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78
78. 30년 가까이 살면서 많은 사람을 봐 왔다
크리스마스와 연이은 주말 연휴가 지났다.
회사로 돌아온 우리는 올해 마지막 남은 4일을 분주하게 준비했다.
오전 10시.
“부장님. 오늘부터 고추장 섭외 들어가시는 겁니까?”
이진성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네.”
“힘드실 텐데……. 아시겠지만, 거기 사장님 아주 까칠해요.”
“까칠해도 사람인데요. 뭐.”
“어떻게 하시려고요?”
“글쎄요. 가서 작전을 세워야죠.”
“하……. 역시 우리 부장님 자신감 하나는 만렙이시네.”
나는 그에게 씩 웃어 보이고, 곧바로 냉동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
커다란 자물쇠로 잠긴 낡은 미닫이 유리문 앞으로 걸어갔다. 오른손으로 자물쇠를 만지자,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사 빌딩들이 가득한 골목.
주말에는 유동 인구가 적어서 매출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민이는 아들인가?
사장의 나이는 대충 40대 중반.
아들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일 것 같은데…….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많은 생각을 하며, 벽에 등을 기대섰다.
잠시 후, 자신의 가게로 걸어오는 사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장님!”
내가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물쇠를 열었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한쪽 벽에 기댔다.
어제 대청소를 했는지.
가게 안의 등받이가 없는 작은 원형 의자들이 한쪽에 쌓여 있었고, 원형 테이블 하나에 휴대용 버너와 수저통들이 모여 있었다.
사장은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 천천히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 조용함을 참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사장님. 언제부터 장사하세요?”
“11시요.”
사장의 말을 듣고,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30분.
혼자 준비하기에는 빠듯해 보였다.
나는 팔을 걷고, 포개져 있는 의자들을 테이블 앞에 하나씩 정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정리하는 것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식자재를 배달하는 1톤 트럭이 가게 앞에 멈춰 섰고.
홀에 있던 내가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다.
60대로 보이는 남자는 짐칸에 실린 식재료들을 내리며 내게 물었다.
“미국에서 변호사 한다는 동생?”
“네?”
“훤칠하네. 여기 사장님이 입이 닳도록 동생분 자랑한 거 알아요?”
“에이. 누나보다는 제가 더 잘생겼죠.”
내가 동생인 척 답하자, 남자는 신이 나서 더 떠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누나 시집 좀 가라고 좀 해요.”
“아……. 네.”
“시집을 안 가니까 히스테리가 심하지. 잘 나가는 동생이 중매라도 좀 서보던가.”
“그래야겠네요.”
어느새 뒤로 다가온 사장이 미간을 구겼다.
“얼마예요?”
남자는 머쓱한 웃음을 짓고, 조끼 주머니에 있는 간이 영수증을 내밀었다.
“7만 2천 원. 사장님 내가 이거 명이 얼마나 힘들게 구했는지 알아요?”
“…….”
“그거 정말 귀한 명이야.”
사장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상자 안의 채소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이거 하루 지난 거죠? 명이 줄기가 시들하잖아요?”
“내가 귀신을 속이지. 그럼 2천 원 빼고 7만 원만 가져가요.”
“됐어요. 그냥 7만 2천 원 받아 가요.”
사장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상외다.
보통은 천원이라도 깎으려 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휴, 저렇게 자존심만 부리면서, 어떻게 장사를 한다고.”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의 옆으로 바짝 붙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물었다.
“여기에 식자재 납품한 지 오래되셨어요?”
“한 석 달 됐어요.”
“그렇구나.”
“누나가 일산에 박가 찌개를 했다고 하던데, 맞아요?”
이 남자는 나를 사장의 동생으로 안다.
장난이었지만, 사장도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아. 네네.”
“근데 어쩌다 쯧쯧.”
남자는 혀를 차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가게 안을 둘러봤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돈을 남자에게 전해 주고, 그가 내린 물건들을 가게 안으로 들고 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신경을 안 쓰던 사장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내려놔요. 찌개 끓였으니까 밥 먹고 가고.”
“무슨 찌개요?”
내가 물었지만, 사장은 역시 답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박가 찌개를 검색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사장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방송을 많이 탄 찌개 전문점.
차가운 말투와 인상이 화제가 됐었다.
블로그와 SNS에도 찌개와 반찬들이 맛있다는 글이 넘쳐나고, 프랜차이즈까지 시작했다. 그리고 가맹점 한 군데에서 사고가 터져서 사회적인 문제가 됐다.
이게 1년 전까지의 인터넷에 나오는 내용.
다음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그녀의 까칠한 성격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통성명이라도 하죠. 저는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 부장입니다.”
“…….”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었다.
“마켓 프레시 아시죠?”
“…….”
“우리 요새 잘나가는데, PB도 잘 팔리고.”
“…….”
“오늘도 고추장 주실 거죠? 그리고 고추장에 고추냉이 썰어 넣으셨죠?”
“…….”
“고추냉이 줄기가 너무 거칠던데. 좀 더 삶거나, 아예 믹서로 갈아서 넣는 건 어떨까요?”
“그럼 고추장이 묽어져요.”
내 질문들에, 드디어 그녀가 반응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혹시 집에서 요리해요?”
“그야…….”
“그냥 사 드시나 보네요.”
정확히 맞췄다.
우리 집 냉장고 안에는 언제나 편의점 도시락이 쌓여 있고.
냉장고 문 앞에는 배달 쿠폰들이 정신없이 붙어 있다.
식기를 씻던 사장은 손을 수건에 대충 닦고, 팔팔 끓는 찌개를 들고 왔다. 그리고 공깃밥과 반찬 몇 가지를 덜어 주며 말을 이었다.
“음식은 이렇게 조리를 해서 먹는 겁니다.”
“혼자 사는 저 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편의점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으로. 한 끼 대충 때우는 거죠.”
“아니! 혼자 살수록 더 챙겨 먹어야죠!”
“저도 뭐, 그러고 싶긴 한데…….”
말끝을 흐린 나는 숟가락을 들고,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은 안 드세요?”
“…….”
대답이 없는 그녀를 무시하고,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먹었다.
고기를 썰어 넣은 걸쭉하게 끓인 고추장찌개.
고추냉이가 들어간 고추장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단맛 대신 알싸함이 더했다.
공깃밥의 뚜껑을 벗기자, 그녀의 생각이 들려왔다.
자물쇠와 집기들에서 들리는 생각은 정민이에 대한 걱정뿐이다.
동생인가?
조금 전 식자재를 배달한 남자가 말한 동생?
그리고 공부라…….
식자재를 배달한 남자는 동생을 변호사라고 알고 있었다.
근데 미술이라…….
설마, 자랑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것인가?
자존심이 강한 사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동생 하나만 보고 장사를 하는 누나.
프랜차이즈로 사업을 키우려다가 하지 못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는 대충 시나리오를 쓰고, 앞으로의 작전을 준비했다.
“캬아. 찌개 죽이네요. 이거 메뉴에도 있어요?”
“…….”
벽에 걸린 메뉴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이거 메뉴에 넣어도 잘 팔리겠는데요? 아니, 아예 레토르트를 만드는 건 어때요?”
“…….”
“사장님은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하세요? 나이도 젊으신데.”
“…….”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혼자 떠들었다.
“내일도 이거 먹으러 올게요. 끓여 주실 수 있죠?”
“오지 마세요. 안 합니다.”
내일 또 온다는 말에 드디어 그녀가 반응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고추장찌개 먹으러 오는 겁니다.”
“그럼 11시 이후에 오세요.”
“오랜만에 건강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아주 좋네요. 아까 배달온 재료 보니까 당귀, 황귀, 대추 등 많이 들어가던데, 다 고추장에 넣는 거죠?”
“…….”
“너트메그도 봤는데, 그럼 소금은 줄이시겠네요?”
“…….”
“사장님은 참 음식에 자부심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사장님 생각에는 인스턴트 음식들이 다 방부제 덩어리 같죠?”
“…….”
“그건 다 옛날얘기입니다. 미국에서 변호사 하시는 동생분도 조리가 간편한 레토르트라면 직접 끓여 먹을 겁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사장.
나는 찌개에 아예 밥을 말아 먹으며 씩 웃어 보였다.
“아까 식자재 배달하던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
“너트메그라니, 사장님이 음식에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는 알 것 같네요. 근데 요즘 나오는 인스턴트들도 꽤 훌륭해요. 미국에 계신 동생분이나 저도 그런 음식들 먹고 살아가는 거고요.”
“…….”
“프랜차이즈 하셨던 것도 기사로 봤습니다.”
“…….”
“가맹점이 실수한 건데, 그렇게 많이 배상하고……. 그건 자부심인가요? 자존심인가요?”
“…….”
“아무래도 자존심이겠죠. 내 브랜드, 내 음식, 내 가족에 대한 자존심.”
내 말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래서 가맹이 아닌, 직영만 가자고 했던 겁니다!”
이제 반응을 좀 하는구나.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럼 이번엔 직영만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짓을 또 하자는 겁니까? 나는 사람을 안 믿습니다.”
“아니요. 저희는 사장님의 음식을 팔고 싶습니다. 저나 동생분같이 맛있고 건강한 음식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고추장 먼저 시작해 보죠.”
“…….”
“PB가 아닌, 사장님의 브랜드를 만드시라고 제안하는 겁니다.”
“…….”
“공장은 저희가 섭외하겠습니다. 나와서 직접 그 손으로 만드세요. 우린 사장님이 제품에 만족하기 전에 많은 수량을 찍어 내지 않겠습니다.”
사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는 내 제안이 먹혔다는 증거다.
이제 마지막 쐐기를 박아주면, 내일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 계약서를 들고 오겠습니다. 계약금 부분은 비워둘 테니 원하시는 금액을 생각해 두세요.”
“계약금이요?”
“네. 당연히 계약인데 계약금이 들어가야죠. 우리가 사기꾼도 아니고.”
“…….”
나는 30년 가까이 살면서 많은 사람의 기억을 들었다.
속에 있는 말들을 들을 수 있기에, 몇 가지 심증이 있으면 그 사람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퉁퉁 분 손과 얼굴에 가득한 주름.
깎아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가맹점의 실수를 배상하면서 사업을 접어 버리는 성격.
그녀는 음식, 가족, 브랜드 등에 심하게 자존심이 강하다.
남한테 맡기는 것은 싫고,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돈과 자존심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면?
나는 지금 그 카드를 꺼내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답을 줄 때까지 찾아올 겁니다.”
“저기…….”
“네?”
“새……. 생각해 볼게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네. 그럼 언제든 편할 때 답을 주세요.”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남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사장은 옆으로 다가와 찌개가 담긴 뚝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 식었는데, 다시 끓여 줘요?”
“그럼 저야 고맙죠. 밥이랑 달걀프라이에 고추장까지 주시면 정말 소원이 없겠네요.”
사장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뚝배기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