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89
89. 욕심 한번 내 보는 건 어때요?
이른 아침 출근길.
김재열 사외이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블루투스의 통화 버튼을 누르자, 흥분한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에 쩌렁쩌렁 울렸다.
– 지훈아! 지훈아!
어제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많이 마셨나?
생각하던 것보다 전화가 늦었다.
나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왜 그러세요?”
– 우하하하! 어제 봤어?
어제는 에스로직의 상장일.
신규 공모의 경쟁률은 3.23대 1로 생각보다 낮았고.
나는 13억가량의 주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상장 일주일 전부터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구글과의 MOU 소식을 언론에 터트렸고, 한 주당 3천 원 정도로 형성될 것 같던 주가가 순식간에 2만 원까지 올랐다.
그렇게 상장을 하고 30분 만에 상한가를 쳤다.
주가는 2만 2천 700원.
내가 투자한 금액의 무려 7배 이상이 오른 것이다.
3~4배 정도 오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였다.
나는 실시간으로 주식이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지금 김재열 사외이사의 흥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았어요?”
– 장난해? 어제 종일 실검 1위였는데, 못 봤어?
“어제 쭉 외근이었어요.”
– 그럼 정말 몰랐다는 거야?
“네. 요새 많이 바빴거든요.”
– 그렇게 큰돈을 박아 놓고, 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제가 이사님을 그만큼 믿으니까요.”
김재열 사외이사는 내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곧바로 크게 웃었다.
– 하하하! 넌 진짜 나한테 큰절해야 한다.
“어휴 귀 따가워. 얼마나 올랐는데 그래요?”
– 내가 이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얼마나 올랐는데요?”
김재열 사외이사는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었는지.
계속해서 뜸을 들였다.
– 푸하하하! 넌 진짜 이 얘기 들으면 깜짝 놀랄 거다.
“자꾸 그러시면 전화 끊고 인터넷 봅니다.”
– 알았어. 알았다고. 진짜 놀라지 마! 그리고 석 달 후에는 무조건 뒤도 안 보고 빠지는 거다! 알았지?
에스로직의 보호 예수 기간은 3개월.
주가를 보호하기 위해 공모주를 구매한 사람은 3개월 동안 판매를 할 수 없다.
“네 알겠어요.”
– 진짜 놀라지 마!
“전화 끊겠습니다.”
– 아냐!
이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나 보다.
김재열 사외이사는 마른침을 삼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주당 2만 2천 700원. 공모가의 7배 이상 올랐어.
“와! 그래요?”
리액션이 어색했을까?
김재열 사외이사가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 알고 있었지?
“아뇨!”
– 나쁜 새끼. 형님 놀려먹으니까 좋냐? 막 신이 나고 그랬어?
“하하하, 눈치채셨어요?”
– 하여간 연기 드럽게 못해.
“제 연기가 어때서요?”
– 에이 나쁜 놈, 너 때문에 기분 팍 상했다.
“이따 점심 괜찮으세요? 시간 되시면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 그래. 안 그래도 이따 이사 회의 소집해서 가 봐야 해. 점심이나 같이 먹자.
“이사 회의요?”
– 응. 못 들었어?
이건 정말 처음 듣는 소식이다.
사외이사들까지 불러들이는 회의라면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할 것이 있다는 말인데…….
“안건이 뭔데요?”
– 그건 나도 몰라.
“흠……. 알겠습니다. 이따 봬요.”
– 그래.
나는 전화를 끊고, 차의 핸들을 틀어 갓길에서 빠져나왔다.
* * *
낮 12시.
이사 회의는 예상보다 길었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김재열 사외이사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1시가 넘자,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 점심 안 먹었지?
“네.”
– 내려와. 1층 로비니까.
“알겠습니다.”
로비로 내려가자.
어울리지 않는 롱코트에 머리를 포마드로 넘긴 김재열 이사가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나를 껴안기 위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 졸부님 오셨어?”
나는 허리를 비틀어 그를 피하고, 미간을 구겼다.
“부자, 갑부 같은 좋은 단어들 다 두고 졸부가 뭐예요?”
“90억짜리 주식을 가진 졸부. 나머지 돈도 다 합치면 100억이 넘네.”
“그거 친구 돈이라니까요!”
“거짓말. 내가 한두 번 속냐?”
김재열 사외이사는 그 돈이 전부 내 돈이라는 것을 대충 눈치챈 것 같았다.
“진짜예요.”
“에이……. 거짓말.”
“진짜라니까요.”
“그래 그건 됐고, 오늘 뭐 사 줄 거야? 최소 호텔 뷔페는 갈 거지?”
“호텔은 머니까, 이사님 좋아하시는 한정식집으로 가시죠.”
“겨우 그거로 땡치려고?”
“앞으로 한 달 동안 원하실 때 밥이랑 술 사겠습니다. 됐습니까?”
“오케이 콜. 너 딴말하기 없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김재열 사외이사.
뭔가 느낌이 쎄하다.
“회의 안건은 뭐였어요?”
“배고파서 말이 안 나와. 우리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네.”
우린 김명진 차장과 함께 갔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나를 알아본 사장이 좋은 방을 안내했고, 우린 둘이서 큰방에 마주하고 앉았다.
음식이 나오자, 김재열 사외이사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천히 좀 드세요.”
“배고프니까 그렇지. 너도 3시간 회의해 봐.”
하긴 회의가 길긴 길었다.
나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휴지로 입을 닦았다.
그러자 식사를 하던 김재열 사외이사가 나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한 달간 밥이랑 술 사겠다는 거 잊지 않았지?”
“네. 그럴게요.”
“오케이!”
“회의 안건이 뭐였어요?”
“나 앞으로 이쪽으로 출근해야 할 것 같다.”
“네?”
“쉽게 말해서, 한 달 내내 네가 밥과 술을 사야 할 거라는 말이지.”
그래서 한 달간 밥과 술을 사라고 했구나.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 동생 벗겨 먹으니까 좋습니까?”
“동생은 무슨, 100억의 자산을 가진 졸부지.”
“친구 돈이라니까요!”
“웃기지 마. 너 친구 없는 거 내가 다 아는데.”
“아니거든요. 엄청 많거든요.”
“에이. 그런 애가 맨날 일만 하냐?”
그나저나 왜 사외이사들을 출근시키는 걸까?
내가 가만 생각에 빠지자.
숟가락으로 국을 휘휘 젓던 김재열 사외이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무래도 서둘러야겠다.”
“뭘요?”
“커머스 상장 준비 들어갔어. 목표는 6개월 후. 얘기 들어 보니까 준비는 어느 정도 했나 보더라고.”
6개월 후면, BO커머스가 설립된 지 3년째 될 것이다.
문제는 영업이익.
하지만 내부의 사정을 아는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투자금이 많아 적자로 보이지만, 창고에 있는 재고를 털고 선금이 나간 금액들을 회수하면 충분히 흑자로 바꿀 수 있다.
“생각보다 빠르군요.”
“응. 대표님이 아주 급하더라고.”
“대표님이요?”
“뭘 그렇게 놀라?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에스로직 돈 받으면 바로 커머스에 넣을 수 있으니까.”
에스로직으로 돈을 부풀렸기에, 상장이 빠른 것은 우리에게도 좋다.
근데 왜 정근영 대표가 상장을 서두르는 것일까?
소문에는 상장 전에 대표이사가 교체될 것이라 들었는데…….
“이사님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
“상장 전에 대표이사를 교체할 거라는 소문이요.”
김재열 사외이사는 국을 떠먹으며, 건성으로 답했다.
“에이, 그런 거 다 헛소문이야.”
“흠……. 그런가요?”
김재열 사외이사가 헛소문이라 말했지만, 뭔가 께름칙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회의 내용에 관해 물었다.
“그럼 이사님은 출근해서 무슨 일 하시는 거예요?”
“우선은 이사 준비.”
“이사요?”
“응. 상장하려면 당연히 사옥 먼저 옮겨야지. 푸드랑 같은 건물 쭉 쓸 수는 없잖아.”
“그게 왜요?”
“내가 볼 때, 대표님은 최대한 푸드와 떨어지려고 하는 거 같아. 그래서 상장과 이사를 서두르는 것 같아.”
그건 아마 김상만 회장이 반대했을 텐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내 예상이 빗나가고 있다.
“회장님은요?”
“김상만 회장?”
“네.”
“그건 나도 모르지. 이미 얘기가 됐으니까, 나한테 이사를 준비하라고 하는 거겠지. 하여간 앞으로 한 달 내내 회의한다니까, 나중에 보면 알겠지.”
김재열 사외이사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오로지 곧 있으면 마켓 프레시가 상장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뭔가 이상하네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 *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김지영 이사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원 부장 식사 끝나면 내 방으로 와.
나는 외투를 걸어 두고,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지영 이사.
그녀의 표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김재열 사외이사와는 달랐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 아니야. 김재열 이사님이랑 식사했다고?”
“네.”
“그럼 얘기 들었겠네.”
“네. 대충 들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이건 비밀인데, 이사님에게도 절대 말하지 마. 이사 회의에서 나오기 전까지 말이야.”
김지영 이사는 앞에 놓인 다 식은 차를 천천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조만간 커머스의 대표이사가 교체될 거야.”
“네?”
“회장님의 뜻이고, 다른 이사들도 모두 동의했어.”
“누구로요? 그리고 대표님도 아세요?”
“응. 대표님도 동의하셨어.”
그녀는 누구로 교체될 거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혹시 커머스를 탐내던 김지욱 상무?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외부 인물인가?
나는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마시던 찻잔을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기억 일부만 들을 수 있는 이 능력은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는다.
언제나 토막의 기억으로 상황을 유추해야 한다.
지금 그녀의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물끄러미 김지영 이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몸을 돌렸다.
“최구열 이사가 대표이사직을 맡을 거야.”
“……!”
“이사 회의에서는 사회적 인지도가 가장 높아서 상장에 큰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어.”
“정근영 대표님이요?”
“그래.”
“왜요?”
“말했잖아. 사회적인 인지도가 높아서라고. 주주들의 기대감을 주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한 거야.”
마켓 프레시는 식품 전문 커머스.
당연히 미국에서 그룹폰 신화를 쓰고 온 최구열 이사가 대표를 하면 주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계획하던 일이 아니다.
정근영 대표가 최소 1년 이상 버텨줘야 하는데…….
“얼마나 남았죠?”
“두 달. 그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야.”
시간이 없다.
최구열 이사가 대표가 된다면, 당장 스톡옵션부터 줄일 것이다.
그는 충분한 자본금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몫을 최대한 늘리려 할 것이다.
그럼, 내 첫 번째 계획부터 어그러진다.
방법이 없을까?
가만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이사님.”
“응?”
“김지영 이사님은 어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새로운 대표이사요.”
“나?”
“네. 이번 기회에 욕심 한번 내 보는 건 어때요?”
“난 들고 있는 주식도 적고…….”
“회장님이 계시잖아요. 그리고 잘하면 정근영 대표님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김지영 이사의 표정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