생긴 거랑 다르게 미식가시네.”
나는 젓가락으로 고추장을 살짝 찍어 혀끝에 가져갔다.
“고추장 진짜 예술이네요.”
“그래요?”
이진성 팀장도 고추장은 처음이었는지, 숟가락으로 퍼서 맛을 봤다. 그리고 작은 뭔가를 앞니로 잘게 씹어댔다.
“고추냉이네요.”
“네?”
“고추장에 부장님이 그렇게 찾으시던 고추냉이가 들어가 있네요.”
“그래요?”
나는 이진성 팀장처럼, 숟가락으로 고추장을 살짝 떠먹었다. 그러자 그 안에 잘게 썰린 고추냉이 줄기의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고추냉이네요.”
“네. 이거 신선한데요? 밥 비벼 먹어도 딱 맞겠어요.”
급하게 맛을 본 최충연 팀장은 손을 들어 할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며, 공깃밥 하나와 달걀프라이를 좀 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별다른 대꾸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달걀프라이와 뜨거운 공깃밥을 가져왔다.
최충연 팀장은 후다닥 공깃밥의 절반을 앞접시에 담고, 고추장과 달걀프라이를 넣어서 비볐다. 그리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새빨간 밥알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먼저 드셔 보세요.”
최충연 팀장이 한 숟가락 떠서 내 앞접시에 덜어 줬다.
나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혀의 끝에 대고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역시, 기대했던 것처럼 고추장은 밥에도 잘 어울렸다.
“이 팀장님이 한 건 하셨네요.”
“뭘요?”
“사장님 설득해서 여기 고추장 제조해야죠. 이런 맛을 우리만 느낄 수는 없잖아요.”
이 고깃집의 고추장은 MD의 직감으로 돈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다.
내 말에, 이진성 팀장은 다소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부장님.”
“네?”
“고 부장님은 여기 명이 절임을 팔아보자는 제안을 했대요. 한 달은 매달렸다고 하던데…….”
“아 그래요?”
고동수 부장이 실패했으니, 나도 실패할 거라는 생각인가?
사람은 조건이 아닌, 마음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나는 피식 웃고, 잔에 담긴 소주를 들이켰다.
“그래서 저도 안 될 거라는 말인가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 사장님이 워낙 까칠한 분이셔서요. 고 부장님은 1년 동안 수수료 없이 판매하겠다는 조건도 던졌다던데…….”
나는 이진성 팀장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저는 포기 못 하겠네요.”
말을 마치고, 오른손으로 접시와 테이블, 의자 등등.
이 가게 사장의 손길이 있을 만한 물건을 모두 쓸어 봤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이 집을 다녀간 손님들의 감탄하는 목소리뿐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여긴 사장님 혼자서 주방이랑 서빙을 다 하시는 거예요?”
“네?”
“저기 저 할머니요.”
“아니요. 할머니는 사장님 어머니세요. 여기 사장님은 주방에 계세요.”
“그래요?”
이건 예상도 못 했다.
나는 일단 부딪쳐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빈 접시를 하나 들고, 주방에서 음식을 내주는 작은 구멍에 고개를 집어넣었다.
“명이 좀 더 주시겠어요?”
그러자 물에 퉁퉁 부은 두툼한 손이 명이 무침이 담긴 접시 하나를 툭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저 사장님!”
“안 해요.”
차갑고 냉정한 40대 정도의 여자 목소리.
고동수 부장이 여러 번 제안해서 그런지, 그녀는 내 말도 단칼에 끊어 냈다.
나는 명이 나물이 담긴 접시를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기억이 들렸다.
맛있고 특별한 음식은 누구나 알아본다.
그리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프랜차이즈를 하자거나, 제품을 생산하자는 등의 사기꾼들을 자주 접한다. 대놓고 우리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확률이 높다.
나는 속으로 환호를 외치고.
어떻게 해야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저 사장님.”
“왜요?”
“예전에 장사 크게 하셨죠?”
“그건 왜요?”
“이렇게 맛이 좋은데, 겨우 테이블 세 개짜리 가게에서 장사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게 뭐 어떻다고요?”
역시 까칠하다.
나는 고개를 주방으로 통하는 구멍으로 억지로 집어넣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숱이 다소 없는 생머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그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퉁퉁 분 손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를 가늠케 했다.
“손님도 없잖아요.”
“근데 뭐요? 블로그나 인스타 하라고요?”
광고쟁이로 아는 건가?
블로그와 인스타도 알고, 참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 봤나 보다.
“아뇨. 그런 건 저도 잘 몰라요.”
나는 씩 웃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이진성 팀장이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를 내 앞접시에 올려 줬다.
“가능하겠어요?”
“휴일 빼고 삼 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
“삼 일이요?”
이진성 팀장은 눈을 껌뻑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왜요?”
“고 부장님은 여기 한 달 내내 출근하셨어요.”
“음……. 저는 그분과 다르게 신뢰를 부르는 얼굴이잖아요.”
나는 턱밑으로 엄지와 검지를 붙여 브이를 그리고,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부장님 좀 생겼다 이겁니까? 하긴. 영업은 얼굴이 반이지 뭐.”
“최 팀장님도 호남……. 형입니다.”
“그건 호남에 사는 형이라는 소리입니까?”
“헛. 개콘 보세요?”
“왜요? 그거 종영했습니다.”
“마 팀장님 취향의 개그를 치셔서.”
최충연 팀장은 머쓱한 미소를 짓고, 자신의 잔에 담긴 소주를 마셨다.
* * *
우린 삼겹살 12인분을 먹고 나왔다.
배가 불러도 계속 들어가는 삼겹살 삼합과 고추냉이가 들어간 고추장의 매력에 푹 빠졌다. 취기가 올라온 최충연 팀장은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게 한잔 더 어떻습니까?”
“그만 들어가요.”
“부장님! 그러지 마시고 한잔하고 노래도 시원하게 찌그리고 갑시다!”
“팀장님. 집에서 형수님 기다리십니다.”
“기다리긴 뭘요! 늦게 들어와 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애들 선물은요?”
“그건 산타가 할 일입니다.”
나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0시.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이진성 팀장이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신천 쪽에 가면, 제 단골 오뎅바 있습니다. 부산 어묵만 가져다 쓰는데, 식감이 그냥 예술입니다!”
그때, 내 상의 주머니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김지영 이사의 전화임을 확인하고, 재빨리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두 분이 가세요. 아까 오해도 좀 풀고.”
“부장님! 자꾸 이러실 겁니까?”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요!”
“이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입니까? 연애하세요?”
나는 툴툴대는 최충연 팀장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어쩌면요.”
“헛. 진짜요?”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말하는 최충연 팀장.
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이진성 팀장에게 잘 데려가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둘을 보내고.
사람들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김지영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이사님.”
– 퇴근했지?
“네. 퇴근하고 근처에서 팀장들이랑 소주 한잔했어요.”
– 많이 마셨어?
“아뇨 적당히요.”
– 혹시 말이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나는 그녀가 머뭇거리지 않도록 먼저 말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세요?”
– 응?
아닌가?
그녀의 되묻는 목소리에 재빨리 다른 말을 했다.
“퇴근하셨어요?”
– 아니. 아직 일이 좀 남아서.
“크리스마스인데 약속도 없으세요?”
– 내가 무슨 약속이 있겠어.
“근데 무슨 일이세요?”
– 혹시 지훈아. 우리 오빠 따로 만난 적 있어?
BO푸드의 김지욱 상무.
그는 임원 회의 때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니요. 없습니다.”
– 그래. 알았어.
“그게 전부예요?”
– 응.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월요일에 보자.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왜 김지욱 상무를 묻는 것일까?
더 묻고 싶었지만, 급하게 전화를 끊는 그녀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