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80
80. 회계는 경영의 언어야
나와 김지욱 상무는 20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눴다.
그는 빙빙 돌려 말을 하면서도.
때로는 칼같이 매서운 말들을 쏟아 냈다.
“정근영 전무, 아니 대표가 얼마나 대표이사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젊은 IT 회사에서 그가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글쎄요.”
“아시겠지만, 푸드와 커머스의 구조는 완전히 다릅니다. 젊고 도전적인 이미지를 갖춰야 하는 IT 회사에서 물류와 유통의 경험이 많은 정근영 대표를 언제까지 인정해 줄까요? 상장하고 나면 3년을 버티기 힘들 겁니다.”
“…….”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말이 맞다.
커머스가 상장을 하게 되면 주주들의 입김이 세지고 정근영 대표를 곱게 보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철부지 정진택이까지 데리고 간 건데, 잘 가르치겠다던 최구열 이사는 무시하지, 진택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대표님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근데 대표님 앞에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난 겁니다.”
“구세주요?”
“원지훈 부장님. 바로 당신이요. 당신이 진택이를 챙겨 주면서 아들이 달라졌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진택 팀장은 능력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얼마 전에 아버지와 나, 그리고 지영이와 정근영 대표가 커머스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근영 대표가 퇴임한 다음을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
“아버지는 최구열 이사를, 지영이와 정근영 대표는 전문 경영인을 원하더군요.”
전문 경영인?
이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당연히 그녀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김지욱 상무는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창가의 앞에 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겠다고 한 겁니다.”
“…….”
“원지훈 부장님도 저를 도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지욱 상무는 주변을 천천히 걷다가, 다시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는 테이블 위의 머그잔을 바라봤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그려진 컵 받침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상무님.”
“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테이블 위의 머그잔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컵 받침의 중앙으로 가져다 놓으며, 그의 기억을 들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그잔에서 들려온 기억.
그것은 바로 정근영 대표와 김지영 이사가 경영인으로 생각한다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었다. 내가 얼음처럼 멈춰 서 있자, 김지욱 상무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며 물었다.
“뭐 하세요?”
“아……. 이게 빗겨나 있어서요. 제가 이런 건 좀 못 보는 성격이라. 하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원지훈 부장님이 내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난 많은 것을 약속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네. 그야 그러시겠죠.”
“잘 생각해 보고 답을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와의 긴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서서 가만 생각을 정리했다.
정근영 대표의 지분은 21%.
거기에 나와 김재열 사외이사의 5%, 김지영 이사의 7%를 합치면 12%가 된다.
모두 합쳐서 33%.
51%를 위해서는 최소 18%를 더 확보해야 한다.
이정우 이사와 장상익 사외이사의 11%는 이미 김지욱 전무에게 갔다.
그럼 남은 것은 최구열 이사 아니면, 김상만 회장의 지분이 필요하다.
어렵다 어려워.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
언젠간 김지영 이사와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그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나는 씩 웃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 * *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
나중에 알았지만, 회계를 담당하는 그녀는 전년도 회계 IR 자료를 위해서 거의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방에 있던 소파는 한쪽에 세워져 있었고, 커다란 테이블에 회계팀 직원 다섯이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손비는 제대로 계산했어? 공급가액이랑 재고 비용 다 계산해 넣어야지!”
“예. 알겠습니다.”
“가산금을 왜 매출에 포함해, 처음부터 지출에서 빼서 계산해!”
내가 들어왔지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커피 여섯 잔을 사 들고 다시 그녀의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노트북 옆에 하나씩 내려놓으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원 부장. 언제 왔어?
마지막으로 김지영 이사의 옆에 커피를 내려놓자.
그녀는 그제야 나를 보고 밝게 웃어 보였다.
“바쁘시죠?”
“응. 조금.”
“크리스마스 때도 이거 하느라 회사에 계셨던 거였어요?”
“응. 이제는 익숙해.”
“그랬군요. 잠깐 바람 좀 쐬러 가실래요?”
“그래.”
김지영 이사는 회계팀장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나를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상무님 만났습니다.”
“그랬구나.”
별로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별로 안 놀라시네요?”
“오빠가 뭐라고 해?”
“많은 걸 해 줄 수 있다면서, 잘 생각해 보라네요.”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눈을 초롱이며, 나를 보는 김지영 이사.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겨우 1% 들고 있는 놈이 너무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아서요. 생각 안 하려고요.”
“그래. 참 너답다. 일밖에는 모르지.”
“그래요?”
“그래. 넌 참 신기한 애야. 무심한 듯한데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어. 그래서 MD 사업부의 직원들이 다 너를 따르는 거잖아.”
“저도 뭐 인정은 합니다. 하하.”
내가 장난처럼 말을 하자,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지훈아.”
“네?”
“난 말이지. 네가 좀 더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욕심이요?”
“응. MD 사업부에 합류할 고동수 부장 일도 그렇고 말이야.”
난 다른 누구와도 내 계획을 나눈 적이 없다.
혼자 살아왔고, 혼자 모든 일을 해결했기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왔다.
나는 씩 웃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쁘신데 시간을 오래 뺏은 거 같네요.”
“그래. 다음 주에 한 번 들러. IR 자료 완성되면 보여 줄게.”
“저한테요?”
“회계는 경영의 언어야. 회계를 알아야 경영을 할 수 있는 거야.”
“네. 노트 챙겨서 공부하러 올라가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고 등을 돌렸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서 TV만 봤다.
각종 시상식 방송을 멍한 표정으로 보다가 하품을 길게 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9시 40분.
이제 두 시간이 지나면, 이제는 서른이 된다.
나는 씩 웃고, 소파에 있던 쿠션을 끌어안으며 누웠다.
시계의 초침이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왠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사님, 끝났어요?”
– 응. 지금 나가는 중이야.
김지영 이사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 왜 무슨 일 있어?
“누나.”
내가 누나라고 부르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 너 부탁할 거 있구나.
“역시. 잘 아시네. 누나 시간 되면, 나랑 같이 어디 좀 갈래요?”
– 어디?
“1월 1일에 새로운 해가 뜨는 걸 보고 싶어요.”
– 해돋이?
“네.”
– 뭐 이렇게 감성적이야. 이제 서른이다 이건가?
“그런가 봐요.”
김지영 이사가 휴대전화를 가리고, 킥킥대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 해돋이는 어디 가서 보려고?
“그래도 제대로 보려면 강원도까지는 가야 하지 않을까요?”
– 강원도? 이 시간에?
“네.”
그녀는 다시 또 머뭇거렸다.
그리고 결심을 했는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 대신 내 차로 가자.
“왜요?”
– 번갈아 운전해야지. 아직 남의 차 운전할 정도는 안 돼.
“네 그래요.”
– 나 집에 들러서 간단하게 준비해서 너희 집 앞으로 갈게. 10시 30분까지 나와.
“알겠습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가방에 간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옷장에서 작은 담요와 점퍼를 꺼내서 내놓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새벽에 추울 텐데…….
털모자랑 장갑도 챙겨야겠구나.
그럼 마스크도 두 장 챙기고.
아 참, 핫팩도 여러 개 가져가야겠다.
그리고 차 막히면 마실 커피도 미리 내려서 보온병에 넣고.
또 뭐가 있을까?
어느새 커다란 쇼핑백에 짐이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오후 10시 20분.
나는 10분 전부터 내려가 그녀의 차가 오길 기다렸다.
차가 도착하고.
김지영 이사는 내 옆에 있는 커다란 짐들을 보고, 킥킥대며 물었다.
“어디 피난 가?”
“다 가면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래. 일단 시내는 내가 운전할게. 이따 막히면 네가 운전해.”
“예압!”
나는 뒷좌석에 준비한 짐들을 하나둘 싣고, 조수석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
“가시죠. 차 많이 막힌다던데. 이따 졸리면 말해요.”
“그래. 너도 눈 좀 붙여.”
우린 그렇게 갑작스럽게 강릉으로 떠났다.
가는 동안 많은 대화를 했다.
회사 얘기는 빼고, 연예인, 드라마, 먹거리 등등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이어졌다.
“미우새 봤어요?”
“좀 심하더라. 걔는 뭐 그렇게 운동만 해? 그러면서 언제 연애를 한다고.”
“그게 다 개인 만족이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건데.”
“결혼은 해야지. 어머니 걱정하시잖아.”
“참 나, 그럼 누나는요?”
실수다.
결혼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김지영 이사는 기분이 좋지 못했는지 커피를 마시며, 말을 끊어 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고자 화제를 바꿨다.
“힘들죠? 갓길에 차 좀 세워요.”
“아니야. 아직 할 만해.”
“거짓말. 아까 눈 스르르 감기는 거 내가 봤거든?”
“응?”
순간, 너무 편해서 그런지.
말이 좀 짧아졌다.
고등학교 때도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반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너 지금 나한테 말 놓은 거야?”
“실수입니다.”
“아니?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성이 다분해.”
“그러지 말고 세워요. 누나는 지금까지 일하느라 좀 힘들었잖아요.”
“그래. 알았다.”
차는 졸음 쉼터로 들어갔다.
김지영 이사는 차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크게 키고, 허리를 좌우로 돌렸다.
“힘들죠?”
나는 그녀의 뒤로 가서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자연스럽게 어깨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아 좋다. 거기, 응 거기 좀 더 세게 해 봐.”
“여기요?”
“응. 거기.”
배시시 웃는 김지영 이사.
가로등의 빛에 비친 그녀의 미소가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니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에 서서 가녀린 허리 사이로 양팔을 집어넣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야!”
장난을 치는 것으로 생각한 김지영 이사.
하지만 내가 손에 깍지를 끼고 몸을 바짝 붙이자,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녀는 뒤에서 깍지를 낀 내 손을 떼어 내려 하지 않고, 몸을 내게로 기댔다.
“고마워.”
“뭐가?”
“같이 가줘서.”
짧아진 내 말에.
그녀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