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84
84. 어이구 인제야?
“이사님!”
1층 로비로 내려와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래, 알아는 봤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죠. 근데, 아무리 봐도 에스로직은 구글이랑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아요.”
– 꼴랑 인터넷 검색으로 뭘 안다고. 사람은 직접 부대끼고 비벼봐야 아는 거야.
“그래도 뭐 하나라도 흘린 게 있어야 하는데 너무 깔끔해요.”
– 그냥 나만 믿으라니까!
“이사님, 에스로직 마케팅 담당자 아세요?”
– 거기 대표만 알고, 직원들은 한 명도 몰라. 근데 왜?
“구글이 붙일 정도로 좋다면, 저희 마켓 프레시에도 붙여야죠.”
– 근데?
“마케팅 담당자 좀 소개해 달라고요.”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에스로직이 구글과 연관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간편 결제가 아닌, 다른 사업 때문일 수도 있기에 최종 확인이 필요하다.
– 짜식 귀찮게시리. 어딘데?
“가산 쪽에 외근 나왔어요.”
– 가산? 에스로직이 거기 근처인데?
“그야 당연히 알죠. 그래서 나온 김에 보고 가려고요.”
– 음……. 그럼 거기 잠깐만 있어 봐. 통화하고 알려 줄게.
“예.”
전화를 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파트형 공장의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재활용 쓰레기가 나오는 이곳은 많은 기억이 담긴 곳으로, 내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팔을 걷었다. 그리고 종이가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 커다란 검은색 봉투의 묶인 부분을 뜯어냈다.
파쇄된 종이들이 가득한 봉지 안.
손을 넣어서 잘린 종이들을 천천히 만졌다.
에스로직의 재활용 쓰레기가 얻어걸리길 바라며.
아니다. 그냥 평범한 마케팅 회사다.
나는 다른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파쇄한 종이들을 만졌다.
그렇게 네 번째 봉투를 열었을 때.
에스로직에서 파쇄한 종이 뭉치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검은 봉지 안에 오른손을 깊숙이 넣고, 손을 뒤적였다.
그리고 듣고 싶던 기억을 들을 수 있었다.
대충 감이 왔다.
임원들이 자사주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도 상장할 때쯤에는 저렇게 될까?
미래의 실적을 비밀로 하고, 자사주 확보에 혈안이 될까?
회사의 이익보다, 개인의 단기간 이익을 위해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휴대전화의 진동 울리고, 나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예. 이사님.”
– 아직 가산이지?
“네.”
– 30분만 기다려. 금방 가니까.
“알겠습니다.”
– 나는 대표랑 스크린 치기로 했고 너는 담당자 소개해 줄 테니까, 잘 얘기해 봐.
전화를 끊고.
최대한 많은 기억을 듣기 위해서 파쇄한 종이들을 다시 만졌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김재열 사외이사와 함께 에스로직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머리가 벗겨진 에스로직의 대표이사는 김재열 사외이사와 꽤 친해 보였다. 둘은 얼싸안으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김재열 사외이사는 최고의 친화력을 가진 로비의 달인이다.
세 번 이상 만나면 무조건 형 동생 사이로 만들어 버린다.
“하하하, 재열이 왔어? 요즘 어때?”
“죽을 맛입니다. 오로지 에스로직의 상장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준비는 다 했지?”
에스로직의 대표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러자 김재열 사외이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덕분에 입에 풀칠은 하겠네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일 잘되면 크게 한턱내!”
“예. 예. 물론이죠. 아 참, 여긴 우리 마켓 프레시의 실세. 원지훈 부장입니다.”
김재열 사외이사가 나를 소개하자.
에스로직의 대표이사가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에스로직의 최병찬입니다.”
“예. 원지훈입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젊으신데요? 듣자 하니, 달빛 배송에 콜드 체인까지 다 부장님 작품이라고요?”
“아닙니다. 대표님 이번에 상장하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에이 축하는 뭘요. 하하하.”
최병찬 대표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상장 회사의 대표라는 자신감과 곧 있으면 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제 모듈 연동 관련해서 미팅하신다고요?”
“예.”
“그럼 저희 신 팀장 불러드리겠습니다. 미팅 잘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최병찬 대표는 손을 흔들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머릿속에 스크린 골프만 가득한 것처럼.
결제 모듈을 가진 회사들에 커머스의 관리자는 최고의 손님이다.
특히 마켓 프레시와 같은 대형 커머스에는 제발 좀 자신의 모듈을 붙여달라는 영업사원들이 줄을 선다.
심지어 어느 PG사에서는 이사가 직접 나온 적도 있었는데.
구글과의 계약이 진행 중이라 자신이 있는 걸까?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담당자들이 기다리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김도준입니다.”
“신민주입니다.”
신민주.
화장실 변기 커버에서 기억을 들었던 남자.
신 팀장이라고 했을 때, 혹시나 했는데…….
그의 실물은 사진과 많이 달랐다.
쭉 찢어진 눈에, 생각보다 작은 키, 좁은 어깨와 유난히도 작은 입.
나는 다시 한번 사진 보정 프로그램에 감탄하며,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앉으세요. 저희 솔루션 소개 자료는 보셨나요?”
김도준 과장은 적극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신민주 팀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네. 조금 보고 왔습니다.”
“그럼 제가 좀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김도준 과장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미리 출력한 소개서를 주고,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했다.
반면, 팀장의 직함을 단 신민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한참 동안 김도준 과장의 설명이 이어졌고.
나는 소개서 일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신민주 팀장에게 질문했다.
“팀장님. 사용하는 단말기가 변해도, 본인 인증 없이 결제시키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닙니까?”
내 질문에, 신민주 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정말 안심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사고 터지면 보증보험에서 다 보상이 나갈 텐데요. 뭐.”
자신의 시스템 보안이 아닌, 보증보험을 믿으라니.
저게 팀장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팀장님. 저희는 커머스입니다. 소액 결제가 아니라, 몇십에서 몇백짜리 결제가 터지는 곳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내가 입을 닫고 신민주 팀장을 바라보자.
그는 답답했는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안드로이드 폰에서는 구글 아이디로 본인 인증을 진행하고, 초기 인증값을 구글에서 다시 저희에게 보내 줍니다.”
“구글에서 개인 정보를 준다고요?”
“아니요. 개인 정보가 아니라, 인증 성공 여부만 넘어오는 겁니다.”
“믿을 수 없군요.”
“뭘요?”
“구글이 한국의 결제 대행사에 그런 정보를 보내 준다는 건 처음 듣습니다.”
내 도발에 신민주 팀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저희 그렇게 작은 회사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오래된 PG사들도 많은데 왜 구글이 굳이 에스로직에만 그런 특혜를 주는 건지를 묻는 겁니다.”
“에스로직은 다년간 SI를 해 온 업체로 기술력이 뛰어난 회사입니다.”
“하긴 SI회사들은 저희 같은 사람들이 잘 모르긴 하죠.”
실소를 머금은 내 표정을 보고.
신민주 팀장이 미간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곧 구글과 에스로직의 MOU가 성사될 겁니다.”
“MOU요?”
“네. 저희가 인증값을 받으면 국내의 다른 결제 대행사들에도 전송해 주면서 저희 모듈 일부를 국내 모든 PG에 분양할 계획입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민은 안드로이드 폰에서는 누구든 저희 모듈을 접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인증 키값에 대한 MOU가 전부인가요?”
“뭐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많습니다.”
이것저것 많다라…….
역시 긁어야 나오는구나.
나는 제안서에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팀장님.”
“네?”
“죄송한데, 볼펜 좀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눈치를 보던 김도준 과장이 벌떡 일어나 볼펜을 가지러 나가려 했다.
나는 한 손을 올려 그를 말리며 신민주 팀장을 바라봤다.
“팀장님, 지금 들고 계신 볼펜 좀 잠깐만 빌려주세요.”
내가 신민주 팀장을 지목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볼펜을 내게 밀어 줬다.
신민주 팀장의 기억.
그래도 이 정도면 90% 이상 확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품소개서에 ‘구글에서 키값 재전송’이라는 글씨를 적고 다시 볼펜을 돌려줬다.
“조만간 에스로직 상장하죠?”
“사실 좀 늦은 겁니다. 더 일찍 할 수도 있었습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저희 수수료율은 어떻게 주실 겁니까?”
“그건 회의를 하고 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커머스에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당연히 잘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나는 그들과의 미팅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김재열 사외이사의 말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주식 어플에서 현재 사놓은 주식들을 천천히 확인했다. 그리고 모두 예약 매도를 걸어 두고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미팅 잘했어?
“예 덕분에요. 아직 스크린이세요?”
– 아니. 형님이 전화 받고 급하게 나가서, 혼자 있어. 뭔데 말해 봐.
“이번에 에스로직 공모주 청약 들어가는 거요. 좀 많이 들어가도 될까요?”
– 오호 그래? 이제야 확신이 섰나 보지?
“네. 친구들까지 전부 모으면 40억 정도 될 것 같은데. 괜찮겠죠?”
김재열 이사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고,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40억?
“네. 힘들까요?”
– 그 큰돈을 어디서 구했어? 혹시 숨겨 둔 부자 친구라도 있는 거야?
“말했잖아요. 친구들 다 털었다고.”
– 이 자식이 돈독이 올랐네. 아주 돈독이 올랐어.
“이사님 말처럼 마켓 프레시 스톡옵션 준비해야죠.”
– 일단 대투에 주식 계좌 먼저 만들고, 딴 데 소문내지 마. 알았지? 경쟁률 올라가면 내가 너 먼저 죽이러 간다.
“알았어요. 알았어.”
– 이번에 꼭 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 마켓 프레시 상장 작업 들어갈 때, 손가락만 빨아야 하니까.
“고맙습니다.”
– 어이구 인제야?
김재열 사외이사는 보기와는 다르게, 속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내년에 있을 마켓 프레시 상장에 대비해서, 자신과 내가 뒤처지지 않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의 방식으로.
입가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고.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크게 돈을 불릴 기회를 얻어서 더욱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