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90
90.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 원 부장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김민정 팀장.
안경 뒤로 보이는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에 화장을 덧댄 티가 역력했다.
“커피 한잔할까요?”
이 말을 원했나 보다.
내 말에, 김민정 팀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대기 층의 사내카페.
김민정 팀장에게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커피를 받아 왔다.
가져온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김민정 팀장이 재빨리 머그잔을 양쪽으로 옮겼다.
“힘들죠?”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많이 힘드네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미국에서도 지금이랑 똑같았는데……. 아무래도 이전이 너무 좋아서 더 힘들게 느껴지나 봅니다.”
“이전이면.”
“원 부장님이랑 일할 때요.”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도무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김민정 팀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배넷에서 나온 치즈랑 요구르트 이벤트를 진행하려고 하는데요.”
“거기서 치즈랑 요구르트도 나와요?”
“네. 한 달 전에 출시했습니다.”
“반응은요?”
“저희 회원들 반응도 좋고, 다른 몰에서도 다 좋아요.”
“하긴, 배넷이라면 믿을 만하죠. 그래서요?”
“그쪽 BM이 특판으로 판매해 보고 싶어 합니다. 진행해도 될까요?”
이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걸까?
특판팀의 마성근 팀장에게 바로 얘기해도 되는데.
“그야 당연히 좋죠. 배넷 제품이라면 믿을 만하잖아요.”
“예. 그건 그렇죠.”
“마 팀장님한테는 얘기하셨어요?”
“아뇨. 이제 해야 합니다.”
“그냥 다이렉트로 얘기하시지 왜…….”
“원 부장님 지시여야 될 것 같아서요.”
“마 팀장님이 그래요?”
마성근 팀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특판 물건을 확보하면, 나에게 쪼르르 달려오는 사람이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김민정 팀장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 아니요. 고 부장님이요.”
“그럼, 고 부장님이 특판을 드랍시킨 겁니까?”
“예…….”
“왜요?”
“특판은 다른 사업부라면서…….”
다른 사업부의 실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너무 유치하고 치졸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팀장님. 지금 내려가시면 다른 팀장님들에게 전해 주세요. 언제든 진행해야 하는 특판이나 이벤트가 있으면 저한테 가져오시라고요.”
“그래도 될까요?”
“네. 그래도 됩니다.”
고 부장이 문제라면, 사업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김민정 팀장도 이를 알기에,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고 부장님이…….”
“왜요? 싸울까 봐서?”
김민정 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싸우지 뭐. 신경 쓰지 마요. 저는 이런 거 하는 사람이니까요.”
* * *
“원 부장님!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고동수 부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통화 중이던 나는 한 손을 들어, 기다리는 신호를 보냈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젓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 통화가 길어지자,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원 부장님!”
내가 다시 한 손을 올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특판팀에서 왜 우리 제품을 빼가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실적 올려서 좋아요?”
그는 내 신호를 무시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통화 중인 상대방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던 고동수 부장을 올려다봤다.
“통화 중인 거 안 보이십니까?”
“그게 뭐요? 지금 통화보다 이게 우선인 것 같은데요?”
“예의 좀 지킵시다. 예의.”
“뭐요?”
아예 강하게 나가려고 마음먹고 왔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동수 부장에게 회의실로 가자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내 팔을 밀쳐 내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자꾸 이런 식으로 우리 애들 실적 빼가려고 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우리 애들이라…….
그게 저 입에서 나올 말인가?
우리의 두 번째 큰 충돌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부서원들.
나는 부서원들을 둘러보고 다시 한번 고동수 부장에게 회의실로 가자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뭐요?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그냥 여기서 해요!”
쥐새끼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함무라비 법전의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타인의 기억을 듣는 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말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다.
“고 부장님.”
“왜요?”
“특판에서 판매된 실적은 그쪽 사업부에 포함하세요.”
“…….”
이렇게 쉽게 나올 줄 몰랐나 보다.
고동수 부장은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매출 많이 떨어졌던데, 이런 거라도 챙기셔야죠. 쥐새끼처럼 싹싹 다 긁어모으세요.”
“뭐요?”
“모으시라고요. 그래서 오신 거 아닙니까?”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고동수 부장은 나를 하대할 생각에 은근슬쩍 말을 놨다.
나이에 비해 직급이 높다 보니, 지금과 같은 일은 수도 없이 당해 왔다.
그리고 난 그때마다 똑같이 대해 준다.
“그럼 무슨 말인데?”
“뭐요?”
“그럼 무슨 말이냐고!”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반대로 약해지는 고동수 부장.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후……. 내 말은 왜 우리 애들 실적을 빼가느냐는 겁니다! 우리 쪽 카테고리 제품은 특판에 걸지 않았으면 합니다.”
꽤 힘든 싸움을 예상한 그는 곧바로 말을 높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쏟아지는 부서원들이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고 부장님.”
“왜요?”
“디지털 커머스 카테고리 매출이 왜 떨어지는지 아세요?”
“…….”
“모르시나 보네. 난 바로 보이는데.”
MD는 매출로 평가되는 직종이다.
내가 매출에 대해 말하자, 고동수 부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출되는 배너가 그쪽이 더 많으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아닌데요. 똑같이 반으로 나눴습니다.”
“그럼, 우리 팀장들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아닌데요. 얼마 전까지는 매출 잘 나오던 팀들입니다.”
“……그럼 이게 다 나 때문이라는 소립니까?”
“아……. 차마 그건 아니라고 못 하겠네요.”
내가 답을 하자.
“풋.”
“푸훕.”
가려운 곳을 긁어 줘서 시원했다 보다.
별로 재미도 없는데, 곳곳에서 참았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동수 부장이 속한 디지털 커머스 사업부에서도.
그리고.
“하하하하하.”
휴대전화를 가로로 들고 걸어가던, 김명진 차장이 크게 웃었다.
고동수 부장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소리쳤다.
“김 차장!”
“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뭐가요?”
“이게 웃겨? 웃기냐고!”
“전 이거…….”
김명진 차장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화면을 고동수 부장에게 보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개그콘서트 – Gag Concert 달인 20100214 – YouTube]“이거 보셨어요? 10년이 지난 콘텐츠인데 다시 봐도 재미있네요.”
“누……. 누가 근무 중에 그런 거 보래!”
“옥상에 올라가는 중입니다. 사람인데, 잠깐은 쉬어야죠.”
“크흠.”
불편한 표정의 고동수 부장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나에게 말했다.
“원 부장님. 분명 실적은 우리 쪽으로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네.”
“나중에 딴말하기 없습니다!”
“제가 언제 딴말하던가요. 마음대로 하세요. 쥐새끼처럼 싹싹 긁어서 가져가세요.”
나는 대충 답을 하고, 김명진 차장의 뒤를 따라갔다.
“명진 차장! 같이 가!”
* * *
늦은 저녁.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기지개를 크게 켜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가방을 정리해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응. 지금 끝났어.”
– 그래. 1층 주차장으로 와.
김지영 이사와 약속을 한 나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입구에 차를 세워 놓고 밖에서 기다리는 김지영 이사.
나는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뒤로 천천히 걸어가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왔어?”
그녀는 단번에 나인 줄 알고, 고개를 뒤로 기대며 말했다.
“놀라지도 않네?”
“아까 내려오는 거 봤어.”
“다음엔 좀 더 철저히 해야겠군.”
오늘은 김지영 이사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나를 소개하는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김지영 이사가 대표이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자리였다.
김지영 이사는 뒤로 돌아, 내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환하게 웃었다.
“누구 남친인지 몰라도 아주 잘생겼네.”
“우리 지영이 남친이지.”
“너 거기서도 지영이, 지영이 할 거야?”
“그럼. 자영이라고 할까?”
“치.”
입을 삐쭉 내미는 그녀.
이제 이건 키스를 해 달라는 시그널이 돼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 줘. 내가 운전할게.”
“지훈아. 기억하지? 혹시 애들이 심하게 해도,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녀의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가져온 모임의 재벌 2세들.
서로 견제만 할 뿐 속마음은 터놓지 않는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알았어. 사람 대하는 거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우리 지훈이가 그런 건 잘하지.”
“아니, 다른 것도 잘하는데?”
“그래? 그게 뭘까?”
나는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이거.”
우린 30여 분을 달려.
강남의 조용한 바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발레파킹을 해 주는 남자가 달려와 키를 받고, 출입문을 열어 줬다.
TV에서나 보던 앤티크한 분위기의 고급 바.
자유롭게 앉은 남녀들이 대화를 나누고, 바에 앉아 술을 마시며, 포켓볼과 다트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남자와 여자는 김지영 이사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영아!”
“지영 씨 오랜만이에요!”
8대2 가르마를 한 남자는 한눈에 봐도 40대로 보였고, 화장을 유난히 짙게 한 여자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잘 지냈어?”
김지영 이사가 밝은 표정으로 그들과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나를 그들에게 소개하려 했다.
“여긴…….”
남자 친구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어려운지.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남자와 여자에게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우리 지영이 애인입니다.”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지영이?”
“예.”
“와. 지영이 요새 잘 나가나 보네. 이런 꽃미남이랑 사귀고.”
남자는 김지영 이사를 보고 씩 웃은 후,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양우의 이종신입니다.”
“원지훈입니다.”
“여긴 우리 와이프.”
이종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와 그의 아내가 자리에 앉았다.
“앉아요.”
“네.”
나와 김지영 이사가 맞은편에 앉자, 이종신은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괜찮죠?”
“네.”
“무슨 일 해요?”
“MD일 하고 있습니다.”
“MD?”
“네.”
“그럼 지영이네 마크에서 일하는 직원인가?”
내 사회적인 지위를 확인한 그는 이전과는 180도 다른 말투를 구사했다. 그것도 마프를 마크로 부르면서.
“마크가 아니라 마프.”
“응?”
“마크가 아니라 마켓 프레시. 마프라고.”
내가 반말로 답하자, 이종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는 친구네. 좀 어려 보이는데, 나이가 어떻게 돼요?”
내가 쉽게 하대할 놈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 그는 다시 말을 높였다.
“서른입니다.”
“서른? 와. 지영아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종신은 히죽거리며,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비아냥거림을 묵묵히 참고 있던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응대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가 방금 잡았던 술병을 만지며, 그의 기억을 찾았다.
그리고 수많은 기억들 중 원하던 기억 하나를 찾아냈다.
“저기 종신 씨.”
내가 부르자, 이종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종신 씨?”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하……. 이 친구 참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까. 끝이 없네?”
“양우는 도시락이 메인이죠? 편의점 납품이 주력이고.”
“근데 왜요?”
“들리는 소문에 재고가 그렇게 많다면서요?”
“누가 그럽니까?”
버럭 화를 내는 이종신.
이제 나는 그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할 것이다.
“누구긴요. 제가 아는 기자들이죠. 반찬 몇 종만 바꿔서 유통기한 싹 바꾸고 들어간다고 하던데?”
이는 도시락 업체들이 종종 하는 수법이다.
유통기한이 긴 냉동제품들은 그대로 살리고, 나물들만 바꿔서 재가공하는.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대뜸 화를 낸다.
그럼 둘 중 하나다.
어떻게 재고 관리를 하는지 아예 모르거나, 진짜 그렇게 재가공을 한다는 것이다.
“식품 회사들 치열한 거 아시죠? 상대방의 비리는 곧 무기가 되니까.”
“이봐요!”
“여기 식품 회사 자제분들이 여럿 모이신 거로 아는데, 다른 분이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떻게 할까요?”
“……!”
“재미있겠죠?”
내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종신은 벌떡 일어나 나를 말리려 했다.
“그만합시다. 네? 됐습니까?”
이제 약점을 잡았으니, 여기 온 목적을 꺼내야 한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그럼 도와주시겠습니까?”
“또 뭘요?”
“지영이를 마켓 프레시의 대표이사로 선임할 생각입니다.”
“……!”
“양우에서 도와주시면 좀 더 수월해질 것 같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